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17)화 (17/96)
  • 17. 내 것이야!

    남으라는 세자의 그 말에 도헌도 두화도 순간 또 뭔가를 하명할 것이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도헌이 나서서 물었다.

    “또 하명할 일이 있으시옵니까?”

    “없다.”

    “하오면 어찌하여 두화를 남으라 하십니까?”

    “내 일일이 자네에게 다 말하여야 하는가, 백 장군?”

    “하오나 두화도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시라도 빨리 의복을 갖춰 입어야 하옵니다.”

    그의 말에 자한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걸 아는 자가 여인이 사내를 때려잡게 만들고 물에 들어가게 했나?”

    “그것은!”

    “됐고, 저 여인도 상황은 별반 차이가 없는 듯싶은데. 더구나 저 아이와 다르게 그 여인은 귀족이지 않은가?”

    “…!”

    세자의 말에 도헌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였다.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똑같이 처한 상황에도 천것은 하루살이와 같은 신세니, 홀딱 벗어 망신을 당하여도 누구 하나 그 당시만 웃고 넘길 뿐이지, 그것을 가지고 회자하지 않는다. 하나 귀족은 가문의 체면과 명예가 땅에 떨어져, 회자되는 이야깃거리에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두화는 그의 말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왜 자꾸 세자의 말이 귓바퀴를 맴도는지 모르겠다.

    -… 저 아이와 다르게 그 여인은 귀족이지 않은가?

    도헌은 세자를 원망스레 바라보는 두화를 뒤로하고 여인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도헌의 모습이 점차 보이지 않음에, 두화는 제가 처한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였다.

    여인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날렸지만, 돌아온 것은 또 귀족과 비교되어 천것이라는 신분의 굴레였다.

    ‘하아, 내가 뭣 하자고 아침 댓바람부터 미친 지랄을 부린 것인지….’

    고요한 적막을 깬 것은 강가를 날아다니는 새소리였다.

    새소리에 맞춰 자한이 헛기침을 하였다.

    “이제 말씀을 좀 해주시지요, 저하.”

    만난 이래로 처음 듣는 쌀쌀맞은 목소리에, 고개가 삐뚜름하니 꺾여 두화를 내려다봤다.

    “그렇잖아요? 이미 사건은 끝났는데 굳이 절 남으라 하신 연유 말이에요. 남으라 했으면 뭐라도 시키셔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 지금 한 식경은 지난 듯싶어서요, 저하!”

    “해서 불만이냐?”

    “예! 춥고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요.”

    정말 춥고 배고파서 짜증이 왕창 나 있는 상태라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라?”

    “저하는 모르시겠지만, 수영하느라 속곳까지 다 젖은 상태에요 지금. 아침 댓바람부터 젖은 채로 강가에 서 있는데, 안 추울 사람이 있겠는지요?”

    “…!”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두화는 짜증이 난 상태라 저도 모르게 구시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천것이라 해도 젖어 추운 건 똑같건만 누군 보내주고, 누군 남으라 하더니… 이게 무슨 똥개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중얼거림에 자한의 굳어진 눈매가 일자로 된 것을 본 두화는 냉큼 몸을 돌려 헛기침을 했다.

    또 뭐라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뒤가 조용한 걸 보니 못 들은 모양이지 싶어 몸을 반쯤 돌리는데!

    “…!”

    어느새 부쩍 가까이 다가온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주제도 모르고 또 입을 함부로 놀린 제 주둥아리를 탓해보지만, 이미 말은 입 밖으로 흘린 뒤이니 어찌하랴.

    “그리 춥더냐?”

    “…저하라면 안 춥겠어요?”

    반쯤 튀어나온 입술이 불만을 제대로 전하고 있었다. 아니, 원망이 가득한 표정이다. 자한이 손을 뻗어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두화의 귀밑머리로 향하는데, 그녀가 눈을 질끈 감는다.

    허공에서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한 자한의 손이 결국 멈추고 만다.

    저 추울까 봐 염려하는 제 생각도 모르고 저리 질색하는 걸 보아하니, 저를 아주 파렴치한 호색한으로 여기는 듯싶다. 걱정되던 마음은 금세 돌아서 버린다.

    “따라오거라.”

