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5)화 (5/96)
  • 05. 인연일까, 악연일까?-1

    늘 진짜 탄일을 숨기고 살아야 하기에, 자한은 탄일의 앞 뒷날은 괜히 짜증 나고 화만 났었다.

    그런데 오늘 아주 잠시 스치듯 만난 그녀 때문에 처음으로 탄일이 즐거웠다.

    ‘그래. 날 즐겁게 해주었으니, 벌이 아닌 상을 내려주마.’

    또 웃는다.

    그런 세자의 의뭉스러운 표정에 사색이 된 맹지의 손길이 빨라진다.

    맹지가 나가고 나자 자한은 붓을 들어 종이 위에 금세 뭔가를 그렸다.

    “사림!”

    “예, 저하.”

    “찾아라.”

    종이를 건네주자 사림의 얼굴이 정색한다.

    “저하, 어찌 얼굴만 보고 찾습니까?”

    “머리는 뒀다 뭐해? 시전에 사람 찾아주는 곳에 돈만 주면 찾아줄 것 아니냐?”

    “…찾아서 벌하시게요?”

    “글쎄다.”

    어딘지 즐거워 보이는 세자의 모습을 뒤로하고, 사림은 당장 오늘부터 초상화의 여인을 찾느라 개고생을 해야 할 판이다.

    ***

    전장에서 돌아오면 또 전장에 출병할 때까진, 달에 한 번씩 사찰에 들러, 돌아가신 모친을 위해 불공을 드린다.

    4월 초파일, 화월국의 큰 행사 중 하나를 맞이한 오늘도 역시 백도헌은 용연사를 찾아, 돌아가신 모친의 영정 앞에서 절을 올렸다.

    불공을 드리고 나면 모친의 옥가락지를 만지며 마음의 평안을 그리곤 하는데, 그 옥가락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무리 가슴을 더듬거려 찾아보고 겉옷을 벗어 털어봐도 없다.

    “분명 나올 때도 확인하였거늘, 이것이 어딜 간 것이야?”

    그러다 문득 시전을 지나오다 부딪쳤던 거지가 떠올랐다.

    천것인데도 순간 향기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을 유심히도 봤더랬다. 비록 그 몰골이 더럽고 천한 신분이지만, 모친처럼 맑고 투명한 눈이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훔쳐 간 도적놈에 불과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모친을 그리워하던 세상 선하고 아련하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도헌은 다음날부터 사병을 이끌고 시전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

    사람이 사람을 찾아주는 인방에 은밀하게 의뢰한 지, 하루 만에 돌아온 답변은 기가 막혔다. 사림은 있는 그대로 고하였다.

    “거지랍니다. 그것도 꽤 유명한 거지던데요.”

    “…?”

    뭔가 잘못 들은 듯, 자한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약한 여인이나 힘없는 상인을 괴롭히는 자들을 보면 그들을 대신해 싸워주고, 또 거리에 부모 없이 돌아다니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한답니다. 워낙 유명해 초상화만 보고도 줄줄 말하더라고요.”

    “해서 사는 곳은?”

    “도성 제일 큰 다리 밑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하아, 차림새가 그러해서 뭐 가진 것은 별로 없어도 귀족 아씨 정도는 되는 줄 알았더니… 우리 저하, 천한 거지한테 봉변을 당하신 거네요.”

    “말… 다 한 것이냐?”

    이를 앙다문 자한의 서늘한 눈빛에, 웃음을 참는듯한 사림은 아차 싶은 얼굴로 조심스레 말하였다.

    “초상화를 보고 처음엔 모르는 듯하더니 자세히 본 몇몇이 거지라 하기에, 소신도 순간 당황하여 이름을 묻지 못했습니다. 다시 가 이름을 알아 올까요?”

    “되었다. 천것의 이름을 알아 무엇할까?”

    ‘거지? 천것이 감히 뉘 얼굴에 손을 대? 이걸 어찌해야 할까?’

    ***

    한편 자신을 뒤쫓는 무리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두화는 다리 밑에서 거하게 잔치를 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초파일이 지난 지 벌써 사흘이다.

    여전히 움막 근처 만개한 불두화가 눈을 즐겁게 해주고, 찔레꽃 향이 근방을 진동한다.

    낡은 침상에 멍하니 앉아있는 두화의 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초파일 날 두화 역시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모친을 위해, 공양도 하고 불공도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높으신 분들의 눈에 띄었다가는 경을 칠 일이었다.

