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8)화 (8/96)
  • 08. 亡國罪人(망국죄인)

    길일이 정해져 합궁하는 날이면 자한은 언제나 숨이 막혔다.

    세자빈의 용모만 따지고 든다면, 응당 사내라면 정욕이 불끈 솟고도 남을 미색이다. 하나, 권력을 이용해 부정부패를 일삼는 좌의정의 여식이다.

    세자시강원에서 공부하며, 백성들의 안위와 현 조정의 문제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였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그들의 손을 놓지 못하는 부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죄다 내친다면 조정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자한은 조금씩 그들의 죄를 캐내려고 했다. 하나, 부왕의 명 없이는 궁 밖 출입에 제한이 있고, 사림이 알아 오는 것도 한계다. 그러다 이번 탄일에 처음 밖의 실정을 알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오늘 엽전을 처음 본 세자는 본인의 무지함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배우고 논쟁하며 백성들의 삶을 그래도 안다고 자부했다. 듣고 논쟁하던 것들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였던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말로만 백성을 위한다 떠드는 것이 아닌 정말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

    자한이 합궁할 때 이용하는 방에 들어서니 이미 세자빈이 앉아있다.

    일어나 예를 취하는 세자빈을 무심히 지나쳐 금침 위에 앉았다.

    “지금 그대나 나나 같은 심정일 것 같은데. 늘 그랬듯 조용히 밤을 보냅시다.”

    “…”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세자의 말에 설련하는 오늘도 가슴이 옥죄어든다.

    이 숨 막히는 공간이 답답하여 눈물이 나려는 걸까?

    아니면 하나뿐인 지아비에게 매번 이리 내쳐지는 것이 수치스러워 눈물이 나려는 걸까?

    첫날밤부터 소박맞아 여태껏 처녀라 하면 그 누가 믿을까.

    맑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김없이 차오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아비는 이미 등을 돌려 누워있다.

    이런 삶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수치스럽고 미움받는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다면, 세자빈이 되겠다고 그리 부친을 졸라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시원시원한 웃음에 반하여, 처음 본 그날부터 제 마음을 앗아간 분이기에, 제게도 그리 웃어 줄 줄 알았건만.

    ‘모지십니다.’

    ‘차가우신 분. 과연 당신의 웃음을 저는 볼 수 있는지요?’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천 소리만 고요한 적막을 흔들어댔다.

    ***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 높다란 담 아래로 검은 그림자 여러 개가 빠르게 지나간다. 이내 담벼락을 타고 넘어간다.

    고요하기만 한 행랑채를 지나쳐, 사랑채에 들어선 그림자들은 주위를 예리하게 살핀다. 이내 불 꺼진 방을 향해 디딤돌을 밟고 대청마루에 올라섰다.

    복면인은 매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어 두 사람이 더 들어가고 세 사람이 주위를 경계하며 밖을 지켰다.

    복면인은 세상모르고 잠든 귀족의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

    자다 말고 서늘한 것이 목에 닿자, 좌의정 설변도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둠이 조금씩 익숙해지자 주위의 것들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내 설변도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더니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서늘한 감촉이 목에 더 바짝 붙는 것이 아닌가.

    순간 뜨끈한 것이 목 아래로 흘러내렸다.

    “조용히.”

    위협하는 낮은 목소리에 설변도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복면인이 손을 뻗자 가까이 서 있던 또 다른 복면인이 한 장의 종이를 꺼내었다. 복면인은 어둠 속에서도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사재기로 백성들의 삶을 더 곤궁하게 만들고, 그런 백성들에게 고리대금으로 돈놀이를 하고 또 사람 장사까지 했구나.”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난 그런 적 없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난 화월국 세자의 장인이며 이 나라 좌의정이니… 윽!”

    살을 파고드는 칼날에 쓰라린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 드는 것 같다. 인상을 찌푸린 설변도가 바로 앞 복면인을 노려봤다.

