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13)화 (13/96)
  • 13. 역시 거리를 둬야 해.

    환복하는 것을 돕던 맹지는 오늘도 식은땀을 흘린다.

    세자께서 분명 아침에 기침하셨을 때만 하더라도 찬 바람 쌩쌩 불었는데, 지금은 지그시 감은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뭔 일이 있는 것이야. 하니 이리 자꾸 웃으시는 게지. 조심해야겠다. 괜히 된서리 맞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해.’

    그렇다고 세자한테 단 한 번이라도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은 없다. 그야말로 얼음귀라는 무성한 소문만 듣다가 이곳에 와, 첫날 세자의 얼음장 같은 그 얼굴에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격이니까.

    “저하, 혹 시장하시면 야참이라도 올리라 할까요?”

    “야참은 되었고, 심신이 편안해지는 차 한잔 부탁하마.”

    “예.”

    보료 위에 앉은 자한이 서안 위 서신에 적힌, 보낸 이의 이름을 본 순간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잠시 뒤 찻상을 가지고 맹지가 들어왔다.

    “이 서신, 언제 온 것이냐?”

    “아, 그것이 신시(15~17시)에 조 궁인이 가지고 왔습니다.”

    “세자빈에게 무슨 일이 있더냐?”

    “그것은 모르옵고, 저하께서 꼭 읽어 주십사 조 궁인이 간곡하게 부탁했사옵니다.”

    자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맹지는 차를 우려 찻잔에 따르고는 나갔다.

    자한은 서신을 뜯어 읽었다.

    -저하, 사흘 뒤 제 탄일이옵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사옵니다. 그날 몇몇 귀족들의 여식과 웃전을 모시고 조촐하게 다과를 나눈 뒤, 각궁을 하기로 하였사옵니다. 부디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주시어 다과에 참석해 주시면, 소첩의 면이 조금이나마 설 것 같사옵니다.

    “해마다 이리 서신을 보내는 것을 보아하니, 그 끈질긴 것이 좌의정 못지않구려, 빈궁. 하나, 여인들만 모인 곳에서 내 무엇을 할까? 모두 그대와 좌의정의 사람들 틈에서 내가 과연 낄 자리가 있을까?”

    서신을 구기며 자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참석해도 안 해도 그들에게 흠은 똑같이 잡힌다. 참석한다면 빈궁의 외척이나 장인의 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낸다 말들이 많아지고, 그것은 더 부풀려져 좌의정이 이끄는 세력에 힘을 실어준다는 엉뚱한 소문이 나돌 것이다.

    궁은 없는 말도 금세 사실인 것처럼 만드는 신기한 곳이니까.

    차라리 부왕께 떳떳하고 모두의 의심을 미리 쳐 낼 수 있게 참석하지 않는 편이 좋다. 하여 몇 년 전부터 이리 부탁해 온 것을 차갑게 외면해 버렸다.

    “맹지야.”

    “예. 저하.”

    들어온 맹지가 고개를 수그리고 다음 명을 기다렸다.

    “늘 그랬듯 한 권 꺼내어 천에 잘 싸 보내거라.”

    “저하, 이번에 대비마마께서도 참석하신다고 하시옵니다. 잠깐이라도 다녀가심이….”

    “내,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 셈이냐?”

    “아니옵니다. 명하신 대로 보내겠나이다.”

    산수가 아름답게 새겨진 오색빛깔 영롱한 자개장 앞에 선 맹지가 그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한눈에 봐도 몇십 권은 되어 보이는 똑같은 서책이 빼곡하게 쌓여 있다.

    맨 위의 것을 꺼내고 문을 닫았다. 그렇다고 자개장 안에 보관된 것이 꽤 귀중한 서책이냐, 그것도 아니다.

    세자가 손에서 놓지 않는 “중용”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지혜로운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은 서책이다.

    그런데 왜 하필 세자빈의 탄일마다 화려한 비단이나 장신구 혹은 꽃이 아닌 서책을 보내는지 맹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냉랭하게 대할 거면 아예 선물도 보내지 말지, 서책만은 꼭 보낸다. 제가 모시는 상전이지만 그 속을 도통 모르겠다.

    ***

    “이번엔 저하께서 오실 겁니다. 하니,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복을 입으셔요, 마노라.”

    “초아야, 정말 저하께서 이번엔 오실까?”

    늘 그랬다.

    한 번쯤은 저를 보러 오겠지 하는 기대감은, 초대한 이들이 민망해질 정도로 탄일 잔치의 끝나가는 시각까지도 지아비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무너지곤 했다.

