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4)화 (4/96)
  • 04. 잡아서 벌이나 줄까나?

    찰나 일어난 일이다.

    근처에 있던 사림도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막지 못하였다.

    더구나 여인의 목소리가 제법 큰지라 지나가는 이들이 한 번씩 힐끔대었다.

    “…!”

    반면 생애 처음 겪어보는 것에 당황하여 자한은 뭐라 반문하지 못하였다. 그저 맞은 뺨이 화끈대어 문지를 뿐이다.

    “하아, 고상한 분인 줄 알았더니, 지나가는 아녀자나 희롱하는 호색한이었네!”

    “아, 아니. 난!”

    “멈춰요!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아녀자 희롱으로 관아에 고할 거에요!”

    여인은 괭이 같은 눈으로 쏘아보며 으름장을 놓더니, 슬금슬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자한은 답답하고 억울하여 뒤쫓으려 하였다.

    보다 못한 사림이 자한을 만류하였다.

    “형님, 가셔야지요.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이거 놓거라. 내가 손목을 잡고 싶어서 잡은 게 아닌데 왜 그렇게… 하아, 그리고 감히 누구 얼굴에 손을!”

    생각하니 아직도 뺨이 얼얼한 것이 아프다. 손이 아주 찰지게 맵다.

    “혀, 형님! 여긴 밖이옵니다.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네?”

    이러다 송월관 구경은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림은 정신을 쏙 빼놓고 튄 괭이 같은 여인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여인을 찾느라 자한은 두리번거렸다. 인파에서 조금 전 그 여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한편 조금 전 주머니를 턴 자가 쫓아 올까 싶어, 황급히 자리를 피한 두화는 옷을 숨겨두었던 숲으로 들어가 평소 입던 누더기로 서둘러 갈아입었다.

    “와, 쫓아오는 줄 알고 식겁했네. 좀 미안하긴 하지만… 아니지. 내 손목 값으로 뺨 한 대면 뭐….”

    이제 거지로 돌아왔으니 저를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입고 있던 의복은 보자기에 잘 싸서 안고 움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서둘렀다.

    인파를 제치고 발길을 서둘던 두화의 앞쪽으로 딱 봐도 부티가 흐르는 귀족 자제가 홀로 오는 것이 아닌가.

    ‘좋았어. 오늘 마지막 손님이다.’

    그의 곁을 지나치매 옆 사람이 민 것처럼 상황을 만들어,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했다. 얼른 떨어져 바닥에 엎드렸다.

    “죄송해요, 나리.”

    “괜찮다. 일어나라.”

    머리 위에서 울리는 기분 좋은 낮은 목소리에 두화는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와, 오늘 아주 그냥 눈이 호강하네. 이 자도 꽤 잘 생겼잖아! 눈매가 날카롭고 번듯한 것이 아까 그자가 범의 기운이라면 이자는 늑대의 기운인걸.’

    내심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처음에 걸렸던 별 볼 일 없는 귀족을 생각하면 혀가 내둘러지지만, 그다음 제 손아귀에 걸린 두 사내는 정말이지 그림의 떡과 같다.

    어쩜 하나같이 훤하고 잘생기고 또 이렇게 감사하게도 묵직한 주머니까지 지니고 계신 건지. 가슴속으로 대박을 외치며 두화는 고개를 꾸벅 조아리고는 냉큼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

    자한과 사림은 그토록 궁금하던 송월관에 발을 들여놨다. 고급스러운 차림새를 훑어 내린 문지기는 안내하는 척 행수를 불렀고, 행수는 그런 자한과 사림을 멀리서 보고는 눈꼬리를 휘며 달려왔다.

    안쪽 별채로 안내받으니, 거나한 상차림이 갖추어졌고 선녀같이 아리따운 기생들이 줄줄이 들어와 자한과 사림의 옆에 앉았다.

    뭔가를 요구하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기생들은 알아서 가야금을 켜고 한 마리 학처럼 유려한 춤사위를 펼쳤다.

    ‘일단은 눈으로 즐기기엔 괜찮은 듯싶군.’

    “나리, 한잔 받으셔요.”

    “흠.”

    술잔을 받아든 자한은 향만 맡은 채 내려놓았다.

    “이곳은 원래 이리 대접을 잘하는 것이냐?”

    “예? 아니지요. 높으신 분이나 귀인분께만 이곳 별채를 내어 드린답니다.”

    순간 자한과 사림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설마하니 자신들의 정체가 이들에게 벌써 발각이 된 것인가?

    하여 이리 대접하는 것인가?

    “한데 나리는 어느 댁 자제분이십니까?”

    “그런 것을 꼭 말해야 하는 것이냐?”

