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20)화 (20/96)
  • 20. 거슬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영의정은 부정부패와는 먼 자라 알고 있다. 한데, 그런 영의정을 복면인이 노렸다는 것은 영의정 또한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리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뜻과 같았기에, 왕은 놀람과 동시에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면 괴한이 그대의 몸에도 뭔가를 남겼소?”

    “아니옵니다. 다만 이것을 주고 재물만 탐해 갔나이다.”

    품속에서 꺼내 든 것은 서찰이었다.

    서찰을 펼쳐 든 왕의 눈이 점점 커다랗게 변하더니 급기야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서체 어딘지 낯이 익구려.”

    왕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에 영의정은 조용히 답하였다.

    “예. 소신도 설마설마하였나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죽은 이인데.”

    흔들리는 왕의 목소리에 영의정 또한 목소리가 떨렸다.

    “예, 분명 죽은 이옵니다.”

    “아닐 것이오. 죽은 이를 누군가가 흉내 내는 것이겠지.”

    “전하, 소신도 그리 믿고 싶사옵니다. 하오나 서찰에 담긴 그 뜻도 그리 넘기기엔….”

    [간신의 말에 귀가 썩고, 혜안이 흐려져 종내엔 충신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니, 하늘의 기운이 남아있을 때 부디 설, 장, 김, 오 가문의 남아있는 간신을 쳐 내시어, 백성을 두루 살피시길 간곡히 원하옵니다.]

    “전하, 서찰에 쓰인 설, 장, 김, 오 가문은 바로 그 옛날 천 가문을 몰아내는 데 제일 앞장섰던 가문이옵니다. 천 가문은 충신이었으나 그들의 감언이설로 한순간 역적이 되어….”

    “그만!”

    왕 또한 알고 있다.

    ‘그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느니.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만 왕권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하여 과인은 충신이자 벗인 그를 쳐 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막강한 설 가문을 제외한 장, 김, 오 가문 중 일부만 남기고 모두 쳐 낼 수 있었고, 해서 지금의 왕권을 지킬 수 있었다. 만약 그때 그들과 맞서려고 했다면 지금쯤, 좌의정 설변도의 세상이 되어 화월국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말은 안 하던가?”

    “예. 그저 서신을 적고, 가만히 앉아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나이다. 복면으로 가려져 알 순 없었으나, 곧은 그 눈빛이 일랑 그자를 떠올렸나이다. 소신 또한 아주 청렴결백하다 할 순 없어도 전하를 모시며 산 세월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 자신하옵니다.”

    “한데 괴한이 어찌 영의정을 찾은 것이오?”

    “제집을 떠나기 전 충고를 하였나이다. 아마도 충고를 하려고 제집에 들른 것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향후 간신들을 쳐내시지 않는다면….”

    뒷말을 아끼는 영의정을 진중하게 바라보던 왕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란이라도 일으킨다고 하던가?”

    “전하,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차라리 반란이라면 명분을 앞세워 다시 죽이면 그만일 것이다. 하나, 그리하면 천 가문의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백성의 민심이 또다시 다시금 돌아설 것이다. 지금도 천 가문을 옹호하는 자들이 꽤 많기에, 영의정은 그것이 더 두렵다.

    간밤 일랑은 제게 간신을 쳐내지 않는다면, 또다시 화월국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피바람, 대관절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기에 더 불안하다. 반란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면 적국으로 귀화하려 하는 것인가? 이제 와 적국으로 귀화하기엔 말이 되지 않는다. 그의 의중이 무엇이든 간에 그저 화월국의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정말 일랑 그자가 살아 있었다면 왜 진작 과인을 찾지 않았겠는가? 믿었던 신의를 배신한 과인을 제일 먼저 죽이고 싶었을 사람일 텐데.”

    말은 그리 했을지언정 왕은 그가 정말 살아있나 싶은 의구심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전하. 지금이라도 일랑 그자의 신원을 복권해주시면….”

    듣기 싫다는 듯 물러가라는 왕의 손짓에 영의정 백기세는 조용히 물러났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왕은 침전의 가장자리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벽이 반쯤 열리며 검은 복면을 쓴 자가 나타났다.

    “들었느냐?”

    “들었사옵니다, 전하.”