    좀 전과 달리 냉랭하기만 한 목소리에 두화는 실눈을 뜨고 바라봤다.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빨리 안 오고 뭐 하느냐?”

    날 선 눈빛으로 채근한다.

    또 저 성질 더러운 세자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귀찮아서 두화는 자꾸만 벌어지는 상의의 앞섶을 쥐어 잡고 뛰었다. 자꾸만 벌어지는 앞섶에 신경이 쓰여 그가 선 줄도 몰랐다.

    “게서 있을 테냐?”

    “예? 아니요, 가요.”

    그가 이내 들어간 곳은 분명 두화도 왔었던 곳이다.

    들어서자 역시나 포목점 주인은 그가 걸친 옷감을 알아본 듯 무척이나 깍듯하게 굴었다. 그러다 두화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무척이나 친근하게 아는 척을 해왔다.

    “아, 저번에 그 거지 아닌가?”

    “예? 아, 네.”

    “아이고, 아침부터 뭘 했기에 흠뻑 젖었네. 그래, 찾는 물건이라도 있는가?”

    두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포목점 주인은 내부를 휙 둘러보는 자한을 보며 웃었다.

    “같이 오신 저분은 아닌가 본데.”

    포목점 안을 둘러보던 자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만 봐도 포목점 주인은 그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는 것을 얼굴로 시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포목점 주인은 이내 헤헤거리며 전처럼 안쪽으로 안내하였다.

    역시나 그곳엔 몇 안 되지만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하늘거리는 의복들이 걸려 있었다.

    그것들을 본 자한은 이내 발길을 돌렸다.

    누구보다도 포목점 주인이 난감해했다.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은 화월국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 자부했는데, 이런 손님은 처음이라 보통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대관절 얼마나 대단한 귀족 집안이기에, 저 옷들이 눈에 차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네.’

    옷에 있어 자부심을 품고 장사를 하던 포목점 주인은 자존심이 상해 버렸다.

    “저 안의 것도 마음에 차지 않으시면 어떤 의복을 찾으시기에….”

    “조금 전 봤던 7벌 모두 이 여인에게 싸주게.”

    이를 악물고 물었던 포목점 주인은 자신이 생각하던 대답과는 다른 뜻밖의 소리에,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

    포목점 주인의 눈이 동그래지다 못해 튀어나오려 했다.

    “저, 나리. 한 벌도 아니고 7벌이면 가격이….”

    “이거면 되겠나?”

    그의 손위에서 탁상위로 툭 굴러떨어진 것은 아이 주먹만 한 금덩이였다. 그것을 들어 요리보고 저리 보던 포목점 주인은 이로 깨물어보기까지 했다. 자신만의 검증으로 진짜 금인 것을 확인하자 이내 허리를 굽히며 연신 감사하다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정작 그 옷의 주인이 된 두화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자한을 바라봤다.

    “어찌 그리 보고만 있느냐? 어서 들어가 아무거나 하나 입고, 나머진 이자에게 싸 달라고 해.”

    “하지만… 너무 과해요. 그냥 여기 있는 것 중에서 저고리만 사 주셔도 되는 것을요.”

    자한은 포목점 주인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 손짓했다. 포목점 주인은 냉큼 금덩이를 들고 안쪽의 안채로 들어가며 문을 닫아버렸다.

    둘만 남자 금세 주변이 고요해졌다.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그의 발걸음에 두화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주춤거리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조금 전 몽땅 사들인 의복이 있던 그 방문 앞에 등이 닿고 만다.

    “어찌 이러셔요?”

    “난 말이다.”

    “…!”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다가온 그가 두화의 옆 얼굴선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 것에 다른 놈의 손길이 닿는 것이 싫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하? 좀 비켜 주시지요, 네?”

    “두… 화.”

    느리게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눈빛이 찰나 가늘어지다가 이내 두화를 강렬하게 바라봤다.

    “예?”

    “여러 번 만났는데도 네 언제, 내게 이름을 말해 준 적 있더냐?”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하면 저하는 어떻게 제 이름을 아셨어요?”

    설마 사람을 시켜 알아봤나?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 입으로 말해 주었다면 이렇게 화도 나지 않았을 터. 내가 왜 백 장군의 입에서 흘러나온 네 이름을 주워 불러야 하느냐?”

    “…!”

