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21)화 (21/96)
  • 21. 어찌해야 할까?

    세자의 말에 두화는 자신의 몸을 훑어 내리며, 이리저리 몸을 돌리면서 어디 흠이라도 있나 살펴보았다.

    그러자 세자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하고는 몸을 돌렸다.

    “옷이 날개라지만 본바탕이 따라가 주지 못하는구나.”

    “예? 하아, 정말 이러시기에요?”

    “내, 본 대로 말해 준 것이다.”

    웃으며 말하는 그의 말에 두화는 입술을 삐죽댔다.

    “아니, 그러니까 제 처지에 맞는 것을 사주시면 되지, 굳이 이 비싼 것을 사주시고 놀리시기나 하고!”

    뽀로통해져서 감히 따지고 든다. 그런 두화를 보며, 웃는 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헌의 얼굴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굳어졌다.

    몇 걸음 가던 두화가 갑자기 뒤돌아 도헌에게 달려왔다.

    “참, 장군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급한 것이 아니라면 저기… 따라가 봐야 해서요, 감히 저하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는지라.”

    “…유시(17시~19시) 에 다시 오마. 그때는 저하가 널 놔주시겠지.”

    “예, 저하께서도 궁으로 돌아가셔야 하니까 그러지 않겠을까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새삼 눈 속에 들어선다. 과음한 듯 가슴이 불뚝거리고 숨이 빨라졌다.

    “하면 이따 뵐게요, 장군님.”

    “그래….”

    고개를 숙이고는 세자를 향해 뛰어가는 두화를 향해 작게 중얼댔다.

    “…오늘은 꼭 나비 같구나, 노란 나비”

    ***

    서두르라기에 풍성한 치맛단을 잡고 성큼성큼 걷는 세자의 뒤를 힘겹게 따라갔더니만, 겨우 도착한 곳이 시전에서 가장 유명한 주막이다.

    의아해하며 따라 들어가 평상에 앉았다. 이른 시각이지만, 장이 서는 날이라 그런지 벌써 북적거렸다. 부지런한 봇짐장수와 등짐장수가 국밥에 술 한 잔씩 곁들이고 있었다.

    자한은 앉자마자 주모에게 국밥 두 개를 시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두화가 작게 속삭였다.

    “갑자기 여긴 왜 온 거예요?”

    “…백 장군하고는 여기 와 봤느냐?”

    “아니요.”

    “흠. 그자하고 밥은….”

    “제가 어찌 장군님하고 같은 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어요? 당치도 않죠.”

    피식 웃은 세자의 반응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조금 내빼었다.

    “어찌 그리 웃으셔요? 기분 나쁘게.”

    “맛있는 국밥을 먹을 생각에 기분만 좋은데, 넌 기분 나쁠 일도 많구나.”

    ‘밥은 나와 처음 먹는 것이다, 두화야.’

    이곳에 있는 사내가 이 나라 세자라는 사실을 남들이 들으면 안 되니, 최대한 얼굴을 가까이 붙여 작게 속닥거렸다.

    “허, 아니 막말로 저하께서 이런 주막에서 국밥을 자신 적이라도 있으세요?”

    곁에 있던 호위무사도 오늘은 보이지 않으니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어허, 와 본 적 있으니 데려온 것 아니냐?”

    물론 거짓이다.

    사림에게 들어 이곳의 국밥이 궁에서 먹는 탕이나 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기가 막힌 맛이라기에, 두화와 함께 오고 싶었다.

    내심 전날 물에 빠지면서까지 홀로 사내들을 상대하여 사건을 해결한 것에 미안함과 기특함에 상을 내려주고 싶었다.

    돈과 가택을 내려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하면 두화는 분명 상으로 내린 돈으로 제게 빚진 것을 갚으려 들 것이다. 하면 더는 찾아올 이유가 사라진다. 왠지 그리된다 생각하니 아쉽고 서운함에 가슴이 답답했다.

    새벽녘까지 고민하다가 동이 트자마자 사림을 불렀다.

    -시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하는 곳이 어디냐?

    -그건 갑자기 왜 궁금하십니까?

    -하문에 답만 하거라.

    -시전 중앙에 큰 주막이 있는데, 그곳 국밥이 제일입니다. 한데 왜요?

    -음.

    -설마 이놈이랑 같이 가시려고…

    -그러게 설마하니 너랑 가겠느냐?

    -아, 예.

    사림이 추천한 주막이다.

    마침 국밥이 나왔다.

    두화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모처럼 제대로 된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하기엔 콧속으로 스며드는 음식 냄새가 너무도 자극적이다.

