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12)화 (12/96)
  • 12.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길 좀 지나가겠네.”

    낮게 떨어지는 자한의 목소리에, 사내 중 한 사람이 뒤로 물러나려는 것을 다른 두 사람이 만류하며 버티었다.

    “그렇게는 못 하지. 우리가 누군지 알고, 돈만 믿고 우리에게 망신을 줘?”

    가만 보니 아까 찻집에서 저 때문에 중간에 쫓겨난 사내들 같다. 아무리 자유로운 풍시전이라 하나 곳곳에 관군이 있어 이곳에 문제가 생길 시엔 개입하니, 함부로 하지 못하고 뒤쫓다가 이곳 골목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던 것 같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자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저들은 분명 이번 조사 대상에 오른 대신들의 자제이다. 이미 저들의 정체는 알고 있었다. 차라리 조용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면 좋았을 것을.

    “곱게 말할 때 비켜서지. 어차피 나중에 후회할 텐데.”

    자한의 말에 그들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여겼다. 한 사내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마치 한 대 치겠다는 듯 다가왔다.

    “여인 하나 꿰차고 돈으로 때우려고 하는 상인의 자식새끼가 감히 귀족인 우릴 건드려?”

    “왜 이 몸을 상인과 연관시키는지 모르겠다만, 귀족이라는 자가 품위도 없고, 생각도 없으니 제 아비와 가문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겠구나.”

    “뭐, 뭐야! 이 새끼가!”

    순간 사내가 주먹을 휘두르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자한에게 멱살을 잡혀 허공에서 바둥댔다.

    “억, 이거 안 놔! 이씨, 이보게들 이 새끼 잡아서 으윽!”

    “글쎄, 저쪽도 뭐 별반 다르지 않을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거기 둘!”

    “…!”

    두 사내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자한의 눈치를 봤다.

    “거기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 거야.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자보다 곱은 더 힘들게 해주겠다고 약조하지.”

    웃으며 말하는 자한의 얼굴에서 공포를 느꼈는지, 두 사내는 정말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거 놓지 못해! 내 아버님께 말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감히 내 목을 잡은 두 손을 잘라내고, 건방을 떤 세 치 혀를 뽑아낼 것이야. 아니, 네놈의 오만방자함을 물어 상단을 부숴줄 테다.”

    살기를 드러낸 악담에 두화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고, 감히 누가 누구에게 뭘 어찌한다고 저리 발악하며 덤비는 것인지 모르겠네.’

    이젠 슬슬 저 사내와 그의 가문이 아주 조금 걱정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의 발악에 자한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감히 날 그리 벌 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아버님밖에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네놈이 어떻게 날 그리 만들지 무척 궁금하구나.”

    “감히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알다마다, 호조 참판이 아니냐?”

    “알면서 내게 이따위로 해? 정녕 상단이 풍비박산 나고 싶은 게냐?”

    자한이 히죽 웃으며 뭐라 할 찰나 뒤쪽에서 사림이 달려왔다.

    “한참 찾았습니다. 이동하실 땐 표식을 남기시기로 하시고서는 그냥 사라지셔서 한참 헤맸습니다.”

    “여긴 어찌 찾았고?”

    “저하, 찾느라 헤매다가 이쪽에서 뭔 짐승이 있나 꽥꽥 소리를 질러대니, 궁금해서 잠시 들러봤지요.”

    사림이 저하라 칭하자, 꼼짝하지 않고 섰던 두 사내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바닥에 넙죽 엎드려 덜덜 떨었다. 그리고 아직 자한의 손에 매달린 사내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지 사림과 자한을 번갈아 멍하니 바라봤다.

    “한데, 저하. 이놈은 뭔데 저하 손에 감히 매달려 있습니까? 우리 저하, 팔 아프시게.”

    사림이 저하를 남발하자 바닥에 오들오들 떠는 사내들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제 죽을 줄 모르고 불빛만 보고 날아든 불나방이라고나 할까? 한데 사림아.”

    “예, 저하.”

    “감히 내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두 손을 잘라내고, 건방을 떤 세 치 혀를 뽑아낸다더구나.”

    두 눈을 부릅뜬 사림이 살기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낼 듯 덜컥대며 씩씩댔다.

    “감히!”

    “…!”

    “감히 우리 세자 저하의 존체에 손을 댄다고 한 것입니까? 그놈이 누굽니까? 저놈, 아니 그 옆의 놈입니까? 허락하시면 이 자리에서 그리 만들어 놓겠나이다.”