    ‘사흘이나 지났으니까 괜찮겠지.’

    침상 아래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주머니 두 개를 챙겼다. 바로 옆 움막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이거… 보태세요.”

    돈주머니 한 개를 일랑의 앞에 놓았다.

    두둑해 보이는 돈주머니를 바라보는 일랑의 눈빛이 사뭇 사납기만 하다.

    “너, 이 아비 말이 우스운 게냐?”

    그간 여식이 다른 이의 주머니를 털어 가져온 돈만 해도 웬만한 귀족 집 저택 하나는 너끈히 사고도 남을 것이다. 매번 꾸짖어도 여식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도 아버지랑 삼촌들이 하시는 일에 정식으로 끼어 달라고 했잖아요. 매번 졸라야만 따라가는 거 말고요.”

    “그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해야 해? 자칫 잡히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아버지랑 삼촌들은 벌써 10년이나 해 오신 거잖아요. 저도 할 수 있어요. 무예는 뭐 괜히 배웠게요.”

    일자로 다문 일랑의 표정에 두화는 힐끗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우리가 괜히 부패한 귀족들 집을 터는 게 아니잖느냐.”

    “알아요. 그 돈으로 어려운 백성들을 돕는다는 거. 하지만 저도 돕고 싶어요, 아버지.”

    누굴 닮아 저리 소고집인지 모르겠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일랑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비는 널 위험한 곳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두화야.”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비단 백성들만 돕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엔 모두가 공평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천씨 성도 되찾으려고….”

    “쉿!”

    누가 들을세라 일랑의 커다란 손이 두화의 입을 가로막는다.

    그래봐야 다리 밑 거지 소굴에서 아니 화월국 전체 개방 소속 거지 중 현 개방 방주인 그의 과거 존재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데도 일랑은 혹 누가 자신들의 과거 신분을 알아, 그 화가 여식에게 닿을까 늘 노심초사이다.

    화월국이 뒤집혀 모든 것이 바로 잡히는 날, 그날 바로 제 여식이 세상 위로 올라가 당당히 천씨 가문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로 살게 하고 싶다.

    “두화야, 난 네 어미를 떠나보낼 때 약조하였다.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말이다.”

    “전 지금도 아주 행복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얼마나 마음 졸이는 줄 아세요? 차라리 그런 걱정 없이 아버지 곁에서 함께 하면 안 돼요? 네?”

    “너, 이 녀석! 하아… 좋아, 그럼 더는 시전에서 다른 이의 주머니를 털면 안 된다.”

    눈물을 글썽거리던 두화가 일랑의 품에 덥석 안겼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원 녀석도. 헉, 목 졸린다, 두화야.”

    방실방실 웃으며 떨어진 두화가 일랑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 저 다치지 않고 잘 따라다닐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가 다칠 때까지 아비도 그리고 개방 식구들도 그냥 두고 볼 사람은 없다, 이 녀석아.”

    “네. 참, 저 한 시진 뒤에 용연사에 좀 다녀올게요.”

    “…”

    용연사엔 제 어미를 위해 가는 것이겠지.

    일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움막에서 나온 두화는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1년에 몇 번 입지 못하는 고운 의복을 몸에 걸쳤다.

    옷매무새를 다듬던 두화는 순간 저도 모르게 뒷덜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초파일에 만났던 그치들을 또 만나는 일은 없겠지? 그래, 없을 거야. 도성만 해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설마 또 보겠어? 만약 만나면 으으, 그럴 리… 없겠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도 만약 만나면 그건 인연일까, 악연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고 치맛자락을 털었다.

    한 벌 밖에 없는 의복인지라, 며칠 전 돈주머니를 턴 귀족들을 행여나 만날까 기우가 들었다.

    하지만 흙바닥에 널리고 널린 개미보다도 많은 것이 도성 내 사람들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도성과 다른 지역을 오가는 행인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어마어마하다.

    이내 빙긋 웃으며, 준비한 음식을 싼 바구니를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움막을 나섰다.

    언제부터 서 계셨던 걸까?

    부친의 모습에 두화는 괜히 쑥스러운 듯 치마를 털며 다가갔다.

    “조심히 잘 다녀오거라.”

    두화는 조신하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길을 나섰다.

    멀어지는 여식의 뒷모습을 보는 일랑의 눈에 찰나 눈물이 스며든다.

    저리 낡은 의복이라도 여식이 입고 있으니 제 눈엔 천상 귀족 집 여식이 따로 없다. 더 곱고 예쁘게 살 수 있는 여식이건만, 그렇지 못해서 미안하고 억장이 무너진다.