    초라해진 제 모습에 민망함은 잠시요, 기다리던 기대감은 허망함으로 늘 눈물로 끝이 났다.

    이런 제 마음을 알아준 이는 이 궁 안에 대비마마밖에 없다. 저를 따로 불러 넌지시 탄일 탄일에 대비마마께서 직접 행차해 주신다고, 세자궁에 말을 넣으라 하셨다.

    자신도 알고 있다. 지아비가 그런다고 올 사람이 아니란 걸. 한데도 대비마마라는 패를 이용해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본다.

    그때 밖에서 세자궁의 궁녀 맹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아가 한껏 들떠 신이나 촐랑댔다.

    “그거 보십시오, 마노라. 미리 선물이라도 보내시나 봅니다.”

    선물이라는 말에 련하의 미간이 꿈틀댔다. 자연스럽게 방 한쪽 구석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가 해마다 보낸 선물이 저리 쌓여, 늘 제 가슴을 보이지 않는 바늘이 콕콕 찌른다.

    초아가 들떠 신나게 밖으로 나갔다. 밖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좀 시끄러운 듯싶더니 잠시 후 눈물을 보이며 초아가 보자기를 들고 들어왔다. 보자기만 봐도 련하는 그것이 무언지 단박에 알아봤다.

    늘 같은 보자기에 똑같은 서책이 싸여 왔었으니까.

    “…세자 저하께서 마노라께 어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어떻게 매년 이러신단 말입니까?”

    서럽게 우는 초아를 보니 정작 세자빈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올해도 기대감은 어김없이 무너져 제 가슴에 또 다른 생채기를 남겼다. 상흔 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니 무뎌질 만하건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 또 가슴을 옥죈다.

    “초아야, 혼자 있고 싶구나.”

    “마노라….”

    누구보다 속상하고 서러울 윗전을 위해, 초아는 눈물을 닦으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소리를 죽인 채 눈물을 흘리던 련하는 제 가슴을 퍽퍽 쳐댔다.

    따뜻하다 못해 더운 온기가 대지와 바람 속에도 스며들 이 시기에, 매달 치러지는 합방엔 그와 있는 침소에만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엄동설한과 같다.

    아무리 싫어도 보는 이들의 이목을 생각해야 한다. 아니 세자빈이라는 위치를 생각해서 합궁은 치러지지 않아도, 탄일엔 제 위신을 생각해서 챙겨줘야 하는 것이 맞다.

    가문으로 보아도 어디 빠지지 않는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집안이고, 미색으로 따져도 스스로 아리땁다 자부한다.

    ‘대관절 내, 뭐가 부족하여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

    세자의 옆에 있는 자신이 매 순간 너무도 초라하고 아파서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처음 준 그 마음이 쉽게 거두어지지 않아 그것이 더 서글프고 아프다.

    그저 나날이 눈물만 는다.

    ‘… 너무 하십니다, 저하. 부디 더는 절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

    며칠 뒤 세자빈의 탄일 잔치로 오래간만에 궁 안에 활기가 넘친다. 세자빈의 탄일을 축하하러 일가친척들은 물론이고, 좌의정에게 잘 보이려는 자들의 선물이 이틀 전부터 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자빈의 탄일을 축하하기 위해, 신료들의 부인과 그 여식들이 지정된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궁의 제일 웃어른이자 실세인 대비가 친히 납시었다.

    련하는 웃으며 단상 아래로 내려가 대비를 맞이했다.

    “이리 직접 납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할마마마.”

    대비는 부러 이곳에 온 자들에게 보여주려는 듯, 세자빈의 손을 잡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같이 즐거운 날 이 할미가 오는 것이 불편하진 않습니까, 빈궁?”

    “아니옵니다, 할마마마. 어서 자리에 오르시지요.”

    련하는 대비를 모시고 제일 상석으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은 대비가 한 상궁에게 손짓했다. 한 상궁은 들고 있던 커다란 함을 세자빈 앞에 가져와 열었다.

    “할마마마!”

    함 속에는 먼 타국에만 있다는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풍경이 쪽빛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빈궁.”

    “할마마마, 이리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되옵니까?”

    단상 아래서는 과연 대비가 준 선물이 무엇이기에, 세자빈의 반응이 저리 놀라는지 무척이나 궁금들 한 모양이다.

    대비는 그들에게 궁의 제일 어른인 제가 세자빈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줄 심산으로 함 속의 풍경을 들어 올렸다. 맑고 고운 소리가 영롱하게 울리며 대비의 손에서 풍경이 아래로 조심스레 늘어졌다.

