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19)화 (19/96)
  • 19. 털어도 하필 여기가 어디라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가락을 보니 검지엔 검댕이 묻었지만, 정말 엄지손가락은 깨끗했다.

    “하면 어찌 내 얼굴에 손을 댔더냐?”

    “그거야 좀 전 생선을 드실 때 입술 위에 검댕이 묻었으니까, 지워드리려고요.”

    “…!”

    “하면 이제 손 좀 놔 주셔요.”

    두화의 말에 자한은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손을 놔 주었다. 소매 속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 입술 주위를 살살 문질렀다. 한데 그리 문지른다고 지워질 검댕이 아니었다.

    “거기 아직 남았는데….”

    “흠, 여기 말이냐?”

    “아니요, 조금 더 왼쪽으로….”

    “여기 말이냐?”

    “조금 더 옆으로… 괜찮으시면 제가 닦아드려요?”

    답답한 마음에 두화는 제가 하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자한은 마지못해 손수건을 건넸다.

    살살 문지르며 집중하는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또, 아까처럼 머릿속도 가슴도 요란하게 난리다.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뒤로 내뺐다.

    “저하, 가만히 좀 계셔요. 그리 움직이면 어찌 닦아냅니까? 아무래도 물을 좀 묻혀야겠어요.”

    총총걸음으로 강물로 가더니 손수건을 적셔온다.

    시원함이 얼굴에 닿는다.

    몇 번 더 쓱 문지르더니 그녀가 활짝 웃는다.

    “다 되었네요.”

    “이리 내 보거라.”

    손수건을 건네자 그가 두화의 얼굴을 잡는다.

    “너도 이제부터 가만히 있거라.”

    “아, 저는 괜찮아요.”

    “지금 얼마나 흉한지 보는 내 눈 버릴까 봐 아니 되겠다.”

    “정말 괜찮은데….”

    “어허, 가만히 있으래도!”

    나직하게 말하는 그의 명령에 두화는 하는 수 없이 얼굴을 맡기었다.

    “못난 얼굴이 검은 것 때문에 흉했는데, 이제야 좀 봐줄 만하구나.”

    그의 놀림에 두화는 입술을 삐죽댔지만,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원한 웃음을 한참이나 터뜨렸다.

    ***

    검은 복면을 얼굴에 두르던 두화는 아침나절의 일이 떠올라 괜히 침상을 퍽퍽 발로 걷어찼다.

    “못된 저하 같으니라고! 내가 뭐 그리 못났다고?”

    허리춤에 손을 얹고 씩씩대던 두화는 금세 제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되새긴다.

    “감히 저하의 주머니를 털었으니 죽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있는대서 천것이니 뭐니 하질 않나? 어! 자기 마음대로 자기 거라고 하질 않나… 내가 뭐 사고파는 물건인가? 자기 거게… 그리고 내가 자기 얼굴 만진 것보다 내 얼굴을 더 주물럭댔으면서….”

    침상을 퍽퍽 걷어차던 발길은 어느새 잦아들어 바닥을 발끝으로 톡톡 건드려본다.

    -두화야, 넌 내 것이다.

    낮고 끈적한 세자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못난 얼굴이 검은 것 때문에 흉했는데, 이제야 좀 봐줄 만하구나.

    시원한 세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세자의 손가락이 닿았던 제 입술 부근을 문지르고 있다. 순간 정신을 차린 두화는 곁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제멋대로인 저하랑 있어서 이상한 병이라도 걸렸나 봐. 가슴은 또 왜 이리 쿵쿵대고 난리야?”

    제 가슴을 벅벅 쓸어내리는데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부친이 채근한다.

    “예! 나가요, 아버지.”

    강단 있게 대답하는 두화의 시선은 침상 아래 살짝 나온 비단 보자기로 향해 있다.

    ‘저것만 팔아도 금세 다 갚겠다. 다 입지도 못할 거 좀 팔면 어때서, 하여간 사람 괴롭히는 재주도 독특하다니까!’

    ***

    눈에 띄게 높은 담장을 넘자, 으리으리하다는 말의 뜻을 새삼 느껴버리게 되는 저택이다.

