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6)화 (6/96)
  • 06. 인연일까, 악연일까?-2

    순간 뜨끔한 두화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두화의 목덜미를 잡은 손길이 풀렸다. 대신 목에 닿은 검집에 두화는 아연실색하였다.

    “내놓거라, 내 주머니.”

    “아… 그게 그러니까… 지금은 없는데요.”

    없다는 말에 도헌의 눈에 살기가 드리워진다.

    “죽고 싶은 게냐?”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검을 빼 제 목을 칠 것 같아서 두화는 손사래를 치며 애원했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세요. 죽고 싶은 사람이 있나.”

    이런 상황에 되레 따지고 드는 녀석의 엉뚱함에 도헌은 기가 막혀 노려봤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집에 있다고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목에 닿은 검집에 힘이 들어간다.

    검집으로 목을 쿡쿡 찔러대니 기분 나쁘게 아프다. 인상을 찌푸린 두화가 두 손으로 검집을 잡으며 재차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잠깐만요. 꼭 돌려 드릴 테니까, 지금은 저 아이 집에 먼저 가보면 안 될까요?”

    “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저 아이를 챙기고 싶으냐?”

    “챙기는 게 아니라, 아이 어미가 얼마나 아프면 저리 조그만 녀석이 동냥질할까 싶어서요?”

    “…”

    “한 번만 은혜를 베푸세요, 나리. 네?”

    분명 지저분한 넝마를 걸친 천것인데도, 눈빛이 맑고 옅은 미소가 걸린 붉은 입술이 마치 제집 후원에 핀 붉은 매화 같다.

    ‘무슨 사내 녀석이 이리 고와서는… 흠흠.’

    “좋다. 동행할 터이니 허튼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럼요. 절대 안 해요, 허튼 생각. 하하하”

    두화는 아이에게 달려갔다.

    “가자, 너희 집에.”

    “참말?”

    “응. 가진 건 없지만 일단 너희 집에 가서, 네 어머니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봐야 도와줄 거 아냐. 그러니 앞장서.”

    아이는 정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혹여 두화가 도망이라도 갈까 싶어 꼭 쥐어 잡는다.

    아이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지 꽤 오래되어 보였다. 앙상하게 야윈 그 몰골이 꼬질꼬질했다.

    두화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따라갔다. 시전으로 들어오는 골목 끝, 다 쓰러져가는 외딴 초가집 싸리문으로 들어서자 아이가 웃으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

    아이는 아마도 저를 구원자라 생각하고 희망찬 목소리로 뛰어간 것이겠지. 괜스레 미안해진다.

    두화는 아이를 따라 문이라고 볼 수도 없는 구멍 뚫린 작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방 안 기온에 두화는 불안한 마음으로 들어섰다.

    “아주머니, 갑자기 찾아와 죄송해요. 이 아이가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아서… 아주머니?”

    가까이 다가갔지만 작은 움직임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두화는 다급히 방문을 활짝 열었다.

    어두운 내부로 스며든 희미한 햇살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 여인을 유심히 바라봤다. 넝마로 된 강보에 싸인 작은 인영과 앙상한 몰골을 한 여인은, 더는 산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

    두화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싸리문 밖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저 사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울렁거리는 속과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선뜻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심란한 제 마음도 모르고 사내아이는 손을 잡고 중얼거리며 웃고 있었다.

    “얘, 너 이름이 뭐니?”

    마른침을 삼키며 두화는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없어.”

    “이름이 없어?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럼 뭐라고 불렀어?”

    “아버진 원래 없고, 엄마가 늘 아가, 우리 아가… 이렇게 불러줬지.”

    “…그렇구나.”

    아가, 우리 아가.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어요, 아주머니.’

    세상이 살기 어려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두화는 슬픔 속에서도 분노가 치솟았다. 적어도 먹거리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아이가 부모를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화는 아이를 데리고 나와, 부서질 듯 위태로운 마루에 앉아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주었다.

    “음, 누나가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천한 신분이고 배곯는 처지인데도 맑기만 한 아이의 눈동자에 두화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고개를 들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어? 누나 울어?”

    “…미안해.”

