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11)화 (11/96)

11. 세자와 전쟁광 살인귀

살포시 감은 눈 위로 긴 속눈썹과 짙지만 단정한 눈썹, 그리고 오뚝 선 코와 여름이면 맛나게 먹던 물앵두처럼 붉은빛이 번드르르한 입술에 두화는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이상하게도 주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저 입술만 보던 두화는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다.

손끝에 말캉한 촉감을 느끼던 그 순간, 뜰 것 같지 않던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마치 지금 뭣 하는 것이냐, 그리 묻는 것 같다. 그제야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것들이 빠른 속도로 귓속을 시끄럽게 어지럽혔다.

“아, 저는….”

부리나케 손을 뗐다.

감히 귀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잠시 뭐에 홀려 미쳤었던 게다.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감히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나리.”

자한에겐 그녀의 작은 정수리만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초승달을 박아 넣은 듯한 눈썹에, 맑은 눈동자 그리고 마늘쪽을 닮은 작고 오뚝한 코와 앵두 같은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를 저 또한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데 금세 저리 정수리만 보이니 이상하게 기분이 언짢아진다.

“일어나라.”

두화는 작아진 심장을 꼭꼭 감추고 일어났다. 벌써 그에게 두 번이나 죽을죄를 지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는 제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준 것이다.

“저….”

“되었다. 조금 전 일은 내 얼굴에 뭐가 묻어 그런 것이지 않으냐? 아마도 티끌이었겠지?”

“…예.”

거짓말.

서로가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 않는다.

살랑 부는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고 지나갔다. 어색한 공기가 답답해질 때쯤 주인이 찻상을 가지고 올라왔다.

적정한 온도의 물 위로 점차 연꽃이 활짝 펴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 그 향을 내뿜었다. 차를 우리고 음미하기까지 자한은 그 순서 하나하나를 말로 설명해 주었다. 덕분에 두화는 처음으로 제대로 다도에 눈을 떴다.

조금은 불편하고 어렵지만, 차 한잔을 마시는 자신이 굉장히 품격있게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 경험에 차를 마시는 동안 내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따뜻한 차를 마셔서 그런지 마음이 편안해진 모양이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두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 그런데 아까 여기 주인과 한참 말씨름하셨잖아요? 전 여기 손님이 꽉 차 있어서 돌아가야 하나 했거든요.”

“말씨름이라….”

감히 이 나라 세자에게 간이 크지 않은 이상 말씨름을?

피식 웃은 자한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한데 여기 계시던 손님들은 마치 우리가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다들 화난 표정으로 내려가던데 왜 그랬을까요?”

“맞다. 쫓아냈지 내가.”

“예?”

만약 입에 찻물을 머금고 있었더라면 그의 면전에 대고 뿜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작 차 한잔 마시려고 먼저 온 손님들을 내보냈다고?

“설마 돈으로 다 내보내고 여길 빌린 거예요?”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그게 뭐, 라는 표정으로 아주 담담하기만 하다.

“왜요?”

“몰라 묻는 것이냐?”

당연히 모르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 넌 누가 봐도 아씨로 보이지만, 너 스스로 그들 앞에서 눈치를 볼 것이다. 아니 그러냐?”

그의 말이 맞는다.

신기한 거, 멋있는 것에 감탄을 아끼지 않고 소리 내어 웃고, 더욱이 차 한잔 우려내기까지 그의 가르침이 있어서 할 수 있었다. 그런 제가 이곳에 다른 이들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웃으며 이 시간을 만끽하진 못했을 것이다.

“…!”

그렇다고 설마 지금 절 위해서 이 비싼 찻집을 통째로 빌렸다는 건가?

왜?

“그러니까… 왜 그러신 건데요?”

“그냥.”

자신과 달리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한 그는 조금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는 일어섰다.

여전히 찻잔 앞에서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두화의 작은 머리를 보자니 피식 웃음이 난다.

