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생각하는 것도 똑같네, 똑같아.
은밀하게 궁을 벗어난 자한은 그제야 막힌 숨이 터지는 것 같다.
부왕조차 직접적으로 절 압박하진 않는다. 한데도 궁 안에 있으면 저를 옭아매려는 시선 때문에 숨이 막힌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아침 일찍 대비전에 문안을 갔을 때도 오늘 세자빈의 탄일 연회에 꼭 참석하라는 말과 이어지는 합방과 후손 이야기에, 당장이라도 세자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훌훌 날아 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벌써 몇 번의 미행에도 대전에서 부름이 없는 것에 내심 조금은 불안하지만, 오늘만큼은 궁을 벗어나는 것이 제가 살길이다.
***
기지개를 늘어지게 한 두화는 이제 제법 이곳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내는 꼬마를 보며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한돌아, 세수하고 누나한테 와.”
어른들 틈에서 뭔가를 만들며 웃고 있던 아이가 두화를 보고 크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마음 한편이 짠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모친과 동생이 죽은 것을 모르는 아이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매일같이 저리 나뭇조각에 새긴다. 손가락을 다쳐도 그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이곳에 온 다음 날부터 매일 저리 매달린다. 그런 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워서 전날 얻어온 엿 몇 가닥을 주려는 참이다.
두화가 움막에 들어서려던 그때 매일 아침 보는 주변 풍경에서 낯선 것에 시선이 절로 향했다.
움막으로 내려오는 언덕길 옆 나무 아래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사내, 훤칠한 키에 멀리서 봐도 귀티 나 보이는 의복을 입은 사내, 뭐 가까이 가보지 않아도 누군지 딱 짐작이 되었다.
‘어휴, 아주 그냥 매일 오십니다, 저하.’
툴툴대면서도 제 발은 어느새 언덕길로 향하고 있다.
올라가는 동안에도 이럴 거면 차라리 부친과의 약조를 깨고서라도 저잣거리에서 몇 탕 뛰어서 그 돈을 갚아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언덕을 올라 고개를 들던 두화는 올라오며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 무색해질 만큼 당황스러웠다.
“…장군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천것이 물으면 대답도 하기 싫은 건가?
대답은 안 하고 사람을 왜 기분 나쁘게 훑어보는 거지?
무섭게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두화는 한발 뒤로 물러나며 재차 물었다.
“누구 찾는 사람 있으세요? 불러드려요?”
“…정말 볼 때마다 새롭군.”
그런데 왜 말을 하면서 미간을 찌푸리는 건데?
마치 먹을 거 앞에 두고, 상해 먹지 못하는 음식을 앞에 둔 사람처럼 말이야!
“예?”
“며칠 전 내가 보았던 여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구나.”
누군 뭐 매일 곱게 입고 규수처럼 편하게 살고 싶지 않나?
‘뭐래, 이 양반이.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서는 왜 사람 속을 긁어대는 거야?’
괜히 낡고 낡은 제 옷을 툭툭 털어냈다.
두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누굴 찾는지 모르겠지만, 찾는 여인은 여기 없는 것 같네요. 그럼.”
꾸뻑 고개를 숙이고 내려가려는데, 묵직한 그 한마디에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하의 돈주머니라도 털었더냐?”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저하 본인도 뭐라 하지 않고 용서에 가까운 관대함을 내려주셨다. 한데 당신이 뭐라고 겁박하는 말투로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장군님, 제게 그리 물어보는 연유가 무엇인지 감히 이 천것이 여쭤도 되겠습니까?”
톡 쏘는 두화의 말에 그제야 도헌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그가 왜 즐거워하는지 모르기에 확실히 기분이 나쁘다.
“난 나라의 녹을 먹는 자다. 그리고 충신이지.”
“네, 네. 충신이시죠. 화월국을 지켜주시는 장군님이시니까요. 그래서 저도 존경하는걸요.”
비아냥대는 두화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도헌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반응에 언짢기보다는 즐겁다.