    반면 자한은 온갖 채소 찌꺼기를 한 그릇에 담아낸 것 같은 국그릇의 건더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하, 안 드셔요? 맛있는 거라면서요?”

    두화는 부러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앞에서 보고 있으니 안 먹을 수도 없고, 자한은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들었다. 들긴 들었으나, 정말 이걸 어찌 먹어야 하나 고민되었다.

    “흐음. 그래, 먹자.”

    아무렇지 않게 수저를 떠 국물부터 음미한 두화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와, 정말 맛있네요.”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며 이걸 어찌 먹어야 하나 싶던 자한도 의심하며 수저를 떠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담백하지만 칼칼한 것이, 여태 궁에서는 먹어 보지 못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맛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오, 정말 맛나구나.”

    “그렇죠, 맛있죠? 음식은 겉만 봐서는 모르는 거거든요. 구운 물고기도 국밥도 이리 먹어봐야 안다니까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어제 그 생선은 정말 맛있었다.”

    “하면 다음에 한 번 더 구워드려요?”

    “그땐 나도 한번 잡아보마.”

    자한의 말에 두화는 수저를 입에 물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음흉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굽는 건 제가 할 터이니, 이자 삭감해 주셔요.”

    “뭐라? 안 된다. 어디 먹는 거로 치사하게 돈을 깎으려 드느냐?”

    “하, 먹는 거니까 더 그런 거죠. 불피우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담백하게 구우려면 얼마나 노련한 손맛으로 구워야 하는지 아셔요? 어제 보셨잖아요? 얼굴에 검댕까지 묻혀가며 구워야 하는 수고로움인데.”

    그녀의 말에 자한은 전날 그녀의 입술 부근의 검댕을 떠올렸다. 맛있게 먹기도 했지만, 강가에서 불을 피워 생선을 굽고,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시원하게 웃은 그 분위기가 좋았다.

    “뭐, 맛있게 굽는다면 그리해주마.”

    “참말이죠? 약조 어기시면 아니 되셔요.”

    “알았다. 국밥 식겠다. 어여 먹자.”

    “예!”

    그때부터는 두 사람 모두 국그릇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 뒤, 동시에 국그릇을 작은 상 위에 내려놓았다. 텅텅 빈 서로의 국그릇을 보던 두 사람은 작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 보셔요. 여기 처음 오신 거지요?”

    “흠. 아니다.”

    “별것 아닌 것에도 참 거짓부렁을 잘하시네요. 그냥 처음 왔지만 맛있었다 하시면 될 것을.”

    귀족 아씨처럼 입고 말하는 그녀는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순수하고 해맑은 그 웃음만큼은 어느 곳에서도 녹아든다.

    밥까지 다 먹었으니 저를 아침부터 찾은 연유를 말해 줄줄 알았지만, 세자는 시전을 벗어나 한적한 강가로 저를 이끌었다.

    간혹 달구지를 끌고 가는 노비와 봇짐장수만 지나다닐 뿐, 무척이나 고요한 장소였다.

    “저하, 이제 말씀해 주시지요.”

    “뭐를 말이냐?”

    “아침부터 절 찾으신 연유 말입니다. 급하게 서두르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말과 다르게 세자의 표정은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다.

    두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발끝에 채는 돌멩이를 톡톡 걷어찼다. 떼구루루 굴러떨어진 돌멩이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시키실 일이나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돌아가도 돼요?”

    “벌써?”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 세자를 향해 하마터면 버럭 소리칠 뻔하였다.

    밥도 먹었고, 걷고, 인적 드문 이곳에서 긴한 할 얘기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한낮이 훌쩍 지날 때까지 허송세월하고 있는데 벌써라니!

    “저하, 혹 요즘 한가하셔서 심심하세요?”

    “심심하긴, 잠잘 시간도 없이 바쁘다.”

    “한데 왜….”

    “응?”

    “왜, 미천한 제게 그 귀한 시간을 자꾸만 내어주시는지 궁금해서요.”

    “내가? 언제?”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다.

    하지만 두화는 지금 해야 할 말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거침없이 말하였다.

    “제게 귀한 시간을 내어주시는 것은 정말이지… 감읍할 따름이지만, 저도 제 생활이 있거든요.”

    “…!”

    “혹, 돈 때문에 매일 이리 괴롭히실 작정이시면 갚을게요.”

    “뭐라?”

    “딱 닷새만 말미를 주셔요. 음… 아니, 빌려서라도 내일 당장 갚을 터이니, 더는 이런 식으로 괴롭히지 않으셨으면 해서요.”

    두화의 말에 자한은 기가 찼다.

    정말 하루가 빠듯하고 바쁘지만, 순수하고 해맑게 웃는 두화를 보고 나면 답답하던 마음이 풀리니, 핑계 삼아 부러 나왔다.

