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7)화 (7/96)
  • 07. 몸으로 때워라.

    놀라는 사림을 보고 자한은 피식 웃었다.

    “그래. 저 눈, 저 얼굴! 확실해.”

    “에이, 어딜 봐서 그 여인입니까? 딱 봐도 사내….”

    검을 든 사내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내치고는 제법 반반하게 생기긴 했네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때 그 여인은 여인답게 생겼지만, 이놈은 아닌데요?”

    듣다 보니 오늘 이놈, 저놈, 놈, 놈 소리를 참 여러 번 듣는구나.

    이를 앙다문 두화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자, 제가 계집이든 사내든 그건 그쪽 나리께서 정해주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누구를 찾는데요?”

    상전으로 보이는 자가 피식 웃더니 쓱 다가와 섰다.

    ‘에이, 놀라라!’

    두화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분명 온화한 미소로 보고 있지만, 저를 내려다보는 강렬한 눈빛에 옭아 매여 꼼짝을 못하겠다.

    “너를 찾았다.”

    “저, 저요?”

    자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지체 높으신 분께서 하필 저처럼 천한 것을 왜 찾은 것일까? 두화는 뭔지 모를 불안한 기운에 뒤로 내뺄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사내의 부채가 그녀의 목에 날아들었다.

    ‘에이, 오늘 일진 왜 이래? 쇠붙이고 종이고 뭐가 자꾸 이렇게 내 목을 노리는 건데! 아버지….’

    속으로 아무리 부친을 불러봐도 언덕 아래 떨어진 움막 속에 계신 부친이 달려올 리 만무했다.

    “왜, 왜 이러세요 나리?”

    “내가 왜 이러는지 네가 더 잘 알 터인데?”

    “예? 알면 묻겠어요, 몰라 묻는 거잖아요? 아무리 거지라도 이리 함부로 살생하셔서는….”

    “내가 언제 죽이기라도 하였느냐?”

    차갑고 집요한 눈빛과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에 두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던 두화는 꼼짝할 수 없었다.

    대관절 제가 뭘 어쨌기에….

    불만을 표출하려던 찰나 생각나는 것이 있었으니!

    ‘서, 설마. 정말 그 돈주머니!’

    찌푸려지다가 이내 놀란 듯 바뀌는 두화의 표정에 자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난 게로구나.”

    “예? 뭐, 뭘요!”

    ‘아니, 내가 여기 있는 거는 또 어떻게 안 거야? 일단은 우겨야 해. 진짜 그 돈주머니 주인이면… 으윽, 어쩌지. 이미 다 써버려서 아까 그자처럼 가져다줄 수도 없는데.’

    겨우 가락지 주인을 보냈더니 이번엔 돈주머니 주인이 나타났다.

    큰일 났네, 큰일 났어.

    괜히 타들어 가는 속에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 물었다.

    “시치미 떼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내 주머니 가져오너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난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다. 마지막이다. 내 주머니 가져오너라.”

    조금 전과는 다르게 차갑게 변한 눈빛!

    금방이라도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것만 같아서, 두화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두화의 뒤를 사림이 뒤쫓으려 하자 자한이 막아섰다.

    “놔두거라.”

    “하지만 저러다 도망이라도 가면.”

    “사림아, 네 보기엔 저 아이가 도망갈 것 같으냐?”

    “예?”

    다른 이의 품이나 슬쩍 하는 도둑에 거지니까 당연히 저 살자고 도망가지 않을까? 철없는 것 같으면서도 엉뚱한 세자지만 가끔 보이는 저 눈을 보면 당최 그 속을 모르겠다.

    “눈빛이 살아 있는 아이다. 이미 네가 조사한 것에도 저 아이의 성품이 드러나지 않았더냐.”

    “하지만!”

    “훔친 돈으로 저 혼자 먹고살 수도 있는데 더 어려운 이를 돕겠다고 시주를 하는 아이다. 비록 손버릇은 좋지 못하나 의리와 정이 있다. 어찌 보면 아바마마도 그리고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 높은 그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고 있지.”