    곧게 뻗은 소나무 사이에 정자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연못과 함께 곳곳에 흔히 볼 수 없는 나무가 심겨 있어 이곳이 정녕 화월국인가 싶다. 꿈에서조차 본 적 없는 천계가 아닌가 싶어 잠시 넋이 나간 두화다.

    넋을 놓고 있자, 부친이 팔꿈치를 툭 건드린다. 부친을 올려다본 두화가 아차 싶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서 빨리 움직이자는 손 신호에 맞추어 같이 온 거지 삼촌들과 날래게 몸을 움직였다.

    부친은 제일 중심부에 있는 이 저택의 주인이 쓰는 방으로 향했고, 두리번거리던 두화는 반대편으로 향하던 중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 앞에 멈춰 몸을 숨기고 엿보았다.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는 긴 무언가를 정성스레 닦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저건 검? 잠깐만… 오늘 터는 곳이 어디라고 했더라?’

    기둥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두화의 두 눈이 금세 함지박만 하게 커져 버렸다.

    “힉!”

    놀라 터져 나오는 기괴한 숨소리를 감추려 두 손으로 막았지만, 아주 찰나 미약하게 새어 나가 버렸다.

    ‘아버지도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하필 여길 털러 온 거래?’

    이제라도 돌아가면 괜찮겠지, 싶어 부친과 삼촌들을 부르려 발자국을 떼는데 서슬 퍼런 뭔가가 제 목에 닿았다.

    ‘염병, 올해 칼 맞아 죽을 운세였던가 내가? 도대체 이게 몇 번째냐?’

    낯설지 않은 그 서늘함에 숨을 집어삼켰다.

    “웬 놈이냐?”

    서늘한 검만큼 그 주인 된 자의 목소리도 차가우며 나직하였다.

    “…!”

    “목숨이 두 개이지 않고서야 감히 살인귀라 불리는 내가 있는 이 저택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냐?”

    얼굴에 눈만 드러낸 두화를 알아보지 못한 도헌은 당장이라도 제집의 담을 넘은 시커먼 복면인을 베어버릴 기세다.

    ‘이 위기를 어찌 넘겨야 해?’

    두화는 머릿속에 탈출구를 그려보아도 제 목에 닿은 서슬 퍼런 검이 치워지지 않는 한 도통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안쪽에서 잠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도헌의 신경이 찰나 그쪽으로 향하며 두화의 목에서 검이 살짝 떨어졌다.

    기회를 잡자마자 두화는 냉큼 몸을 날려 그에게서 떨어졌다.

    “네놈이 도망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

    검의 방향을 바꿔 공격적으로 자세를 바꾸는 그의 모습에, 마냥 도망만 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로 뒤 대나무를 발로 밟아 꺾어 급한 대로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보던 도헌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과연 그것으로 날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기느냐?”

    “…”

    뭐라 물어도 말문을 열지 않는 괴한에 도헌은 정말 모처럼 크게 웃었다. 제 말에 대꾸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저와 붙어서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괴한의 배짱에 도헌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만약 내 옷깃이라도 스친다면 날 심심치 않게 해주었으니 특별히 살려서 보내주지. 하나, 그러지 못하면 이미 목숨을 걸고 담장을 넘어왔으니 내 친히 그 목을 베어주마.”

    대나무를 꼭 쥔 두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좀 전까지도 별마저 감추었던 구름이 제 갈 길을 간 모양인지, 숨어 있던 수많은 별이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아직은 채 차지 않은 달마저 모습을 보이니 그제야 작은 정원이 은은한 빛으로 점차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에 이제야 상대를 보게 된 도헌의 눈이 가늘어지다 되돌아왔다. 사내치고는 왜소한 체격의 괴한.

    하나, 복면 속 그 날카로운 눈빛에 쉬이 볼 상대가 아님을 느꼈다.

    “오너라.”

    검을 들어 상대를 가리키니, 잠시 주춤하는가 싶던 괴한이 무모하게 달려든다. 하나, 무모하다고 여길 것이 아니었다. 비록 힘과 절도는 약했으나, 빠르기와 급소만을 정확하게 노리고 달려드니 어느새 도헌 역시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괴한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때때로 한 방에 제압할 수 있음에도 부러 놔주고, 틈을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두 사람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시간을 끌수록 체격 차이 때문에 내가 불리해.’