    두화는 순간 울컥거린 마음에 아이를 안고 울었다. 한참 그리 울고 난 두화가 결심한 듯 아이의 작은 어깨를 잡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있잖아. 너희 어머니랑 동생은 음… 옥황상제님이 좀 일찍 데려가셨어.”

    “옥황상제님이? 왜?”

    “어머니가 아프셨잖아? 그렇지?”

    “응. 그래도 나만 두고? 그건 싫은데. 나도 데려가라고 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이의 얼굴을 보니 또 목이 메어온다.

    “넌 아직 아니래. 엄마랑 동생은 저기 위에서 네가 나중에… 나중에 올 때까지 기다린대.”

    “정말?”

    “응. 그래서 말인데 갈 곳 없으면, 네가 클 때까지 누나랑 살래?”

    “…그래도 돼?”

    활짝 웃으며 두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금세 두화의 품에 안겨 해맑게 웃었다. 어미와 동생의 죽음이 뭔지 모르니 이럴 수 있지. 만약 조금 더 큰 아이였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했을까?

    두화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일단 움막으로 향하였다.

    뒤에 따라붙은 혹이 있지만, 일단은 이 아이부터 챙겨야 했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자, 뒤따라오던 자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부터는 느껴지지 않았다.

    ‘돌아갔나? 하긴 거지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더러워서 갔겠지. 원래 있는 집 자제들은 신분과 재력으로 사람을 나누는 그런 족속들이잖아. 아까 그 사내도 그런 자들 중 하나였던 거야.’

    괜히 씁쓸해진 마음을 도리질로 내치고, 부친에게 말하기 전 제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막돌이 삼촌에게 아이의 사정을 말하였다.

    굳은 표정의 막돌이는 아이를 보며 금세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들만 보면 20여 년 전, 젊어 정보원으로 뛰던 시절 자신이 구한 그 아이가 잘 지내나 문득문득 궁금하다.

    성라국으로 넘어가는 길에 하늘이 이상하게 변할 그때,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들리는 비명에 뛰어갔더니, 이미 아이를 낳고 여인이 죽은 후였다. 아이를 그대로 두자니 죽을 것이기에 하는 수 없이 데리고 성라국으로 향하였었다.

    ‘귀족 집에 업둥이로 들였으니 잘 컸겠지.’

    이내 생각을 접고, 몇몇 건장한 청년들과 함께 두화가 데려온 아이의 집으로 찾아가 시체를 수습해 산에 묻어 주었다.

    그동안 두화는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별것 없는 나물 찬을 꽁보리밥과 함께 내주어 먹였다. 얼마나 허기졌었는지 아이는 금세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는 잠이 들었다.

    아이의 일을 들었는지 부친이 두화를 찾았다.

    “…아버지. 제가 잘못한 거예요?”

    멋대로 행동하여 아이까지 데려왔다고 꾸중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지, 두화의 목소리가 개미 기어가듯 작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일랑은 그런 두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하였다. 가진 것이 없다 하여 곤경에 처한 아이를 그냥 보냈다면, 분명 닷새 안에 저 아이 또한 제 어미와 동생처럼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겠지. 오늘 넌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부친의 말에 뭔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전력 질주한 듯 마구 뛰어댔다. 기분 좋은 심장 울림에 두화의 얼굴엔 금세 미소가 서렸다.

    움막에서 나와 당장 아이에게 입힐 옷가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언덕길을 오르는데, 강 사이를 잇는 다리 옆 느티나무 아래 아까 본 그 사내가 눈을 감고 기대서있는 것이 아닌가.

    훤칠한 사내가 석양을 뒤로하고 서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넋 놓고 보던 두화가 이내 정신을 차려 도리질을 하고는 기척을 숨기며 뒤로 한 걸음씩 옮겼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뒤로 간다면 네게 내일은 없다.”

    ‘헉! 생긴 것하고 다르게 입은 참 매섭네! 매서워. 별로 든 것도 없는 주머니였구먼, 뭘 또 그리 찾는 거야.’

    “무, 무슨 소리를 그리 살벌하게 하세요? 주머니 가지러 도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아까 그 아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던 터라.”

    “그럼 당장 가지고 와.”

    “네!”

    두화는 뒤돌아 쌩하니 자신의 움막으로 들어가 침상 아래서 주머니를 찾았다.

    다행히 그자의 것은 있었다.