    근자에 들어 돈을 빌리고 이자를 갚지 못하는 놈들이 많았다. 하여 놈들의 여식을 이자 대신 받아 기생집으로, 혹은 위법이긴 하나, 주변의 나라로 팔아넘겨 큰 이익을 보았다.

    ‘설마 제 여식 되찾겠다고 감히 내 목에 칼을 겨누는 것인가? 으음, 이놈 어디 두고 보자.’

    지금 이 위기만 지나가면 놈들을 발본색원하여 껍질을 벗겨 버리리라!

    “하여 이 나라 좌의정이라는 자가, 아니 이 나라 부원군이라는 자가 죄 없는 선량한 백성들을 상대로 돈놀이도 모자라 나라에서 금기하는 사람 장사까지 하는가?”

    “으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감히 내게 이러고도 살길 바라느냐?”

    나지막하게 으름장을 놓는 설변도의 모습에 복면인이 피식 웃었다.

    “곳간 열쇠, 그리고 팔아넘긴 여인들이 있는 장소.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지.”

    “곳간 열쇠는 저기 서안 아래 안쪽에 묶여있고, 계집들이 있는 장소는 모른다.”

    복면인이 고갯짓하자 작은 체구의 복면인이 서안의 아래를 더듬거렸다.

    ‘있는 것들이 더 하다고 이리 꼭꼭 숨겨놓을 정도로 재물이 많은가?’

    작은 체구의 복면인은 서안 아래에 딱 붙어 있는 열쇠를 힘껏 떼어냈다.

    “나가서 곳간 열어서 쌀하고, 금괴 그리고 은자만 챙겨.”

    “예.”

    작은 체구의 복면인이 밖으로 나가자, 칼을 겨누고 있던 복면인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었다.

    “다 내주었는데 어찌 이러느냐?”

    “다 내주긴 뭘 다 내주었다는 것이냐? 여인들이 잡혀간 장소는 말하지 않았으니 나도 네 목숨으로 대신해야겠다.”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곳간에 있는 것만 하더라도 상당한데, 내 목숨값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아까보다도 더 깊이 찌르고 있는 칼날에 이제야 설변도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곳간에 있는 것들은 네놈이 저지른 것들에 대한 값이고, 내가 원한 것은 여인들이 있는 장소인데 넌 그걸 말하지 않았으니 네 목숨으로 대신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둔함이면 조정에서는 어찌 논쟁하며 지내는지 궁금하군.”

    순간 두려웠던 마음은 눈앞의 복면인에 대한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도적질이나 하려고 온 놈들이 아니다.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간 것인지는 몰라도, 여인들을 구하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 더구나 조정의 일을 거들먹거리는 건 뭔가 석연치 않다.

    “날 아느냐?”

    죽을 때 죽더라도 알아야겠다.

    놈의 정체가 뭔지 말이다.

    피식 웃은 복면인이 순간 바로 앞 서안의 위로 칼을 휘갈겼다. 그리고 이내 다시 목에 대어진 날카로운 감촉에 설변도는 숨을 집어삼켰다.

    “생각해보니 어리디어린 여인들을 팔아넘기며, 오로지 재물로만 생각한 네놈의 목숨 따위 필요 없을 듯싶구나.”

    설변도는 순간 안도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복면인의 말에 불안하여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세자의 장인이라 하였으니 네게도 여식이 있다는 말이겠지. 다른 이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네 죄를 네 여식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네 여식을 반드시 매음굴에 팔아주지. 귀한 여식이 밤마다 천한 것들의 다리 사이에서 몸부림치며….”

    “그, 그만!”

    상상조차 하기 싫은 조롱이었다. 그래서는 아니 되는 여식이다.

    제 목숨보다도 귀한 여식을 그런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 이깟 놈이 궁의 경비를 뚫고 들어가 세자빈을 납치할 순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지금 놈의 목소리나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을 보면 그리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서쪽 국경지대 숲이다.”

    복면인은 설변도가 말하지 않는다면 당장 놈의 팔 하나를 거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놈이 입을 열었다. 한데 하필이면 서쪽이라….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성라국에 우리 화월국의 여인을 팔았더냐?”

