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16)화 (16/96)
  • 16. 넌 남아야겠다.

    “저하, 저 위 누각에서 상황을 살피시면 될 듯싶습니다.”

    세자의 굳은 표정에, 사림은 괜히 뒤쪽의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다가 세자의 뒤를 따라 자리를 옮기었다.

    누각 위로 올라서자 물안개 낀 강가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사림아, 극락이라 불리는 저 위 하늘이 이러하지 않겠느냐?”

    “아직 소신은 가 보지 않아 모르겠고, 또 너무 일찍 가 보고 싶지도 않사옵니다, 저하.”

    “딱딱한 놈 같으니, 그냥 딱 보고 운치라는 걸 느껴야지. 누가 네놈보고 벌써 죽으라 했더냐?”

    “저란 놈, 이런 거 하루 이틀도 아닌 거 아시면서 오늘따라 더 까칠하십니다, 저하.”

    순간 자한의 살기 어린 눈빛에 사림은 냉큼 고개를 숙였다.

    “되었다. 오늘 유독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구나.”

    그러게 오늘따라 더 화가 많으시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미 세자가 향한 눈길에 답이 있었다.

    ‘저 천것 때문에 역정이 나신 게야.’

    사림은 감히 이 나라 국본을 언짢게 만든 천것을 어찌해야 할까 두화를 응시했고, 또 한 사람! 주변을 태울 것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두화를 노려보는 자한이다. 두화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눈길은 그 이유가 너무도 달랐다.

    한편 서서히 옅어지는 물안개로 주변이 조금씩 보였다. 말없이 천천히 강가를 거닐던 그때 도헌이 두화의 팔을 잡아 세웠다.

    “쉿!”

    그리고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두화도 눈길을 두었다.

    물기슭에 가깝게 선 두 명의 사내가 강 쪽을 바라보는 모양새였고, 강 중앙엔 호화로운 배가 띄워져 있었다.

    점점 옅어지는 물안개에 두화는 배를 집중적으로 쳐다보았다.

    한 사내가 여인의 어깨를 잡아 희롱하려 하자, 여인은 옷고름을 꼭 쥔 채 뒤로 자꾸만 물러서는 모양새였다.

    누가 봐도 여인을 희롱하고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배 위 상황을 보다가 강가에 서 있던 두 사내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배를 보며 저들끼리 희희낙락하는 것이 아닌가.

    ‘저런 때려죽일 놈들!’

    그때였다.

    배 위의 사내가 여인의 저고리를 뜯어버릴 듯 확 찢었다. 찢긴 부위로 새하얀 어깨살이 드러나자 배 위 사내도, 그리고 구경하는 두 사내도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며 웃는 것이 아닌가.

    ‘저 미친 호래자식들!’

    겉껍데기만 귀족이면 뭐하나.

    배운 것 없는 무식한 호색한처럼 행동하는 이들인데!

    두화는 더는 참고 봐주기가 힘들었다.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훌렁 벗고는 속바지 차림으로 냅다 달렸다.

    “이 썩어 문드러질 놈들 같으니라고!”

    일단 강가에 서서 구경하던 두 사내의 얼굴에 제 발 도장을 찐하게 찍어주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혼절하듯 쓰러진 두 사내의 얼굴에 “퉤!” 침을 뱉어 버렸다.

    “자고로 더러운 짓거리 하면 훈육할 때도 똑같이 해줘야 하거든. 누님 침 맞고 제발 정신 차려라, 엉!”

    손을 털고는 이내 물로 뛰어들었다.

    “어, 어!”

    더는 지켜만 볼 수 없었던 도헌이 나서려고 할 때, 두화가 난데없이 치마를 벗어 던지니 아무리 여인 앞에 목석이라 한들 얼굴이 어찌 붉어지지 않으랴.

    ‘허허, 이게 무슨!’

    민망한 상황에 고개를 돌린 사이 이미 두화가 두 사내를 깔끔하게 때려눕히고는 물 만난 강아지처럼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너무도 신속하게 움직여서 말릴 수도 불러 세울 수도 없다.

    뭐에 홀린 듯 두화를 보던 도헌이 그제야 갓과 도포를 벗어 던지고는 강에 뛰어들어 헤엄쳤다.

    그사이 이미 두화는 배 위에 올라섰다.