    두화는 한밤중 간혹 먼 산에서 들리는 범의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신경이 곤두섰다. 견고한 권위가 느껴지는 말투는 상대를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사슬이라도 있는 것인지, 당최 그 집요한 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두화야.”

    “…”

    “두화야, 넌 내 것이다.”

    “어찌… 제가 저하 것이라 하셔요? 아무리 미천하다 하나 전 저예요. 설마 돈 때문에 제가 저하 것이라 하면, 며칠 말미를 주셔요. 갚겠습니다. 하니 이상한 말씀 그만두시고 그만 좀 떨어져 주셔요, 갑갑합니다.”

    감히 두 손으로 이 나라 세자의 가슴을 밀었다. 순간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와 더불어 저와 같이 세차게 뛰는 심장 울림에 놀라 냉큼 손을 거둬들였다.

    “스스로 미천한 것을 알면서도 감히 세자의 몸에 손을 대는 이 오만방자함이….”

    ‘… 내 호기심을 더 자극하는 것을 넌 모르느냐?’

    “그것이 아니라 저하께서 이리 가까이 오시니까….”

    이젠 정말 바로 코앞까지 온 그 때문에 두화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였다. 내리깐 눈빛으로 그가 빤히 바라보니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만 같다.

    “내 하라는 대로 의복을 입고 빠진 것 없이 다 챙겨 나오거라. 하면 빚 중에 일부를 탕감해 주마.”

    ‘정말?’

    두화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빚만 빨리 없어져도 성격 더러운 세자와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입으러 들어가던 두화는 그의 말에 발걸음을 멈추어 서야만 했다.

    “빚을 전부 탕감할 때까진 넌, 내 것임을 항시 잊지 말아라.”

    그깟 돈, 부정부패한 관리의 저택 몇 채만 털어도 금방 갚고 남을 것이다. 하나, 그 돈은 굶주리고 어려운 백성을 위해 써야지, 제 사사로운 곳에 쓰면 안 되기에 두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뒤돌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이지요! 빚을 전부 다 갚을 때까진 저하 말씀대로 저하의 발이라도 닦으라면 닦을게요.”

    어딘지 가시가 돋친 그녀의 말에 자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다 내려왔다.

    그럼 그렇지.

    제가 아무리 화를 내도 저리 오만방자하게 나와야 그녀다. 감히 미천한 주제에 자존심은 있어서, 저리 꼬박꼬박 말대꾸한다. 톡 건들면 파닥파닥 튀는 물고기처럼 말이다.

    하긴 그래서 더 제 눈에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내 팽하니 방으로 들어간 두화는 잠시 후 고운 의복을 입은 귀족 아씨가 되어 나왔다. 자한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옷이 날개라지만 정말 귀태가 흘렀다.

    “내가 찾을 때마다 그 옷들 전부 입고 나와야 한다. 단 하나라도 몰래 판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야.”

    “…네.”

    ‘칫, 차라리 주려면 이런 천 쪼가리보다 아까 그 금덩이나 주지.’

    잠시 후 포목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풍시전을 빠져나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막으로 돌아갈 요량으로 두화는 원래 다니던 길이 아닌 강둑으로 내려갔다.

    “애먼 길 놔두고 왜 그리로 가느냐?”

    솔직하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말을 꾸며댔다.

    “배, 배고파서요!”

    “뭐라?”

    “네. 배고파서 물고기라도 잡아먹게요.”

    뒷짐 지고 있던 자한은 엉뚱한 그녀의 말이 황당하여 순간 헛기침을 하였다.

    “하면 근처에서 밥이라도 사주랴?”

    빨리 집으로 가고 싶건만, 또 어딜 들렀다 간다고!

    될 수 있으면 빨리, 당장 어떻게 해서든 그와 떨어져야 한다.

    “아뇨! 괜찮아요 저하. 이른 시간이라 국밥집도 재료 손질하느라 밥도 없을걸요.”

    “그래서 정말 네가 물고기를 잡겠다고?”

    저리 물어오니 이젠 어쩔 수 없다.

    정말 물고기를 잡아야지.

    집에 빨리 가고 싶어 말이 헛나왔다고 했다가는 저 성질 더러운 세자가 또 어떤 심술을 부릴지 몰라 두화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 꼭 물고기 잡아서 먹을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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