“충신은 자고로 전하 앞에서 거짓을 고하지 못한다.”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두화는 조금 전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오늘 입궐하여 시전과 도성의 안전을 위해 병사를 내어 달라 주청할 참이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제게 왜 하는 걸까?
“…지금 화월국은 완전 태평성대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찌푸려지는 미간이 작게 씰룩대며 궁금해 죽겠다는 듯 움직이는 눈동자까지, 인제 보니 천생 여인이다.
이런 여인을 왜 사내라 여겼을까?
단지 천것이라서?
한데 어째서 왜 자꾸 제 눈에 띄는 거지?
타인에겐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던 저인데, 왜?
“감히 저하의 주머니를 털 정도로 손버릇이 좋지 못한 극악무도한 자들이 화월국 저잣거리에 판을 치니, 충신으로서 어찌 이를 가만두고 볼 수 있겠느냐? 아니 그러하냐?”
“…하아!”
말문이 막힌다.
주머니 한번 털었다고 극악무도한 자로 찍혀 버렸다.
‘정말 이러다가 처형까지 당하는 거 아닌지 몰라.’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어리벙벙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참 뾰족한 성격이시네. 별것 아닌 일로도 충신 어쩌고저쩌고 남발하면서, 기어이 천한 것의 목숨줄을 잡아 쥐려고 하니 원.’
“왜 말이 없느냐?”
“그러게요. 제가 지금 대꾸할 말을 잃어서요.”
“그래. 너도 그렇겠지. 별것 아닌 일일 수 있으나,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 감히 이 나라 세자의 몸에 손을 댔다는 것만으로도 능지처참을 당할 일로 바뀔 것이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놀면 재미있나, 어쩜 이리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하는 거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니 두통이 몰려와 머리가 지끈거린다.
간밤 꿈도 꾸지 않고 아주 푹 잘 잤고, 불과 1각(15분) 전만 하더라도 기분 좋은 아침을 맞았다. 한데 지금은 제 인생에 먹구름이 아주 제대로 끼어버렸다.
뭐가 원인일까 생각하던 두화는 고개를 내려 그의 주머니를 털었던 제 손을 노려봤다.
‘결국 이 손모가지가 원흉이지. 아휴, 그래도 살고 봐야지.’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할까요?”
“음. 일단 내가 관청에 고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니….”
“그리해주시면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며 살게요, 장군님!”
분명 조금 전까지도 시무룩하던 얼굴이 금세 환해져 목소리까지 덩달아 커진다.
“하나,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
‘아니, 이건 또 무슨!’
“그렇지 않으냐? 내 눈이 널 보았는데, 이는 죄인을 은닉시킨 것과 매한가지지. 어찌 그리 큰일을 맨입으로 꾹 다물라 하느냐? 자칫 내 입이 죄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느냐?”
그의 입이 씰룩인다.
필경 웃음이 터지기 직전의 입 모양새다.
지금 그는 이 상황을 아주 즐겁게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화가 나지만 칼자루는 제가 아닌 그가 잡고 있으니 어찌하랴!
“돈이든 뭐든 전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일전에도 보셨잖아요. 전 수중에 돈이 생기면 어려운 이들을 도와요. 하니, 소인이 나리께 충족할 만한 그 무엇도 해드릴 수가 없….”
“안다.”
“그러니까요…. 예?”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내가 찾을 때 말벗이나 해주고 심부름이나 해 달라는 것이다.”
“…!”
지금 이 상황과 말….
낯설지 않아, 음.
꼭 어디선가 겪었던….
‘어쩜 귀족 나리들께서는 생각하는 것도 참 똑같네! 똑같아. 저하도 그때 이리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말이지.’
“해서 오늘 풍시전에 갈 참이다. 따라라.”
얼씨구, 풍시전에 가는 것도 똑같고!
한데 설마 지금 가자고?
두화가 움직이지 않고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도헌이 피식 웃으며 고갯짓을 했다.
“얼른 준비하고 따르라니까.”
“뭘 준비해야 하는데요? 이대로 가면 그만이지.”
“며칠 전 보았던 그 모습을 하고 따르거라.”
“…저, 장군님. 소인은!”
