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15)화 (15/96)
  • 15. 천것 때문에!

    도헌이 뒤따르는 두화를 의식하여 속도를 조금 줄이자, 벌어졌던 거리가 어느새 가까워졌다.

    “흠흠, 네 이름은 무엇이냐?”

    앞만 보고 걷던 두화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두화, 두화예요.”

    “두화?”

    “예. 제가 태어났을 무렵 근처에 찔레꽃과 불두화꽃이 만발했대요. 원래 천것들의 이름이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제 아비도 그저 주변에 핀 꽃이 예뻐서, 개똥이 말숙이보다는 꽃 이름을 선물로 주셨나 봐요. 솔직히 개똥이보다는 두화가 훨씬 예쁘잖아요?”

    “두화라… 두화.”

    그의 등만 보고 걷는 두화는 알 리 없겠지만, 두화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도헌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장군님, 한데 이 이른 시각부터 풍시전은 왜 가시는데요?”

    “말이 많구나.”

    나지막이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두화는 입을 꼭 다물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른 시각이라 풍시전 앞을 지키는 관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여 그 앞을 지키던 병사에게 패를 보여주고 들어갔다.

    두화의 다리가 아플 때쯤 그가 멈추었다.

    두화는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빼, 뒷짐 지고 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저, 장군님.”

    “왜?”

    “여긴 강가잖아요?”

    “그래, 강이지.”

    “…?”

    잠시 뒤 나루에 배가 닿고 뱃사공이 오자, 도헌이 배 위로 올라섰다. 뒤돌아 두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타거라.”

    “예?”

    “앞으로는 두 번 묻지 말아라. 어서 잡으래도.”

    영문을 모르겠다.

    그것도 귀족 나리들만 즐기는 호화로운 배에 이른 아침부터 천한 저를 왜 데리고 온 것인지 말이다.

    두화는 도헌이 내민 커다란 손을 잡았다.

    검을 잡고 전쟁터를 누벼서 그런지 커다란 손바닥에 굳은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숨에 끌려 올라가자 균형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그때 도헌이 팔을 훅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놀란 두화가 그의 가슴을 밀어내고 바로 섰다.

    다행히 이른 아침이라 강가에 핀 물안개 때문에, 뱃머리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물기슭을 벗어나,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배에 두 사람은 말없이 서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물안개가 뺨에 닿자, 시원한 촉촉함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뱉었다.

    그 모습에 도헌은 그녀가 신경 쓰였다.

    “추운 게냐?”

    “아니요. 혹 이른 아침 강 냄새를 맡아본 적 있으셔요?”

    “전쟁터에서 몇 번 있었다. 시체 때문에 피비린내가 진동해 가까이 가기 싫었던 기억이 있어서 강엔 되도록 나가지 않는다.”

    ‘그러신 분이 오늘은 왜 이 천한 것까지 대동하시고 강에 나오신 겁니까?’

    할 말은 많지만, 꾹 삼키고 상쾌한 기분을 좀 더 느꼈다.

    “아… 그러셨구나. 그럼 오늘 제대로 강 냄새를 맡아보셔요. 특히 이렇게 물안개 피어오른 날의 물 냄새는 평소 물비린내와는 다르게 폐부까지 시원함을 안겨주거든요. 숨을 이렇게 습하고 들이마시고, 후하고 내 쉬면, 답답했던 속이 뻥 뚫어지는 기분이에요.”

    배시시 웃으며 들숨, 날숨을 내뱉는 그녀 머리 위가 물안개 때문인지 이슬비를 맞은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도헌은 경계심 가득했던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뭔가를 가리키다가 또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출렁이는 물을 보고 재잘거리는 것이 기분 좋았다.

    제 발길이 아침부터 왜 그녀에게 향하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저 그녀가 정말 여인인지 확인한 다음 이곳에 와 벌어질 사건을 막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애써 다른 이유를 만들려고 해도 생각이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른 시각이라 다른 배가 없어서 고요하여,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보냈다.

    도헌은 중간중간 뱃사공에게 주변에 다른 배가 운항하는지 물었다. 물살을 느끼던 뱃사공은 아직까진 따로 배가 운항하는 것 같진 않다고 했다. 이대로 끝난다면 사건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잠시 뒤 배가 뭍에 닿자 도헌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슬비를 맞아 추웠을 텐데… 먼저 찻집에 가 몸을 좀 녹여줘야겠지. 음, 그 사람 다음엔 밥이라도 먹여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어차피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남는 시간이다.