제 뒤에서 인상을 쓴 채 따라 올라올 땐 언제고, 주위 경관을 본 순간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제법 큰 돈을 들여 한 시진을 빌린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해맑게 웃고 거짓 없는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가 답답하던 가슴을 트이게 해주었다. 감히 제 얼굴에 손을 댔어도 그게 또 싫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조금만 더 더디게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잠시 정신 나간 생각까지 했다.

정자에서 내려온 자한은 마치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거침없이 다가오는 사내를 경계했다.

바로 뒤에서 내려오던 두화가 계단 마지막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의 등에 대고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멈추셨어요? 안 가셔요?”

묵묵부답.

두화는 고개를 옆으로 빼꼼하게 빼 정면을 주시했다.

바르게 쓴 갓 아래로 보이는 낯익은 얼굴에 잠시 미간이 좁혀지더니, 이내 놀라 자한의 등 뒤로 바짝 얼굴을 숨겼다.

‘와, 나 참. 저자가 여길 왜? 설마 그때 다 받지 못한 게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명 가락지 한 개뿐이어서 정확하게 다 돌려주었는데, 왜 제 뒤를 쫓아온 거지?

“내게 볼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난 초면인 것 같은데?”

그의 말에 그제야 도헌은 정면의 사내를 바로 봤다. 조금 전까진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오는 여인을 보느라 사내의 존재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나저나 저 녀석 정말 여인이었던 것인가?’

사람이 행색에 따라 저리 달라지는 것에 놀랍기도 하거니와, 변모한 그녀가 그냥 궁금해서 온 것이었다. 한데 그녀 앞에 선 사내의 기운이 남다르다. 가만 보니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누구지?’

피바람이 부는 전쟁터를 돌기 전까진 집 아니면 간혹 부친을 따라 입궐한 적밖엔 없다. 그러다 제가 원하던 무과에 장원으로 뽑혔다. 부친은 제가 무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역으로 반발심이 치솟은 도헌은 전쟁에 자원했다. 그곳에서 몇 차례 공을 세우자 자연스럽게 어린 나이지만 장군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 제 짧은 삶에서 제 또래인데도 살기와 위압감을 주는 저런 눈빛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누군지 떠올리던 그때 사내의 살짝 벌어진 도포 틈으로 반짝이는 뭔가를 보았다.

‘설마 저것은!’

‘왕족만이 지니는 황금 호패.’

분명 황금 호패다. 그렇다면 눈앞의 사내는 왕족 중의 하나란 말인데, 왕족 중 약관을 넘은 자는 단 두 명이다. 병약하여 가택에서만 생활하는 능윤군과 세자 저하!

한데 눈앞의 사내는 건장한 체격에 눈빛이 살아있다.

가만히 과거를 돌이켜보니, 부친을 따라 궐에 들어 지나가는 세자를 먼발치에서 보았던 적이 있다. 이내 두 눈이 커진 도헌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조아렸다.

“저하를 뵙사옵니다.”

자한은 실로 놀랐다.

처음 보는 자다. 한데 찰나의 순간 자신이 세자인 것을 단번에 꿰뚫었다. 만약 이자가 저를 노리는 살수였다면, 아마도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하나, 저리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불손한 마음이 없다는 뜻.

“그대는 누구지? 누구이기에 내가 세자라 하는 것이냐?”

도헌은 그대로 고개만 살짝 들고 고하였다.

“오직 왕족만이 지닐 수 있는 황금 호패를 우연히 도포가 펄럭일 때 보았습니다.”

“그것만으로 내가 세자다?”

“물론 아닙니다. 왕족 중 약관을 넘은 분은 두 분, 이 나라 세손이신 세자 저하와 능윤군이시지만, 능윤군은 가택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니, 소신 앞에 기개가 장골 하시고 늠름하게 서 계신 분은 저하가 아니겠습니까?”

자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단 하나의 단서만 보고 자신이 세자라는 것을 유추해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을 낮춰 예로서 절 대했다.

‘인재군. 분명 이자는 앞으로 화월국에 꼭 필요한 충신이 될 것이야.’

“일어나라. 그대는 어느 가문의 누구인가?”

도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예를 갖추어 고하였다.