“그리고 그 말투! 듣기 거북하다. 이제부터 내 앞에서는 여인답게 말하거라.”
이제는 제 말투까지 걸고넘어진다.
환장하시겠다.
‘이걸 그냥 확 아버지한테 말해.’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를 떼어내기 전에, 제가 먼저 부친에게 엄청난 꾸중을 들을 것이다. 어쩌자고 귀족과 얽혔냐고 말이다.
‘아, 정말 가기 싫어 미치겠네.’
누가 말려줬으면….
차라리 빚이라도 있는 세자한테 휘둘리는 편이 더 낫겠다 싶다. 괜히 한번 그를 홱 노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움막으로 사라진 두화를 보며 도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참 어이가 없고, 우습다. 더욱이 세자를 핑계로 겁박까지 했다. 천한 신분의 그녀에게 뭘 원하기에 생전 하지도 않는 짓을 이리하는지 솔직히 자신도 모르겠다.
전쟁터를 누비다 돌아오면 그저 가택에서 차를 마시며, 그동안 몸에 밴 혈향을 없애기 위해 뒤꼍 대나무 숲에서 수련하고 절에 가는 것이 다다.
오늘 풍시전엔 사건을 미리 막고자 가려고 했던 건 사실이지만, 왜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했는지는 아니, 어째서 이곳에 먼저 왔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사박사박 모래를 밟는 듯 작은 소리와 함께 풀을 스치는 치맛단 쓸리는 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온다.
도헌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
며칠 전 보았던 고운 여인이 제 앞에 있다. 강에 반사된 눈부신 아침 햇살이 그녀의 뒤에서 후광처럼 반짝였다.
오로지 싸워 이기는 것밖엔 모르던 도헌은 이제야 평범한 햇살도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뭔가가 제 심장을 간질거린다.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 아마도 지금 불어오는 이 바람이 도포 속으로 스며든 모양이지. 흠.’
순간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가자.”
***
한편 궁을 나온 자한의 발걸음은 어느새 강가 언덕에 멈춰 섰다.
아래엔 옹기종기 모여 허름하다 못해 쓰러질 것 같은 움막과 모래사장엔 궁에선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생기가 느껴졌다. 뭐 하나 제대로 갖춘 것도 없는 천것들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로를 향해 웃고 즐거워한다. 그 생기 넘치는 웃음소리가 예까지 들려온다.
벌써 1각(약 15분) 이나 아래를 살펴봐도 꼬맹이,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아흐, 깜짝이야!”
“뭘 그리 놀라십니까? 제가 자객이라도 됩니까?”
“자객보다 사림, 네가 더 무섭다, 난.”
“왜요?”
“아직도 네 속을 모르니까.”
기다리는 천것을 볼 수 없으니 제게 짜증을 내시는 거겠지. 사림은 중얼대며 언덕 아래로 향했다.
“거길 네가 왜 가?”
“지금 그 천것이 궁금하여 기다리고 있던 것 아니십니까?”
“…흐음. 그건 뭐.”
“제가 알아 오겠습니다.”
“난 시킨 적 없다. 네 발로 자처해서 내려가는 것이야.”
“예, 예.”
쏜살같이 내려간 사림은 모래사장에 보이는 이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듯싶더니, 이내 언덕 위로 올라왔다.
“뭐 그리 빨리 와? 꼬맹이는?”
사림 뒤로 고개를 빼 그녀를 찾지만 아무도 없다.
“그게….”
“뭔데?”
“반 시진 전쯤 곱게 차려입고 누군가를 따라갔답니다.”
사림의 말에 자한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곱게 차려입어?’
“뭐라? 누굴 따라가?”
윗전의 심기를 금세 읽은 사림은 냉큼 그를 가로질러 어딘가로 향했다.
사림을 기다리며 자한은 화가 났다. 무엇 때문에, 이리도 화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내가 발걸음 하였는데, 어딜 간 것이냐?’
차 한잔 마실 시각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사림이 길을 안내했다.
무겁게 내려지는 발에 흙먼지가 뿌옇게 뒤편으로 흩날리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