    배 위에 있던 서도풍은 눈앞에 벌어진 일이 보고도 믿기지 않아 넋 놓고 보다가, 기어이 두화가 배 위로 올라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웬 미친년이더냐? 훤한 이 아침에 홀랑 벗고는… 그리고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어디 감히 귀족에게 손을 대!”

    두화가 버럭 하는 서도풍에게 손짓하며 잠시 기다리라 하자, 서도풍은 이마저도 기가 막혀 헛웃음을 토해냈다.

    “후우, 아침도 못 먹고 움직였더니 힘이 달리네.”

    “…!”

    구부렸던 허리를 곧게 편 두화가 젖은 머리의 물기를 꼭 짜내고, 팔이며 속바지며 무겁게 먹은 물기를 꼭 짰다. 그리고 몸을 콩콩 제자리를 뛰더니 그제야 바로 서서, 서도풍을 봐주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 배에서 내리거라. 그럼 나도 널 더는 추궁하지 않겠다.”

    이내 두화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하아, 나! 감 씨 발라먹는 소리 하고 있네. 아침 댓바람부터 미풍양속이나 해치는 풍속범이 누가 누구한테 추궁? 이봐, 너야말로 미친놈 아니야?”

    “뭐라? 풍속범! 미친놈? 네 이년, 이 미친 것이 어디 와서 헛소리를!”

    가뜩이나 세자에게 천것이라 들어서 이미 마음의 상처를 아주 조금 받았지만, 뭣 같지도 않은 놈에게 이년이고 미친년이고 욕을 듣자니 이젠 눈에 뵈는 것이 없다.

    “미친 것? 그래, 어디 오늘 미친 것한테 물려 봐 한번!”

    두화는 그대로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머리로 놈의 턱을 받아 올리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너 같은 놈의 문제는 얼굴도 뭣도 아니야. 이게 문제지, 이게!”

    -퍽!!!

    이내 서도풍의 중심부를 냅다 걷어 차올렸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비명도 못 지르고, 중심부를 아주 꼭 잡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서도풍의 얼굴에 핏대가 서 새빨갛다 못해 터지려고 한다.

    손을 턴 두화가 배 귀퉁이에서 덜덜 떨고 있는 여인에게 향했다.

    “괜찮아요?”

    “…네.”

    여인의 찢긴 어깨가 눈에 들어오자 두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변변찮아도 귀족이니 지금 얼마나 수치스럽고 살고 싶지 않을까. 두화는 망설임 없이 제 저고리를 벗어 여인에게 걸쳐 주었다. 어깨를 드러낸 두화를 보고 놀란 여인이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하지만 두화는 억지로 여인에게 저고리를 입혔다.

    “전 이런 거 아무렇지 않고 괜찮아요. 하지만 아씨는 다르지 않습니까?”

    “…고맙소.”

    “어쩌자고 저런 작자와 엮였어요?”

    “그게….”

    망설이는 여인의 어깨를 조심스레 토닥여주었다.

    여인은 이내 눈물을 흘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날 이곳에 나오지 않으면 과거를 코앞에 둔 오라버니의 앞길은 영원히 막힐 거라고….”

    “해서 저 작자의 겁박에 나온 거예요? 아씨 생각은 안 해요? 이곳에 오면 무슨 짓을 당할지 정녕 몰라 나온 거예요?”

    화가 난 두화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면 내가 어찌합니까? 이미 가문은 기울어졌고, 병든 아비와 또 모든 식솔이 하나뿐인 오라버니만 바라보고 있는 지금, 오라버니의 출셋길이 나로 인해 막히게 된다면 우리 집은 죽습니다. 해서 나도 각오하고 나온 것인데… 한데 각오하였어도 막상… 흐흡.”

    각오하였다고 했다.

    하나, 처음 겪는 두려움에 여인은 그토록 집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자 각오했던 마음은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는 못했다. 두려워서 살고자 했고, 도망치려 할수록 그 두려움은 서도풍에 의해 더욱 커져만 갔다.

    두화는 여인을 살포시 안아 불안했을 그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때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도헌이 다가왔다. 새하얀 살결이 아까보다도 더 드러난 두화의 민망한 상황에 도헌은 질끈 눈을 감고 소리쳤다.

    “여인이 되어 어찌 그리도 경망스럽게!”

    그의 말에 두화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며 당당히 소리쳤다.

    “경망스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뭐라?”

    “제가 경망스러워도 이 여인을 몹쓸 상황에서 구했으면 그게 더 중요한 거잖아요?”

    “…!”