    제일 위쪽엔 사찰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물고기가 오색빛깔을 품고 정교하게 그 모습을 뽐내었고, 물고기 아래로 작은 종 모양의 투명한 종이 그리고 그 종 아래로 각기 다른 길이의 투명한 막대가 매달려, 대비가 살짝 흔들자 맑고 고운 소리가 영롱하게 울렸다.

    소리를 들은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감탄을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리도 소리지만, 그 어떤 보석보다도 더 귀한 유리로 만들어진 그야말로 보물과 다름없는 풍경에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할마마마.”

    “아무렴 우리 빈궁보다야 아리땁겠습니까?”

    “과찬이시옵니다. 이리 귀한 선물을 주셨는데 너무 약소하게 차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탄일상이라고는 하나 몇 가지 떡과 과일이 전부였다. 준비한 가짓수는 더 많았으나 지아비가 보낸 서책에 결국 그는 오지 않을 걸 알았다. 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만, 초대한 이들이 있어 화려하게 준비된 음식은 다 치우고 간단하게 내오라 명했다.

    “뭐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 내실이 튼실해야지요. 작은 태양이 빈궁의 곁을 지키지 못해도 화월국의 빈궁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세자빈이 아닙니까? 이 할미가 뭘 말하는지 아시겠지요?”

    “…예.”

    웃고 있던 련하의 눈이 찰나 원망과 슬픔에 젖어 들었다. 대비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세자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참석하진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저를 생각하고 세자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세자빈 하나라고, 대비는 넌지시 둘러 말을 전한 것이다.

    “한 상궁, 세자에게 기별을 넣게.”

    “연회장으로 모셔 올까요?”

    “온다면 더없이 좋고, 만약 올해도 핑계를 대고 안 온다면 이 늙은 할미가 세자궁까지 친히 걸음 해야겠느냐고 여쭙거라.”

    “예.”

    련하는 대비가 말만이 아닌 정말 저를 아끼어 신경 써 주는 것이 보여 그저 감읍할 뿐이었다.

    한편 이른 아침부터 시끌시끌한 소리가 세자궁까지 희미하게 들리자 자한의 미간은 굳어져 펴질 줄 몰랐다.

    련하에게 연정을 품지는 않았지만, 옆자리를 지키는 이 나라 세자빈에게 축하를 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 싫어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목소리 때문에 역시나 안 되겠다.

    한번 틈을 보이고 느슨해지는 모습이 저들 눈에 띈다면 필시 그 틈을 비집고, 세자라는 이름을 등에 지고 지금보다 더 활개를 칠 것이다.

    ‘역시 거리를 둬야 해.’

    저들을 옭아매 벌하고 싶어도 어찌나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인지 희한하게 증좌가 없다. 언제고 증좌만 찾는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생각은 지금이 아닌 앞의 몇 수를 내다보게 되고 얼굴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맹지야, 나갔다 와야겠다.”

    “예? 또요? 며칠 전 몰래 나가셨지 않습니까? 웃전에서 아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저하.”

    탄일 이후 부쩍 궁 밖 출입이 잦아진 세자가 걱정된 맹지는 거의 울기 직전이다.

    몰래 출궁한 것이 윗전 귀에 들어가면, 곁에서 모시는 제게 불호령이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무슨 걱정이냐? 누가 찾거든 고뿔이 걸려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돌려보내면 그만이지.”

    “저하….”

    “아, 만약 대비궁에서 끝까지 안 가고 버티면서, 할마마마를 모셔온다고 겁박하면 넌 그냥 이 문을 열어줘서 내가 없는 것을 보여줘.”

    “예? 하면 일이 더 커지지 않사옵니까?”

    자한은 맹지의 머리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주며 피식 웃었다.

    “매번 나 때문에 종아리를 맞으니 이번엔 피할 방도를 알려주는 게다. 넌 분명 세자빈 탄일에 가셔야 한다고, 모셔 가려고 이 문 앞에서 지키고 서 있었다고 해. 그럼 넌 제대로 날 지켰음에도 내가 탈출했으니, 네겐 불똥이 튀지 않을 게다. 알겠느냐?”

    “아! 그런 방도가… 아니, 그래도 저하….”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세자빈의 탄일인데, 어찌 그리 매번 매정하실까?

    방금 저하가 방도를 알려줬음에도 맹지는 웃전에서 찾으면 어찌 대처해야 할지, 벌써 긴장되어 손에 땀이 배어든다.

    “다녀오마. 늦어도 술시(19~21시) 전에는 돌아올 것이다.”

    “아니, 저하! 아니 되옵… 니다.”

    제 손길을 받지 않고도 벌써 변복한 세자는 문밖으로 유유히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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