    두화는 마지막으로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때마침 구름이 달을 삼키어주니 주변이 도로 캄캄해졌다. 이미 그가 움직이는 순서는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여태 이리저리 그를 유도하여 움직인 것이다. 아주 찰나지만 그가 막지 않는 단 한 곳, 옆구리를 노려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윽!”

    서서히 구름이 걷히자 그가 옆구리를 잡은 채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다.

    두화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무인에 대한 예로서 대나무를 두 손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고는 그 자리에 대나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조대로 그가 자신을 풀어줄 것이라 여기고 몸을 돌렸다.

    “전쟁터에서 적에게 등을 보이는 것은 목을 쳐달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

    으르렁거리듯 내뱉는 냉철한 그의 낮은 목소리에 마치 두화의 발은 묶인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약조했으면서 지키지 않을 작정인 거야, 지금?’

    “…아까와는 말이 틀리지 않소!”

    두화는 부러 굵직하게 목소리를 내보지만, 약조를 지키지 않는 것에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격앙되어 소리쳤다.

    그때 도헌은 미심쩍던 것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지만 말끝에 느껴지는 낯익은 느낌. 더구나 땀을 흘리며 몸을 부딪친 순간부터 흔하지 않은 향내가 미미하게 제 코끝을 스쳤다.

    분명 오늘 아침 그녀에게 제 상의를 걸쳐 주며 맡았던 향이다. 사내보다도 작은 체구에 흔치 않은 향을 가졌고 날랜 몸놀림을 구사하는 괴한은 바로….

    ‘설마!’

    “오늘 내 집의 담장을 넘은 것은 누굴 해하려고 작정하고 들어온 것이냐?”

    확인해야 한다.

    만약 누굴 해하려고 들어온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인연이 있었다 한들 잡아 관아에 넘겨야겠지.

    “…아니요.”

    “하면 재물을 훔치러 온 것이냐?”

    “…”

    “맞는 모양이군.”

    예서 시간을 더 지체하여 자신이 잡힌다면 부친과 거지 삼촌들까지 위험에 빠진다. 두화는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할 때, 재빨리 빠져나가려 기회를 엿보았다.

    서서히 구름이 달을 또 삼키려 드는 그때 두화는 더는 기다리지 않고 낮은 담장을 넘어 부친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도헌은 담장을 넘는 두화를 보며 작게 중얼댔다.

    “…내 너를 정말 죽일 뻔하지 않았냐, 두화야.”

    ***

    다음날 영의정 백기세는 심각한 얼굴로 등청하였다. 그는 정사를 논의하고 왕과 따로 독대를 청하였다.

    “전하, 불충한 소신 백기세, 이만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날까 하옵니다.”

    그간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던 영의정이었기에 왕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어찌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게요?”

    “오래 고인 물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사옵니다. 사람 또한 같다고 생각하옵니다. 소신, 전하의 과분한 은혜에 높은 자리에서 원 없이 전하를 위해 한평생을 살았나이다.”

    그의 충심을 모르지 않는다. 왕은 갑자기 정치에서 물러나려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허, 어디가 좋지 못한 게요?”

    “아니옵니다. 그저 전하가 이룩한 이 화월국의 태평성대를 더 젊고 유능한 이들이 전하의 곁에서 전하를 위해 일할 수 있게, 소신 같은 늙은 퇴물은 자리를 비켜 줘야 하지 않을까 하여…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영의정, 갑자기 이러는 것이 과인에게 불충임을 모르오? 그간 그대가 쉬지 못하여 그런 것 같으니 며칠 쉬다 다시 등청하시오.”

    왕은 쉽게 놔주질 않았다.

    영의정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 못하였다.

    “전하, 이실직고하겠나이다.”

    “…무얼 말이요?”

    “간밤… 복면인들이 제집을 급습하였나이다.”

    “뭐라!”

    화월국의 귀족들 사이에 요즘 한참 두려움을 안겨주는 그 복면인을 말하는 것이다. 분개하면서도 놀란 왕의 목소리가 침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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