    “와, 이건 그저 가락지만 들어있어서 내가 처분을 안 했나 보네. 어휴, 만약 그 돈주머니 두둑이 들어 있었던 사내였으면 으아, 끔찍하다 끔찍해.”

    겨우 가락지 가지고도 저리 죽일 것 같이 따라다니는데, 그 돈주머니 사내였다면 아마 전 오늘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부친에게 절반 드리고, 사찰에 그 절반을 시주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백성들에게 몰래 나눠주고, 아주 조금 남은 돈으로는 이곳 사람들과 작게 잔치를 하며 하루 배불리 먹었다.

    당연히 남아 있는 돈도 없거니와, 더구나 감히 귀족인 그자의 뺨까지 후려치지 않았던가. 만약 그 돈주머니 임자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저는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겨우 사내의 손에 주머니를 들려주었다.

    “온전히 돌아왔으니 참는 것이다. 행여 앞으로 또다시….”

    “어휴, 절대 나리와는 엮이지 않을 것이니 심려 붙들어 매셔요.”

    다시는 볼 일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고개를 들어 씩 웃어주었다.

    하지만 도헌에게는 그런 두화의 얼굴이 찰나 어이없게도 어여쁘게 보였다. 쏟아지는 황금빛 석양의 빛을 그대로 받은 두화의 얼굴은 어느 여인보다도 고왔다.

    “저, 안 가세요?”

    “이놈, 이젠 겁마저 상실 것이냐?”

    그런데 이 사내, 절 어찌 보고 놈, 놈 그러는 거지?

    물론 주머니를 훔친 것은 잘못했지만, 마구잡이로 묶은 머리와 거적을 걸쳤어도 제 얼굴이 어디 사내로 보이냔 말이지. 제 미모는 당연히 이 도성 안 최고라 자부한다. 그러니 제대로 차려입고 시전에 나서면 이놈, 저놈, 날파리들이 꽤 꼬이는데 눈앞의 사내는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

    “저기, 이놈 저놈 하지 마세요. 이래 봬도 어엿한… 흠.”

    ‘내가 말을 말자.’

    “어엿한 뭐?”

    “아닙니다, 아녜요. 어서 가세요, 나리. 그리고 은혜…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두 번 다시 보지 말자고요.’

    두화는 두 손 모아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부스스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도헌은 발길을 돌려 유유히 사라졌다.

    힐끗 바라본 두화는 완전히 그가 보이지 않을 때, 고개를 들어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혀를 길게 내밀었다.

    “쳇, 이렇게 입어서 그렇지, 내가 어디 가서 꿇릴 미색은 아니거든! 내 어딜 봐서 놈인 게야?”

    툴툴거리며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거기 섰거라!”

    이번엔 낮지만 차가운 음성이 제 발길을 붙잡아 버렸다.

    ‘에이 정말 또 뭐야?’

    찌푸린 인상으로 고개를 홱 돌린 두화는 눈앞의 사내를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검을 든 사내는 딱 봐도 무인이다. 그리고 그 곁에 뒤돌아 뒷짐 지고 있는 또 다른 사내는 무인이 모시는 상전인가?

    “저요?”

    “그래.”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귀족이나 관리에게 괜한 책을 잡혀 발길이 묶일 땐, 첫째로 머리를 긁적이며 재빨리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두화는 머리를 긁적이며 부러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허리를 굽신거렸다.

    ‘내가 저치들의 돈주머니라도 털었었나?’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사람이요?”

    “여인인데… 그러니까.”

    검을 든 사내가 말을 하는데 옆에 있던 상전으로 보이는 자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갓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빤히 저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에 두화는 순간 압도당하는 줄 알았다.

    ‘어휴, 무슨 놈의 눈빛이 저래? 아버지보다 더 무섭잖아. 근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리 노려보는 건데?’

    두화도 노려보는 그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근데 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지?’

    떠오를 듯 말 듯한 기억에 미간을 좁힐 때쯤, 노려보던 상전 사내의 입꼬리가 찰나 위로 올라갔다.

    ‘뭐야? 불길하게 왜 웃는 건데?’

    “찾았군.”

    “…!”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전의 옆에 있던 무인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더니 검으로 두화를 가리킨다.

    “예? 이놈이 그때 그 여인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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