    “천일랑, 살아있어 반갑고 미안하나 그럼에도 과인을 위해 죽었어야 할 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어 가는 길 괴롭지 않게 보내주거라.”

    “명 받잡겠나이다.”

    스르륵 닫힌 문을 뒤로 하고 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로 향했다. 작게 중얼대는 왕의 목소리가 한없이 서글프기만 하다.

    “충신이자 나의 벗, 일랑. 차라리 멀리 떠나 숨어 살지 그랬나?”

    낮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좌의정을 진즉 물리라는 그대의 말을 듣지 않은 과인의 불찰이지. 그자가 그리 막강한 힘을 가질지 뉘 알았겠는가. 자네가 과인을 원망하여도 어쩔 수가 없네. 자네가 살아있음에 좌의정과 부딪친다면 왕권이 흔들릴 수도 있음이야.”

    햇살은 따사롭기만 하건만, 마음은 휑하니 쓸쓸하다.

    “세자에게 물려줄 왕권은 과인의 시대보다도 더 강해야 한다. 누구도 내 아들을 조금이라도 위협할 수 없도록 말이다. 해서 미안하군. 내 그대를 또다시 죽여야만 해. 훗날 저승에서 만나면 그대에게 백배사죄하겠다.”

    ***

    여지없이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귀한 분들 때문에, 두화의 좁혀진 미간이 풀리지 않는다.

    성질 더러운 세자는 자신이 사준 의복을 입고 나오지 않아서인지 성난 표정으로 노려보고, 백 장군은 저를 꿰뚫어 보듯 뚫어지게 보고만 있다.

    ‘당최 이분들 내게 왜 이러는 걸까?’

    그깟 돈주머니 때문에, 이리 괴롭히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재물은 넘치도록 많은 분이 대체 왜 이러느냐고!

    차라리 관아에 넘기든지 하지!

    “저, 저하. 그리고 장군님?”

    여태껏 저만 바라보던 두 사내의 시선은 제 말에 조금 더 집중한 듯 뚫어지게 바라본다.

    “오늘은 또 두 분이 함께 어쩐 일이세요?”

    그러자 자한이 조금은 냉랭하게 대꾸하였다.

    “함께 온 것이 아니니라. 요 앞에서 만났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백 장군은 또 무슨 일인가?”

    “소신은 두화에게 볼 일이 있어 왔사옵니다.”

    도헌의 입에서 두화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흘러나오자, 자한의 짙은 눈썹이 찰나 삐뚜름하니 올라가다 내려왔다.

    “무슨 볼일?”

    “별것 아니옵니다. 하온데 저하께서는 무슨 연유로 이리 이른 아침부터 출궁하셨나이까? 잠시 뒤면 조강에 들 시각이 아니 옵니까?”

    싸늘하게 변하는 자한의 눈빛에 도헌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내가 무얼 하던 자네에게 일일이 말해야 하나?”

    두 사람의 기 싸움에, 중간에 끼어있는 두화만 죽을 맛이다. 두 사람 사이로 양팔을 펼치고 끼어들고는 소리쳤다.

    “두 분 다 그만하셔요!”

    “…!”

    “…?”

    “음, 두 분 모두 제게 용건이 있어 찾으신 듯하니 한 분씩 말씀하세요. 저하 먼저 말씀하시지요.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제 말이 끝나기도 전, 그의 이마 위로 기분 나쁘다는 듯 주름이 팍 지어지다 사라지는 것을 두화는 보았다.

    ‘뭐야 또? 그래도 장군보다는 더 높은 사람이니 먼저 대우해줬는데도 저 모양이야?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저하?”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듯 그를 재차 불렀다.

    또 참는 듯 이마 위로 굵게 지어지다 사라지는 주름을 본 두화는 제가 또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덩달아 얼굴이 찌푸려졌다.

    “흠. 가서 그 의복부터 갈아입고 오너라.”

    “예?”

    “매번 내게 두 번씩 말하게 만드는구나. 앞으로 되물을 때마다 이자 한 냥씩 붙을 줄 알아라.”

    히익!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측이요, 횡포란 말입니까?

    씩씩대는 것이 표정으로 다 드러나는 두화를 내려다보며, 자한은 그제야 불만스럽던 기분이 조금씩 완화되는 것 같다.