    “저하, 하오나 다른 이의 것을 훔쳐서 선행을 베푸는 것이 옳다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른 이도 아닌 저하의 것을 훔친 자입니다. 거기에 감히 저하의 존체에 손을 댔습니다. 당장 옥에 넣어야 맞습니다.”

    단호한 사림의 말에, 자한은 그때 맞았던 제 뺨을 한번 슬쩍 만지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게 맞지. 한데 난 그러고 싶지 않구나.”

    “저하!”

    자한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그때 그 향기가 이곳에 있으니 더 진하게 풍기는군.’

    좀 전 그녀 가까이 있을 때도 은은하면서도 따뜻한 향이 풍겼다. 그녀가 없는 지금도 풍기어 온다.

    ‘… 향을 담은 여인이라.’

    멀리서 뛰어오는 그녀를 보며 자한은 사림을 보고 씩 웃어주었다.

    “봐라, 분명 주머니에 돈이 없을 터인데도 오지 않느냐.”

    “…”

    ‘어휴, 전 모르겠습니다. 또 가진 것이나 털리지 마십시오.’

    마치 사림의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자한이 웃으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엔 속 안쪽에 꽁꽁 묶어 두었으니 절대 털릴 리 없다.”

    “헉, 이젠 남의 속까지 들여다보실 줄 아십니까?”

    “뭐?”

    “아, 아닙니다. 저기 오네요.”

    숨까지 헐떡이며 달려온 두화는 자한의 앞에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자한과 사림은 사뭇 놀란 눈치였다.

    주머니를 든 손을 앞으로 쭉 내민 두화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잘못했어요, 나리. 귀하신 분의 것인 줄 모르고 훔쳤지만, 나쁜 마음으로 훔친 것은 아니에요.”

    “어불성설이로군.”

    사림의 중얼거림에 자한이 고개를 쓱 돌려봤다. 마치 제 앞에서 유식함을 드러낸 것에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림은 학문보다는 무예를 더 가까이하는 사내였다.

    “정말로… 이유가 어찌 되었든 제가 잘못했어요, 다만….”

    “다만?”

    “용서해 주세요, 꼭 갚을게요!”

    고개를 들어 자한을 올려다보며 애처롭고 불쌍한 눈빛을 마구 쏘아 보냈다.

    솔직히 움막으로 향하면서도 슬쩍 샛길로 새어 며칠 잠적했다가 돌아와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리하면 안 될 것 같은 촉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아마도 자한의 살기에 가까운 압도적인 눈빛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저 하나 때문에 혹여 50여 명이 넘는 이곳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까 봐, 그게 더 두려웠다. 물론 부친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또한 제겐 두려움의 일부분이지만,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하고 봐야 했다.

    침상 아래 숨겨둔 몇 냥과 얇아 구불거리는 가락지 같지 않은 구리 가락지를 챙겨 결심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 많은 돈을 갚는다? 네가? 어떻게?”

    “…아, 그러니까 그건… 동냥질해서라도 갚을게요. 하오니 제 잘못을 행여….”

    두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언덕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자한을 올려다봤다.

    자한은 이미 그녀의 행동만으로도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알아챘다.

    하지만 쉽게 해결해 줄 생각은 없다. 이미 제 호기심을 건든 그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감히 내 뺨을 치고 그 많은 돈을 훔친 도둑이 내게 조건을 거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

    “뺨은… 먼저 제 손목을 잡아서 그런 거잖… 아니 그것이 아니라, 용서… 시간을 좀 주시면 갚는다니까요. 그리고 이건 제가 가진 전부예요.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다 갚을 터이니 부디 용서해 주세요.”

    자한이 고갯짓을 하자 사림이 그녀가 준 주머니를 받아 열었다.

    자한의 비단 주머니가 아닌 낡은 주머니엔 처음 보는 동그란 쇳덩어리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본 자한이 미간을 좁히며 매우 신중하게 바라봤다.

    “이게 뭐지?”

    “백성들이 쓰는 돈이옵니다.”

    “돈? 금전, 은전이 아닌 이런 것도 돈이라고?”