    ‘그래, 안개가 가시면 날씨가 좋을 테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우니까… 그래서 밥이나 먹는 거지,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야.’

    도헌은 애써 제 생각을 만들며 도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단번에 잡은 그녀다.

    뭐랄까, 그녀가 제 손을 스스럼없이 잡으니 또 가슴이 간질간질해진다.

    배에서 내린 두화를 내려다본 도헌이 품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 머리를 조심스레 눌러 주었다.

    “엇!”

    “가만히 있어봐라. 머리가 젖으면 감모에 걸리기 쉽다.”

    조심스레 물기를 닦는 손길에 두화는 괜히 불편해진다. 저보다 키가 큰 그의 앞에 서 있던 터라,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괜찮은데….”

    “괜찮긴, 얌전히 서 있으래도.”

    도헌이 다시 손수건으로 그녀의 머리를 닦으려던 그때 저벅저벅, 물기슭을 따라 자갈과 모래를 짓누르며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가 돌아간다.

    이내 도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깐 강에만 퍼져 있던 물안개가 지금은 강 둘레까지 자욱하게 퍼져 있어, 지척에 뭐가 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성난 발소리가 좋은 뜻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란 것만큼은,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한 제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설마, 그놈인가!

    돌연 날이 선 눈빛이 예리하게 정면을 노려봤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왜 그러세요?”

    “누군가 오는구나.”

    어느 한가한 귀족이 이른 시간에 또 오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부터 뱃놀이하는 귀족 나리가 장군님 말고도 또 계시는가 보네요.”

    ‘팔자 좋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들이 못마땅함을 은연중 겉으로 드러내는 두화다.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이 터, 눈뜨기 시작하면 하루 먹고 살려고 두 다리와 두 팔을 바지런히 놀려야만 한다.

    시간이 부족하면 부족할 정도로 일을 해도 받는 품삯은 그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기에, 식구가 많을수록 퍽퍽하기만 한 삶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데 부모 잘 만나서, 신분이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들은 세상을 너무도 편하게 살아간다.

    ‘팔자 한번 좋아, 세상 참 편하게 사네.’

    다시 한번 두화는 부친과 삼촌들과 함께하는 밤의 일을 더욱 열심히 해서, 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굶주리는 백성들의 손에 안겨주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내 것이 감히 내 허락 없이 돌아다니니, 이를 어찌 벌해야겠느냐, 사림아?”

    자욱하게 깔린 안개처럼 내리깔린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들려온다. 이내 안개 속에서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낸 이는 세자였다.

    예리하게 앞을 주시하던 도헌도,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두화도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려 세자에게 예를 갖추었다.

    “저하, 이른 아침부터 예까진 어인 발걸음이시옵니까?”

    도헌의 물음에도 싸늘하게 식은 자한의 시선은 엎드려 있는 두화의 작은 머리 위로 향했다.

    ‘감히 내가 사준 의복을 입고, 딴 사내와 그것도 이른 아침부터 뱃놀이했단 말이지?’

    기름진 음식은커녕 아무것도 먹지 않았건만 괜히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는 자네는 이른 아침부터 천것과 무엇을 하는 건가?”

    천것이라는 말에 엎드려 있던 두화는 이상하게도 심장이 뭔가에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제 신분이 천하디천한 거지니까, 당연히 천것이라 불리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슴이 불타는 것처럼 아프다.

    그것을 참느라 포개어진 두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조사차 나온 것입니다.”

    당황하지 않고 답하는 도헌의 낯빛은 평소 듣던 대로 딱딱한 표정 그대로였다.

    “조사차 나왔다?”

    “예.”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도헌에게 시선을 돌린 자한의 입에서 피식 웃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사차 나온 자가 곁에 여인을 두고 뱃놀이를 한다? 백 장군은 이 나라 국본인 내가 우스운 모양이군?”

    “어이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전날 예조 정랑의 자제인 서도풍이 이곳에서 뱃놀이하며 오늘 여인을 겁탈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뭐라?”

    자한은 사림을 돌아봤다.

    사림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소곤거렸다.

    “백 장군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겁니다.”

    “넌 어찌 알고?”

    “그것이 제 친우 중 하나가 서도풍과 친밀하게 지내는 녀석이 있는데, 서도풍이 전날 자랑하듯 떠벌리더랍니다.”