“소신 영의정 대감의 차남 백도헌이라고 하옵니다.”

“영의정의 차남이라면… 아! 백 장군이로군.”

자한은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그러잖아도 전쟁터에서 살인귀라 불리며, 늘 승리로 이끄는 그 유명한 젊은 장군이 궁금했었다. 한데 이리 우연하게도 만나다니!

“그래, 여긴 어쩐 일인가?”

“소신 아버님의 명으로 부정부패한 자들의 자제들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의 말에 자한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겉으로는 놀러 온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름 수사 대상에 오른 자들을 조사하러 나온 것이었다. 이미 한발 앞서 온 사림이 한창 정보를 모으고 있을 것이다. 근자에 부왕의 근심거리를 해결하고 싶어서 몰래 미행 나온 것이다.

세자는 본디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서는 아니 된다.

왕의 허락하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나 독단으로 움직이거나, 조정의 인물과 사사로이 독대하는 일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이는 왕의 권한에 도전하는 것이며 크게는 역모에 준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하여 궁을 벗어나는 일조차 마음대로 해서는 아니 된다.

자한은 그의 어깨를 짚은 뒤 한마디 하였다.

“언제 궁에 오거든 세자궁에 들르게. 차나 한잔 나누세.”

“예, 저하.”

그들의 대화를 듣던 두화는 그제야 두 사람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재빨리 정자 난간을 움켜잡아 몸을 지탱하였다.

‘뭐야, 지금 저 두 사람? 한 사람은 이 나라 세자고, 한 사람은 미친 전쟁광 살인귀라고 불리는 그 백 장군이라고?’

도대체 그날, 저는 그 하고많은 사람 중에 어쩌자고 저 사내들의 주머니를 턴 걸까?

사색이 된 두화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어쩌다 저런 사내들과 엮였지?

‘바보, 멍청이! 이놈의 손모가지가 문제야, 문제!’

뒤늦게 자신을 자책하던 두화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두 사람의 주머니를 턴 지는 꽤 지났고, 그 벌로 한 사내와는 아마도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내는… 뭐 줄 것 줬으니 더는 볼 일 없는 거잖아.

앞서가는 세자를 따라가기 위해 두화는 도헌의 눈치를 보며,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 그의 앞을 지나쳐 걸었다.

“잠깐!”

낮지만 힘이 있고, 위압적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두화가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섰다. 두화의 앞으로 돌아온 도헌이 고개 숙인 두화를 빤히 바라봤다.

“그대는 누구지?”

“예? 저, 저는….”

그때였다.

앞서가던 자한이 뒷짐을 진 채 돌아 말했다.

“그 아이는 내 사람이다. 내 사람까지 조사 대상인가?”

“…!”

세자의 말에 도헌의 미간이 굵게 패이다가 돌아왔다.

“그 눈빛을 보아하니 그런가 보군. 하면 저 아이의 주인인 나부터 조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제야 도헌은 두화의 옆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저하. 소신이 아는 이 같아 잠시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다행이고.”

다시 몸을 돌린 세자가 그 자리에 서서 재촉했다.

“뭐 하는 것이냐? 안 따라나서는 것이야?”

두화는 도헌의 눈치를 살피며 치맛자락을 잡고, 조금씩 걸음을 빨리해 세자의 뒤로 바짝 다가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도헌은 한참을 바라봤다.

잠시 뒤 풍시전을 나와 시전 골목을 지나매, 세 명의 사내가 길을 막아섰다.

두화는 저와 세자를 보며 이죽대는 표정이 어딘지 불길하여, 감히 세자의 옷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왜 그러느냐?”

“아무래도 돌아가는 것이 나을 듯싶어서요.”

“왜, 저 치들이 두렵더냐?”

“저리 몰려다니며, 앞을 가로막는 것은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니니까요. 저는 괜찮은데… 다치실까 봐.”

걱정스레 얼굴을 찌푸린 두화에게 옅은 미소를 짓던 자한이 사내들을 향해 돌아봤을 땐, 그의 얼굴엔 냉랭한 기운으로 뒤덮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