    제가 지니고 있던 금전과는 사뭇 달랐다. 해서 처음 보는 쇳덩어리도 돈이라 하여 놀랐다.

    “소리를 낮추시옵소서.”

    사림은 세자의 귀에 백성들이 쓰는 돈에 관해 빠르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처음엔 자한의 눈이 커지다가 사림이 말을 마치고 한발 물러섰을 때는 수려한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난 그동안 궁이라는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백성들의 삶이 어떤지, 무엇을 가지고 생활하는지 전혀 몰랐다. 듣기 좋은 감언이설로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들만 있었지, 누구 하나 궁 밖 백성에 관한 일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다.

    이제라도 세자로서 화월국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알아야겠다.

    “좋다.”

    “정말요?”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그를 올려다본 두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단!”

    “…!”

    “몸으로 때워라.”

    입꼬리를 올리는 자한을 본 두화는 등골이 오싹하여 부르르 떨었다. 뒤늦게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제멋대로 해석한 두화의 얼굴이 벌게졌다.

    “…저, 저기. 저는 천한 것이라 몸에서 냄새도 나고, 또 나리는 귀한 분처럼 보이시는데 저를 탐내시는 것은….”

    그녀의 말에 자한은 미간을 좁히다 이내 풀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무슨 망상을 하는 것이냐? 네가 상상하는 것이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나도 싫으니!”

    두화의 몸을 훑어내린 자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색하였다. 민망해진 두화가 헛기침하며 괜히 낡은 옷자락을 툭툭 털어내었다.

    “그, 그럼. 몸으로 때우라고 하심은….”

    “내가 연통을 넣으면 무조건 달려와 시중을 들거라.”

    “시중… 아, 네.”

    ‘다행이다. 어휴, 호색한인 줄 알고 식겁했네.’

    ***

    손끝에 걸린 작은 주머니를 빙그르르 돌리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홀로 웃는 세자를 본 맹지는 등골이 쭈뼛쭈뼛 선다.

    세자궁에 홀로 있을 때의 세자는 차갑고 냉기가 폴폴 풀리는 사람인데, 요즘 들어 어찌 저리 웃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하던데, 정말 죽을 날이 가까워진 걸까?

    ‘정말 그러면… 우와, 드디어 나도 이 얼음 귀신 나온다는 세자궁에서 벗어날 수 있겠네.’

    워낙 세자의 성품이 차가운지라 궁내에선 세자궁에 얼음 귀신이 나온다고 알음알음 입소문이 난 지 오래다.

    5년이나 모시고 있다 보니, 익숙해진 세자의 차가움에 이젠 뭐 그런가보다 싶지만, 저리 웃는 건 처음 보는지라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보다도 웃는 세자가 더 두렵다.

    “저하, 저녁 수라 올리오리까?”

    “되었다.”

    조용히 나가려던 맹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그 낡은 주머닌 뭡니까?”

    “글쎄다.”

    “혹 주머니가 필요하시면 상의원에 일러 하나 만들라 이를까요?”

    “아니다.”

    또 웃고 있다.

    “한데 저하? 그 낡은 주머니가 좋으십니까,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내가 웃었느냐?”

    “예.”

    맹지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상을 줘야 하나?”

    “예?”

    모를 말만 하는 세자를 물끄러미 보던 맹지가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듯 난감해하더니,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 아뢰었다.

    “저, 저하.”

    “어찌 그러느냐?”

    “그것이… 오늘 빈궁 마노라와 합궁하시는 길일이옵니다.”

    세자는 아무런 말이 없다.

    고개를 살짝 들어 세자를 바라보던 맹지는 속으로 숨을 집어삼키었다. 평소보다도 더 냉기를 흘리는 세자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주위의 모든 것들을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늦지 않으시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알았느니.”

    서둘러 목욕물부터 받으러 가던 맹지는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전날 말씀 올렸어도, 자리를 비우시기 전에 재차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합궁 일에는 저리 무섭게 변하시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어찌 잊었을까? 아, 정말이지 난 맹추야, 맹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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