    “…”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너 같은 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녀도, 전하께서는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는 것이지? 그날 이후 혜안이 흐려지신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조정을 언급할 때부터 뭔가 석연치 않다고 했지만, 감히 천한 것이 주상을 입에 담다니!

    분명 뭔가 숨기고 있는 놈이었다.

    “누구냐, 넌!”

    “화월국을 망조로 이끄는 놈들을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사자니라.”

    그래, 내 가문을 한낱 세 치 혀로 무너뜨린 네놈들 하나, 하나 죄 저승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렇게 나의 복수는 천천히 너희를 옥죄일 것이니라!

    “여, 여봐… 윽!”

    설변도의 머리를 검집으로 내려친 복면인은 날이 선 눈빛으로 정신을 잃은 그를 노려보고는 잠시 뒤 나가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설변도는 촛대에 불을 밝히고 아랫것들을 불러들였다.

    “당장 주변을 샅샅이 수색해 복면을 한 놈들을 잡아들여! 당장!”

    “예, 나리!”

    아랫것들이 나가자 그제야 설변도는 목과 가슴이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꼈다. 상처를 살펴볼 사이도 없이 자신의 시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서책과 붓이 올려져 있던 작은 서안 위로 큼지막하게 쓰인 글자에 설변도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切齒腐心(절치부심)

    몹시 분하여 이를 갈고 마음을 썩인다는 뜻.

    제게 무슨 굴욕을 당하여 복수하려고 이런 글귀를 남긴 걸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감히 제게 칼을 겨누었으니, 머지않아 놈의 목이 떨어질 것이다.

    ‘주상도 날 어찌하지 못하는데 감히 제깟 것이 뭐라고 글귀까지 남겨.’

    하지만 뭔지 모르게 이 찝찝함이 걸린다.

    그때 부인이 들어오다가 설변도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대감, 목에 상처가….”

    “호들갑 떨지 마시오. 지금은 지혈만 하고, 날 밝으면 의원이나 불러오시오.”

    “예. 한데 가슴에 웬 글자가….”

    낭자하게 흘렀던 피가 굳어 글자가 뭔지 보이지 않는다. 곧 물을 묻힌 천으로 엉겨 붙은 피를 닦아내던 부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뒤로 나자빠진다.

    “어허, 체통을 지키시오. 부인.”

    “대, 대감. 그것이 아니오라… 어찌 이런 일이!”

    “뭔데 그리 호들갑인지 원.”

    눈치 있게 아랫것이 경대를 가져와 서안 위에 올려놨다. 벌어진 가슴 사이로 상처가 난 곳을 보던 설변도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충격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의 가슴팍에는 붉은 혈흔으로 남은, 나라를 망친 죄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亡國罪人(망국죄인)

    ***

    인정부터 딱딱거리며 돌아다니던 순라군들이 멀리서 파루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굳게 닫혀있던 도성의 문이 열렸다. 이때를 놓치면 새벽부터 움직이는 자들에게 금세 발각이 될지도 모른다.

    희끄무레 먼동이 밝아오려 하자 복면인들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만 이동했다.

    움막으로 들어선 복면인들이 일제히 복면을 벗었다.

    “자네와 자네는 한시라도 빨리 변방으로 가, 그곳 우리 개방 식구들과 함께 여인들을 구하게나. 그리고 자네는 이것을 동석골에 골고루 나눠 주도록 하고.”

    “아버지 저는요? 저도 나눠줄게요.”

    여식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일랑은 헛기침을 하며 애써 못 들은 척하였다.

    아무리 의를 행하기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의 재물을 터는 일일지라도 이는 도적질이오, 사사로운 복수의 일환이다.

    그것을 지금 여식 앞에서 아니 여식과 함께하고 있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바른 것만을 가르쳐도 모자랄 판에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며 도적질을 정당화하고 있으니, 일랑 자신도 스스로 끊임없이 이것이 고민이다.

    “두화는 다음부터 따라나서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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