    ‘내 정체를 알고 이리한 게 아니라는 거군.’

    피식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자한을 훑어보며, 기생은 이상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복만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셔서요. 처음 뵙는 귀인이신데 어느 댁 자제분이신지 알아야 추후 더 잘 모시지 않겠습니까?”

    자한은 눈웃음을 치며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기생의 가체를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 거리를 두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 여인에게 뺨을 맞은 뒤부터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제 눈치를 보느라 시무룩한 사림 때문에 결국 기생집까지 들어오긴 했으나, 역시나 분 냄새랑 짙은 사향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다.

    이내 기생의 얼굴이 닿았던 부분을 손으로 털어냈다.

    기생의 얼굴이 순간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사림아, 여긴 뭐 별것 없구나. 분 냄새만 진동하고… 그만 일어나자.”

    하지만 사림은 호화로운 꽃밭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지라 쉽사리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더 있다 갑시다, 형님.”

    자한의 미간이 순간 좁혀들었다가 펴졌다.

    ‘아무래도 너무 편하게 해줬나 보군. 세자 호위라는 녀석이 저리 풀어져서야 원.’

    조금 전까지도 한량처럼 웃던 자한의 얼굴에 서릿발이 내렸다.

    해이해져 술잔을 들이켜던 사림은 그 냉랭한 표정에 식겁하여 사레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흠, 가시지요.”

    여느 사내들과는 너무도 다른 두 사내의 행동에, 기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면경을 들어 자신들의 얼굴과 옷매무새를 살펴봤다.

    화려하고 눈이 부신 의복들 사이로 드러나는 고운 손과 뽀얀 목덜미, 그리고 몇가닥의 귀밑머리와 작고 오밀조밀한 귀에 달린 귀걸이가 송월관의 붉은 등불에 반사되어 반짝이면 뭇 사내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으로 감탄하고, 그다음 손을 넌지시 뻗어 옆에 사람이 있든 없든 닿고 싶어 애가 달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건만, 자한의 곁에서 시중들던 혜화가 삐쭉 입술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내가 매력을 잃었나?”

    그러자 곁에 있던 매화가 얄밉게 말을 한다.

    “이제 뭐 언니도 한물갔나 보오. 나이가 드니 언니를 귀애하던 사내들도 줄어드는 것 같고 이제 어쩌오?”

    기생집 이인자라 할 수 있는 매화의 도발에 혜화가 발끈해 가체를 휘어잡았다.

    “뭐야? 저년이!”

    자한과 사림이 나간 그 방에서는 난데없는 기생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신을 신고 나가려는데, 뒤편에서 행수가 달려온다. 끝까지 잡은 손님은 놓치지 않으려 하는구나, 그리 생각 들어 자한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손님, 왜 더 즐기지 않으시고 그냥 가시옵니까? 우리 아이들이 실수라도 하였습니까?”

    “대접은 융숭하게 잘 받았으나, 소문만큼은 아닌 듯하여 좀 실망하였네.”

    자한의 말에 행수의 눈썹이 삐끗 꿈틀거린다. 도성을 넘어 화월국에서 난다긴다하는 미인들로만 채워진 최고의 기생집이다. 자존심에 금이 간 행수는 심기를 가라앉히고 억지로 웃었다.

    “실망하셨다니 죄송합니다. 다음에 찾아주실 때는 더 고운 아이들로만 대접해 드리지요.”

    “뭐, 또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겠네.”

    몸을 돌려 나가려는 자한의 모습에 행수는 이게 뭔가 싶어 고개가 갸웃거리다가 이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한데 그냥 가시는 겁니까?”

    사림이 자한의 앞쪽으로 다가와 행수가 더는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서며 작게 소리쳤다.

    “어허, 뭣 하는 짓인가?”

    “그러는 나리들께서는 뭣 하는 짓인지요?”

    “뭐라?”

    “고운 꽃과 풍류로 눈과 귀를 즐기셨으면 당연히 대가를 치르고 가셔야지요. 즐길 건 다 즐기시고 이 무슨 생 양아치 같은 짓이옵니까?”

    행수의 직설적인 말에 자한과 사림은 기가 막혀 헛기침하며 무섭게 쳐다봤다. 하지만 행수 또한 이 생활만 근 25년째이다. 별의별 사내를 다 봐왔던 터라 먹고 도망가려는 이런 자들쯤은 문제도 아니다.

    “별채에서 최고의 아이들과 최고의 상으로 한 시진 즐기셨으니 백 냥 되겠습니다.”

    금액에 놀란 자한과 사림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실랑이하는 것이 귀찮아진 자한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허리춤을 뒤지며 행수에게 쓴소리를 했다.