    순간 두 사내가 고개를 들더니 자신들은 아니라며 두 손과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누구라 어찌 말하겠느냐. 하나, 내 무서워서 손을 거둘 수가 없구나.”

    사림의 고개가 삐뚜름하니 꺾이더니, 자한의 손에 매달린 사내에게 바짝 다가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으르렁댔다.

    “이놈이 감히 저하께 그리 지껄였습니까?”

    “그래, 네가 없으니 이렇구나. 어디 무서워서 이제 궁 밖을 나올 수가 있을까 싶구나?”

    “제게 주시고 가십시오.”

    음산하게 떨어지는 사림의 말에 자한이 과하게 놀란척하며 물었다.

    “어찌하려고?”

    “어찌하긴요. 감히 저하께 그딴 말을 지껄인 놈입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순간 검을 빼려고 시늉하며 여전히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아서라. 그리 다 해치우다간 남아나는 것들이 있겠더냐?”

    두 사람의 살벌한 대화를 바로 코앞에서 듣던 사내의 발끝으로 뭔가가 톡톡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먼저 본 두화가 인상을 쓰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저기,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저분, 지린 것 같은데요.”

    “…!”

    놀란 자한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잡고 있던 손을 홱 놓아버렸다. 냉큼 두화의 옆으로 다가왔다.

    “허허, 품위가 없다 없다 하였더니, 저리 지저분한 놈인 줄 몰랐구나.”

    사림 역시 더러워서 조금 멀찍이 피했다.

    그제야 사내는 자신이 소피를 지린 자리인 줄 생각도 못 하고 넙죽 엎드려 울며 애원하였다.

    “감히 저하인 줄 모르고 불경을 저질렀나이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내는 소피와 흙이 묻은 손으로 제 뺨을 때리며 용서를 구했다.

    자한의 장난스럽던 표정은 어느새 냉철하고 차갑게 바뀌었다. 그의 모습을 본 사림도 장난이 끝났음을 알고, 한발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여 명을 기다렸다.

    “너희는 가문과 아비의 권세를 믿고 그간 파렴치한 짓을 잘도 저질렀겠다! 너희는 물론이요, 너희 아비들 또한 부정한 짓으로 쌓은 재물로 부를 늘렸으니, 이는 전하를 기만하는 짓임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젠 행한 짓의 처벌을 받을 것이다.”

    “저하,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저하, 살려 주시옵소서.”

    사내들은 연신 자한에게 용서를 구했다.

    하나, 늦었다.

    “저들을 의금부에 넘겨 조사케 하고, 그 가문 또한 철저하게 조사하라 이르라.”

    “예, 저하. 하오면 저하께옵서는 환궁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럼, 환궁해야지. 예서 살까?”

    권력을 쥔 자들의 후손들은 어찌 하나같이 다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훗날 조정에 인재가 없을까 봐, 벌써 걱정이 되는 것은 괜한 기우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편한 사림에게 성을 냈나 보다.

    “또 그러십니다. 저 자들에게 화난 것을 왜 제게 화풀이십니까?”

    “말을 말자. 얼른 넘기기나 하여라.”

    “예.”

    쌩하니 몸을 돌린 자한을 보며, 두화는 조금 전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지금 막 본 세자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하긴, 내 언제 저하를 뵈었다고. 원래 이런 분이셨을지도….’

    자한의 뒤를 따르던 두화는 어느새 자신의 움막 위 언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거물들을 건드린 바람에 정신이 나간 것인지,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집까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어가 보아라.”

    “…”

    초조한 듯한 두화의 눈빛을 읽은 자한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야 두려운 게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예, 저하.”

    “네가 주머니를 턴 자가 이 나라 세자라서?”

    두화는 벌벌 떨리는 두 손을 맞잡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천한 것이 감히 저하인 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하면 죽여주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던 두화가 그의 눈치를 보며 다시 고개를 조아리더니 작게 중얼댔다.

    “저하께서는 이미 제가 지은 죄를 넓은 아량을 용서하여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어찌 약조를 저버리려 하시는지요?”

    정말이지 오늘 심장이 몇 번은 멎는 것 같다. 감히 천것 주제에 세자에게 이리 묻는 것도 자칫 제게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묻는다. 두화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누가 약조를 지키지 않는다고 하였느냐? 다만 네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니 죽여주냐고 물은 것뿐이다.”