    욕망 때문에 제 가문을 풍비박산 낸 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저리 어여쁜 것을… 내 꼭 앞으로도 그리 어여쁘게 살 수 있게 해주마. 네 어미에게 부끄럽지 않게 약조를 지킬 것이다.”

    ***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두화가 지금은 세간에 잊힌 가문을 대표해서 온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낡은 의복이긴 하나, 귀족 집안의 여식처럼 격식대로 차려입고, 세 개의 위패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한때는 화월국 세 개의 기둥 중 하나라 일컬어지던 가문, 외조부와 장군이었던 큰아버지 그리고 저를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 위패 앞에서 두화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모두 본 적 없으나, 부친에게 늘 들어 그리운 분들이다.

    제사를 지내고 나와서 늘 그렇듯 스님에게 돈주머니를 드렸다.

    주지 스님은 말없이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시며 늘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한결같은 낭자의 그 마음이 훗날 복이 될 겁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스님. 부디 어려운 이들에게 써 주셔요.”

    인사를 한 두화는 주지 스님의 배려로, 자신만이 사용하는 작은 방에 들어가 냉큼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입고 왔던 의복은 보자기에 잘 싸 여미었다.

    “이만 가볼게요, 스님.”

    “조심히 내려가십시오, 낭자.”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두화는 애써 얼굴에 힘을 주어 웃고는 사찰을 내려간다.

    마침 자신의 것을 털어 간 좀도둑을 찾다가, 답답한 마음에 사찰까지 오른 도헌은 막 사찰을 빠져나가는 낯익은 거지를 보았다.

    좀 마른 듯 작은 키에 곱상한 사내 녀석!

    틀림없이 그날 그 녀석이다.

    그런 두화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도헌의 눈빛이 번뜩였다.

    뒤쫓는 도헌의 발걸음이 사뭇 조심스럽다.

    두화는 시전을 지나치며, 여전히 배곯아 동냥질하는 거지와 어린아이를 업고 짚신을 파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엽전을 나누어 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하는 짓이지? 남의 것을 훔쳐서 저보다 못한 자들을 돕는 것인가?’

    그들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다른 이를 돕는 거지가 이상하게 보였다. 마지막 아이에게 주머니를 탈탈 털리자, 주변에서 몰려든 다른 아이들은 더는 엽전을 얻을 수 없다고 보고는 모두 흩어졌다.

    그래도 끝까지 돌아가지 않던 작은 사내아이가 울먹거리자, 두화는 무릎을 굽히고 그 아이의 눈높이에 눈을 맞추었다.

    “미안, 지금은 가진 게 아까 그게 다였어. 혹 어디가 아픈 건 아니지?”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눈물을 멈추진 않았다.

    “울지 마. 사내는 우는 게 아니야.”

    “하지만 동생이… 엄마가 아파.”

    “…어머니가 아프셔?”

    “응, 동생이 생겼는데 엄마가 아파.”

    순간 두화는 뭔가가 울컥하며 무거운 바윗돌이 제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비록 어머니에 대한 어떤 것도 모르지만, 저를 낳고 돌아가신 어머니만 생각하면 이리 목이 멘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지만 어머니란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날 것 같고, 가슴이 아프다.

    지금 이 작은 아이는 제게 세 사람, 아니 두 사람의 목숨을 살려달라 애원하고 있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집이 어디니? 같이 가보자.”

    그때였다.

    누군가 두화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올렸다.

    숨이 `컥` 하고 막혀 목덜미를 잡아 올리는 그 손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그 바람에 곁에 있던 아이가 놀라 멀찍이 떨어져 눈치를 본다.

    “뉘신데 이리 행패입니까? 놔 주세요!”

    “행패?”

    “그럼 다짜고짜 목을 조르는데 그게 행패지 뭡니까? 저 아세요?”

    보이지 않으니 두화는 진심으로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무도 당당한 녀석의 모습에 도헌의 눈빛이 싸늘해진다.

    “너, 내 주머니 어쨌어? 지금이라도 내놓는다면 목숨은 살려주지.”

    “에이, 무슨 주머니요?”

    버둥거리며 빠져나와 보려고 하다가 마주친 눈빛에 두화는 식겁했다. 바로 얼마 전 자신이 훔친 돈주머니의 주인 아니던가.

    “발뺌할 작정이냐? 초파일 날 네 녀석이 내 주머니를 털지 않았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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