    인정하긴 싫지만, 그녀의 말이 맞는다. 그녀가 제때 움직였기에 저 여인이 무사할 수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뜬 도헌이 두화를 바라봤다.

    “…!”

    눈을 흘기며 도헌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두화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안고 있던 여인을 옆으로 밀고, 다급하게 그까지 밀치는 것이 아닌가!

    “두화야!”

    바로 뒤편에서 분을 이기지 못한 서도풍이 작은 단도를 휘둘렀다.

    두화가 밀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도헌은 목에 큰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도헌은 서도풍이 휘두르는 단도를 피해 요리조리 피하는 두화를 향해 이내 몸을 날렸다. 그녀를 안아 빙그르르 돌고는 바로 서도풍의 가슴팍을 발로 차 버렸다. 배 난간에 있던 서도풍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괜찮으냐?”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한 도헌이 두화의 어깨를 잡고 요리조리 살피었다. 손가락 안쪽에 생긴 상처 때문에 피가 새어 나왔다.

    “이런!”

    “이런 작은 상처쯤은… 괜찮….”

    곧바로 자신의 저고리 고름을 뜯어, 단도에 벤 손을 감아 주는 그의 행동에 두화는 꼼짝할 수 없었다. 밀어낼 수 있는데도 정성스럽게 제 상처를 감아 주니,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다.

    ‘내게 왜 이래요? 그저 이용하려고 데려온 거면서….’

    “풍시전을 나가는 대로 의원에게 보이자.”

    그의 관심이 부담스럽다.

    애초 저를 이용하려고 겁박까지 하며 데려왔으면서, 왜 자꾸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두화는 저도 모르게 차갑게 말을 쏘아댔다.

    “괜찮아요, 이깟 거. 이정도 작은 상처는 금방 나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알았다.”

    젖은 제 상의를 벗어 두화의 어깨에 걸쳐 주며 고개를 돌렸다.

    “이건 걸치고 가거라. 그리고 다음부터는 남을 돕기 전에 자신부터 살피거라.”

    “아니요, 전 됐어요. 장군께서도 젖어 춥잖아요? 어찌 천한 것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셔요?”

    “이래 봬도 전쟁터에서 다져진 몸이다. 네 말대로 호의니 그냥 받아들이거라.”

    몸을 돌린 도헌이 나지막하게 한마디 더 하였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넌 여인이다. 몸을 함부로 하지 말거라.”

    난리 통에도 배는 천천히 뭍으로 움직였다. 두화는 놀란 여인을 살피면서도 뱃머리에 서 있는 그를 힐끔거렸다.

    ‘천것을 데려다가 이용하면서 왜 이리 자상한 거야?’

    ‘차라리 신경 써주지나 말지. 그래야 날 이용만 했다고 욕할 명분이라도 있지.’

    괜히 복잡해지는 마음에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잠시 후 강가에 멈춘 배에서 도헌의 손을 잡고 내리는 두화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자한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진즉 도망가려고 한 두 사내는 사림이 제압하여, 서도풍과 함께 근처에 있던 병사에 넘겼다.

    “거슬려.”

    작게 중얼대던 자한의 시선은, 속바지에 사내의 저고리를 걸친 두화의 민망한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세자가 있음에 도헌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 앞에 서서 예를 갖추었다.

    “저하.”

    “…고생하였군, 백 장군.”

    “아니옵니다. 두화가 다 한 것이옵니다.”

    도헌은 잠시 뒤를 돌아 겁탈당할 뻔한 여인을 부축하여 다가오는 두화를 바라봤다. 그녀를 바라보는 도헌의 모습에 자한은 싸늘하게 답하였다.

    “하긴, 내 보기에도 날아다니며 힘쓰는 것이 자네가 아니라 저 천것이더군.”

    가시가 담긴 듯 차가운 세자의 말에 도헌은 당황하였지만, 맞는 말인지라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여인을 부축한 두화가 가까이 다가와 바닥에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 곁에 있던 여인은 아직도 몸을 떨며 불안해했다.

    가만히 두화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자한의 미간이 꿈틀댔다.

    오늘 마주했던 모든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닥에 엎드려 있는 지금이 가장 기분이 언짢다. 천것이니 으레 제 앞에 엎드려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무에 이리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미련하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죄 젖어서는….’

    “백 장군은 저 여인을 데려다주게.”

    “예.”

    도헌이 고개를 들자 두화 역시 여인을 부축해 그의 뒤를 따르려 했다.

    “넌 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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