    “죽기 싫어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겨우 웃음을 참은 그의 손이 두화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지금처럼 내게 솔직한 모습만 보이면 된다.”

    커다란 손이 제 머리를 살살 쓸어 어루만진다. 머리를 쓰다듬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지 모르겠다.

    “…!”

    “그리고 내가 부르면 언제든 지금 그 모습으로 오거라.”

    지금 이 모습이라면, 저하께서 사주신 이 옷을 입고 나오란 말입니까?

    물으려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멀어져갔다.

    멍하니 그 모습만 바라보았다.

    사는 것이 무료한 귀족 나리께서 심심하여 천한 것을 며칠 가지고 논다고 생각하였었다.

    한데 무려 이 나라 세자라니….

    사고를 쳐도 이번엔 정말 제대로 쳐버렸다.

    이젠 앞으로 어찌 처신해야 할지 걱정이 되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축 처진 어깨로 언덕을 내려가려는데, 묵직한 부름 한마디가 발길을 잡았다.

    “서라.”

    돌아본 두화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단순히 눈빛만 무서운 귀족인 줄 알았는데 분명 아까 똑똑히 들었다. 영의정의 자제이자 전쟁귀인 백 장군이라고 말이다.

    ‘정말 산 넘어 산이로구나.’

    큰 산 하나 보내고 나니 이번엔 날카로운 바위산이 제 앞을 가로막는다.

    “…무슨 일이신지요?”

    한 발 가까이 다가온 도헌은 예리하게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래도 믿기지 않는지 부러 앞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흐트러뜨려 부스스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그날의 그 녀석과 좀 닮은 듯도 싶다.

    “정말 여인이었더냐?”

    무서운 표정으로 고작 제가 여인인 것을 묻는 건 또 뭐야?

    도대체 제가 여인인 것이 뭐가 그리 궁금해서 예까지 찾아와 묻는 걸까?

    세자한테도 농락당한 기분인데, 도헌에게도 농락당하는 기분이다.

    “저… 아니, 장군님은 제가 여인인 것이 그리 궁금하세요?”

    “그래.”

    즉각적으로 나오는 그의 대답에 순간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하였다.

    “예, 저 여인 맞아요. 한데 제가 여인인 것이 뭐가 그리 궁금하셔요?”

    “분명 그날의 넌 사내였으니까. 해서 내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

    조금 전부터 어이가 없었지만 진짜 어이가 없다.

    ‘정말 귀족들 머릿속엔 무엇이 들었기에 이러지? 별것 아닌 것에 이리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면 내가 여인임을 숨긴 것도 아니지만, 무슨 큰일인 것처럼 돼버리잖아.’

    인상을 찌푸린 두화가 빤히 바라보자, 무섭게 번뜩이던 눈빛을 거두더니 몸을 돌려 버린다.

    “참, 저하와는 어찌 아는 게냐? 설마 내게서처럼 저하의 물건을 훔친 것이냐?”

    ‘설마는요. 아주 귀신같이 아시네. 하지만 무섭기로 소문난 살인귀이자 전쟁귀인 그쪽에게 어찌 솔직하게 다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흥.’

    “아니요, 아니거든요.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됐는데… 아무튼 저도 오늘 그분이 세자 저하라는 걸 알게 된 것뿐이에요.”

    “그래?”

    “더 물을 게 남았는지요?”

    내심 얼른 가 주십쇼라는 말을 돌려 말했다.

    조금은 까칠한 두화의 말투에 도헌의 눈빛이 살짝 가늘어진다.

    “음. 없다.”

    “하면 전 이만… 살펴 가세요.”

    고개를 꾸뻑 숙인 두화가 치맛자락을 들고 언덕길을 내려간다.

    그 모습을 보던 도헌이 헛기침을 하더니, 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 몸을 돌려 질책하듯 소리쳤다.

    “거, 여인이면 얌전하게 행동하거라. 아무 데서나 그… 치맛자락 함부로 들고 그러면 보기 흉하다.”

    언덕길을 내려가던 두화는 기어이 짜증이 솟구쳐 몸을 홱 하니 돌이켜 씩씩대며 올라왔다.

    “아니, 남이야 치맛자락을 올리든, 벗고 춤을 추든 장군님이 왜 간섭이세요? 데리고 살 것도 아니면서… 뭐야, 자기 할 말만 하고 간 거야 지금.”

    정말이지, 오늘 여러모로 기막히고 황당하고 짜증 나는 하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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