    “뭐라?”

    세자의 일그러진 표정만 봐도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지 사림은 알 수 있다.

    “자신에게 홀랑 넘어온 규수가 하나 있는데, 비록 그 집안이 내세울 것 없는 가문이긴 하나, 귀족이고 또 그 규수의 외모가 꽤 아리땁다고 하옵니다. 해서, 서도풍이 그 여인을 오늘 이곳에서 겁탈하려고 이른 시각에 아무도 접근 못 하게 할 것이라고 떠벌렸다고 합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사내인 제가 봐도 여인을 어찌하려고 아침부터 부른 것일 텐데, 설마 여인이 나갈까 싶어 말씀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아, 정말 그렇다고 그런 짓을 벌이겠느냐? 허풍으로 떠든 것은 아니고?”

    사림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답하였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화월국엔 호색한이며 색마인 놈이 둘 있는데, 자신의 신분을 권력으로 삼아 뭇 여인들을 농락하고 겁탈하니,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색귀라 부릅니다. 한 놈은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있어 그 정체를 아무도 모르고, 아무튼 그 정도로 여색을 탐하는 놈이 바로 서도풍이옵니다.”

    “분명 당한 쪽에서 발고라도 하였을 터인데, 관아에서는 어찌 그런 놈을 여태 가만두었단 말이냐?”

    “이미 일이 벌어져도 제 아비를 믿고 그 뒤에 숨어버리면 그만이죠. 아비의 권력으로 당한 여인들의 집안은 모두 이름 없는 가문이다 보니, 몇 푼 쥐여주거나 집안의 약점을 잡아 겁박하면 당한 쪽은 당하고도 더는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놈의 체면과 돈 때문에….”

    조금 전보다도 더 차갑게 변한 자한의 두 눈이 아직 엎드려 있는 도헌에게 향했다.

    “그럼 지금 자네는 그놈을 잡으려고 왔다는 것인가?”

    “예. 홀로 왔다면 어디서라도 보고 이상함을 감지했을 것이옵니다. 며칠 전부터 소신이 이곳을 계속 드나들었으니까요.”

    “음.”

    “하오나 소신이 일행과 함께 이곳에서 뱃놀이하는 모습을 보이면 경계심을 풀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오늘은 물안개까지 피어 주변을 자세히 봐야만 사물이 보이니, 놈을 잡기에 좋은 기회라 여겼습니다.”

    도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저 저 아이가 필요해서 동행한 것뿐이다.

    ‘한데 기생도 있고, 돈만 쥐여주면 이런 일을 할 자는 널리고 널렸을 터인데, 왜 하필 옆의 그 녀석과 동행했느냐?’

    못마땅함에 자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편 두화 역시 도헌의 말에 뭔지 모를 씁쓸함이 목구멍으로 삼켜졌다.

    무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가 제게 보여준 배려와 웃음에 그래도 다른 귀족들과는 뭔가가 다른 자인가 생각도 했다.

    ‘바보처럼… 천것인 주제에 난 뭘 기대한 거니? 일 때문에 날 데리고 온 거라잖아, 이 바보야!’

    일어나라는 세자의 말에 도헌은 일어나며 두화를 슬쩍 바라보았다. 채 떨어지지 않은 모래가 그녀의 작은 손에 박힌 듯 묻어 있다.

    좀 전보다는 목소리가 조금은 유해진 세자가 몸을 돌리며 명했다.

    “근처에 나 또한 이곳을 주시하고 있겠다. 하니, 자네는 천것과 함께 오늘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을 잡아야 한다, 알겠느냐?”

    “예, 저하.”

    세자가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도헌은 냉큼 두화의 손을 잡았다.

    “…!”

    놀란 두화가 빼내려고 하지만, 이미 커다란 손에 잡힌 손을 빼낼 수 없었다.

    “두화라는 이름만큼 네 손도 좀 신경을 쓰거라.”

    털어내는 손길에 두화는 얼굴을 붉혔다.

    그때였다.

    앞서 몇 발자국 걸어가던 자한의 귀에 두화의 이름이 들렸다.

    의도하지 않아도 제 발은 이미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저 아이 이름이… 두화라고?’

    저도 모르는 녀석의 이름을 백 장군이 불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제 마음은 강에서 뭍으로 몰아치는 물안개보다도 더 차갑게 내리깔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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