    이 아이에게 과하지 않게 심통을 부리는 것이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하나, 제 심통을 받아들이며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과 삐죽대는 저 입술, 그리고 감히 세자인 제게 당돌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제야 제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궁 안에서는 늘 누구나 제게 인형처럼 가면을 쓰고 대한다. 맹지 빼고는 제일 가까워야 할 세자빈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기 없는 인형이로되 세자빈이야말로 어찌 보면 화려하지만, 감정을 감춰야만 살 수 있는 궁에 제일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흑백의 먹그림처럼 생기 잃은 사람들과 궁에서 있으려니, 마치 현실이 아닌 종이 안 그림 속에 사는 기분이다.

    “시간 없다. 서두르거라, 두. 화야.”

    지척에 있는 백도헌을 의식해서 자한은 부러 두화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힘주어 불렀다.

    싫은 티를 내어본들 어쩌랴.

    이 나라 세자가 하라는데, 해야지.

    입술을 삐죽대며 두화는 움막을 향해 언덕길을 내려갔다.

    “저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급하신 용무가 아니라면 소신이 잠시 두화와 할 이야기가….”

    조금 풀렸던 자한의 안면 근육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 저 듣기에 불편한 소리를 하는 도헌을 쳐다봤다.

    “궁금하군, 자네가 저 아이와 무슨 긴한 할 이야기가 있어 이리도 청하는지 말이야?”

    “…”

    “내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 이야기인가?”

    “그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제가 먼저다.

    한데 흔한 이름조차 남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을 주워 부르지 않았던가. 자한은 그 당시 뭔지 모를 불편했던 심기가 남았는지, 도헌과 마주하자 또 가슴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한데 지금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가 두화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단다.

    가만히 도헌을 빤히 바라봤다. 전쟁터에서 살인귀라 불렸을 만큼 어찌 보면 공허해 보이는 새까맣다 못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공이 그가 강인함과 올곧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게 더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차라리 한량 같은 귀족 나부랭이라면 작은 흠 하나 잡아 겁박하며, 이곳에 얼씬도 못 하게 하면 그만인데, 같은 사내가 보아도 완벽하니 그게 더 문제다.

    “거슬려.”

    작게 중얼댄 소리에 듣지 못한 도헌이 물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아닐세. 급한 것이 아니라면 오늘은 자네가 비켜 주게나.”

    결국 이야긴 도로 원점이 되어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는 처음과 같아졌다.

    도헌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밤 제집의 담장을 넘어 저와 대결한 괴한이 두화라 의심하여 찾아온 것이다. 아니, 확신하여 찾은 것이다. 그리고 좀 전 두화가 세자와 저 사이에 있을 때, 분명 간밤과 같은 향내가 코끝에 맴돌았다.

    제집의 담을 넘은 괴한은 비단 두화뿐이 아니었다. 자신이 두화를 상대할 때 다른 괴한들이 곳간을 털었다.

    요즘 화월국을 들썩이는 복면의 괴한들 속에 두화가 어찌하여 끼어있는지 물을 작정이었다. 사사로운 감정보다도 괴한을 일망타진하는 일 또한 제게 맡겨진 일이기에, 동이 트기 전까지 한숨 자지 못하였다.

    한데 난데없이 세자가 또 등장할 줄은 몰랐다.

    ‘저하께서 왜 날 경계하는지 모르겠군.’

    저번부터 제게 까칠하게 구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더 말해봤자 세자는 본인의 뜻을 꺾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저하께서 그리하라면 그리해야겠지요.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마침 언덕 위로 올라오는 인기척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을 바라봤다.

    전날 세자가 사주었던 의복 중 쪽빛을 닮은 치마에, 복숭아꽃 색감의 저고리는 그녀를 한층 더 성숙하게 보이게 했다.

    더구나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햇살에 비치는 저고리와 치맛단에 놓인 금사의 나비 수가 반짝여, 마치 나비가 그녀 주위를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넋을 잃은 두 사내의 시선은 거두어질 줄 몰랐다.

    “자, 말씀하신 대로 입고 왔사옵니다.”

    “흠. 생각했던 것보다는 못하구나.”

    자한은 이상하게 마음과 다른 말이 툭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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