    “별것도 없는데 금액이 백 냥이라. 나중 일은 두렵지 않은가 보군.”

    “설령 나라님께서 오셔도 제 가격 다 주시고 가셔야 하는 곳이 기생집입니다. 바쁘신 듯한데 어여 내시고 가시지요.”

    “줄 테니 기다리게.”

    한데 달려있어야 할 돈주머니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자한은 찾는 척하며 사림에게 눈짓을 줬다.

    “없다.”

    “예? 뭐가요?”

    “돈주머니를 분명 갖고 나왔는데, 없어.”

    “설마 날치기당한 겁니까?”

    “그걸 내 어찌 아느냐? 아무튼 없다. 이제 어찌하냐?”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고, 만에 하나 여기서 세자의 정체가 탄로 나면 이 또한 왕실의 체통을 깎아 먹는 일이니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하아, 내가 정말 저하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습니다.”

    두 사내의 수상쩍은 행동에 행수가 피식 웃더니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얘들아, 여기 공손 있으시다.”

    그 소리에 어디선가 덩치 큰 자들이 방망이를 들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사림은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데, 세자는 그것마저 재미있다는 듯 남 일인 것처럼 구경하고 있다.

    ‘내가 미치지. 이럴 줄 알았어. 놀긴 개뿔!’

    방망이로 위협하며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사림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위로 올렸다.

    “행수는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이리 오만방자하게 구느냐?”

    “누구긴 누구야? 공손이잖아. 너희 둘 다 공짜 손님! 아니야? 돈도 없으면서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어디 귀족 행세를 해? 내 네 놈들을 손보고 나서 관아에 넘길 것이다.”

    “어허, 이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단매에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꿇거라!”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순간 움찔한 행수가 이내 정신을 차려 가까이 다가와, 사림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점점 눈동자가 커졌다. 바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는 뒤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들 조아리거라, 당장!”

    위협하던 덩치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조아렸다.

    고개를 들고 있는 이는 단둘, 사림과 자한뿐이었다. 사림은 냉큼 자한의 손을 잡아 그곳을 빠져나와 무작정 뛰기 시작하였다. 궁 근처에 다다라서야 둘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대관절 뭘 보여줬길래, 오만방자하던 행수가 그리 설설 긴 게야?”

    얼마나 뛰었는지 평소 체력 하나는 자신 있던 자한도 숨이 쉬이 갈무리되지 않았다.

    대답하기조차 힘들어서 사림은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것을 들어 보여주었다.

    유심히 보던 자한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였다.

    “너, 이건!”

    “쉿!”

    감히 세자의 얼굴에 손을 대고도 살길 바랄까. 하지만 사림은 정말 위험할 때 빼고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 자이다.

    “예. 마패입니다. 그것도 모조품.”

    “정녕 죽고 싶은 게냐? 함부로 암행어사를 사칭하다니!”

    “아이고, 누구 때문에 그랬을까요? 그리고 누구 때문에 소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이걸 몸에 지니고 다닐까, 그 생각은 안 하시옵니까?”

    사림이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대든다.

    ‘이리 방자하게 구는데도 밉지 않은 건 정작 중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된단 말이지.’

    자한은 녀석의 이마를 검으로 콩 찧고는 궁으로 들어갔다.

    구시렁거리면서도 사림은 그런 세자의 뒤를 따랐다.

    세자궁으로 돌아와 의복을 갈아입던 자한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만다. 곁에서 의복 갈아입는 걸 돕던 궁녀 맹지가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하, 나가셔서 좋은 것이라도 보셨습니까?”

    “좋은 것이라… 글쎄다. 보긴 봤다만 내 그런 경험은 처음이구나.”

    정숙해 보이고 여린 여인이 돌변하여 사내들을 후려잡는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데 그녀와 부딪쳤을 때, 제가 알고 있는 그 어떤 향이나 최고급 사향보다도 기분 좋은 향을 맡았다.

    여느 여인과는 확연하게 다른 여인의 정체가 자못 궁금하다.

    분명 제 주머니를 털어간 간 큰 도둑도 그 여인일 터인데, 잊을 수 없는 향기를 남기고 사라진 여인에게 당하고 만 자신이 어이가 없다.

    더구나 감히 제 얼굴에 손을 댔다.

    그것도 아주 찰지게 올려붙이고는 자신이 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사라지질 않았던가.

    ‘다시 생각해봐도 기가 막힌단 말이지. 하.’

    재미있고 특별한 경험이긴 하나 이래저래 손버릇이 좋지 못한 여인이 괘씸하다.

    ‘감히 내 얼굴에 손을 대고 주머니까지 털어!’

    그럼 이제 어째야 하나?

    잡으려면 잡을 수 있는데, 잡아서 벌이나 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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