    물론 웃전에 말이 들어간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져 당분간 출궁은 꿈도 못 꾸겠지만, 그런데도 저 하나 보자고 나온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괴롭히지 말란다.

    ‘기분 좋게 국밥도 먹고서, 네가 이리 나오면 아니 되지!’

    꾸깃 구겨지는 짙은 눈썹 아래로 냉랭하게 변하는 눈빛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돌렸다.

    어떻게 해서든 저와 있기 싫어 빠져나가려 하는 그녀 때문에, 알 수 없는 언짢은 기분이 가슴을 툭툭 쳐댔다. 자한은 처음엔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궁에서는 겪지 못할 마음의 평안함과 즐거움이 가슴을 충족시켰다.

    대비의 권력으로 제 뜻과는 상관없이 맞아들였던 세자빈과는 애초 정이 없고, 어쩌다 마주쳐야만 가식적인 안부 인사 정도가 다인지라 남녀 사이가 원래 그런 것인가 했다. 하지만 두화를 만나면 피부로 내리쬐는 햇살처럼 매번 가슴이 간질간질한다.

    ‘내게 이런 이상한 것을 가르쳐놓고, 또 마음을 훔친 주제에 돈을 갚을 테니 괴롭히지 말라고!’

    “말미를 주면 갚을 수나 있고?”

    ‘인제 와 내게서 감히 도망가려고! 어림없다.’

    어딘지 낮게 떨어지는 그의 음성이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하나, 이때 아니면 언제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라, 생각나는 대로 도헌을 떠올려 말하였다.

    “…급한 대로 장군님께라도!”

    순간, 자한은 두화의 팔뚝을 잡아채어 당겼다.

    그 바람에 놀란 두화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앗! 저하. 아파요.”

    “뭐라, 누구에게 빌려?”

    눈빛으로 호소해도 자한은 순간 자제력을 잃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엔 이기적인 시기와 질투가 들끓고 있었다.

    “정녕 백도헌, 그자에게 빌릴 것이냐?”

    “…하면 제가 그 큰돈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제게 잘해주시니 말이라도 꺼내 본다는 거죠. 그리고 제가 누구에게 돈을 빌리든, 갚기만 하면 되잖아요? 저하도 돈을 빨리 갚으라고 매일 찾아와 닦달하시는 거잖아요!”

    자한의 들끓던 마음은 조곤조곤 말하는 그 붉은 입술이 움직일 때부터, 다른 의미로 들끓기 시작하였다.

    숨이 가슴속까지 차서 가빠지고, 자꾸만 벌어졌다 오므려지는 그 입술만 눈 속에 들어찼다.

    여인들로 둘러싸여 있어도 한 번 마음이 동한 적 없다. 한데 왜 이 천것 앞에서만 이렇게 반응하는지 모를 일이다.

    ‘미치고 환장하겠군.’

    잡고 있던 팔을 놓은 자한은 몸을 돌려 가빠진 숨을 애써 잠재우려 했다.

    “저하, 괜찮으셔요? 숨소리가 이상해요.”

    “…괜찮다.”

    “혹 저 때문에 그래요?”

    “그래! 그러니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잠시 있거라.”

    자신이 뭘 어쨌다고 저리 역정을 내는지 모르겠다. 두화는 입술을 쭈뼛거리며 머릿속으로는 이따 백 장군을 만나면 돈 이야기를 어찌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고약한지고!’

    “…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 이어 들리는 소리는 전혀 반갑지 않다.

    “만약 백 장군에게 돈을 빌리면 그 금액만큼 이자를 늘릴 것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두화는 어처구니가 없어 따지고 들었다.

    “아니, 그런 법이 세상천지 어디 있답니까? 빌려서 돈을 다 갚았는데 이자는 또 내라고요?”

    “내 맘이다.”

    결국 자한은 제 신분을 이용해 억지를 부려본다.

    “예? 아니, 저하. 아무리 저하여도, 이런 억측은 말도 안 돼요. 갚는다고 하잖아요? 한데 왜 그러세요, 정말?”

    “갚거라. 누가 말리느냐?”

    “그러니까 갚겠다는데 왜 돈이 더 느냐고요?”

    억울해서 이젠 눈물까지 나오려고 한다.

    “갚거라. 다만 백도헌 그자한테만 빌리지 말고, 아! 훔쳐서도 안 되고… 그 외 다른 방법으로 갚는다면 말리지 않으마.”

    “하아!”

    그런 식이면 그 큰돈을 제가 어찌 다 갚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죽을 때까지 이렇게 심심풀이로 괴롭힘을 받다가 저승으로 갈 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