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3)화 (3/96)
  • 03. 첫 만남

    고개를 쭉 내밀어 골목 안쪽을 응시했다.

    “사림아, 저기 연약한 여인 하나를 두고 웬 사내놈들 세 명이 겁박하는구나.”

    “그런데요?”

    저보고 가서 도와주라는 말임을 안 사림의 얼굴엔 짜증이 드러나 있었다. 자한은 불경한 사림의 태도에, 꿀밤으로 응징해 주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아파라, 왜요 또?”

    “네 검 좀 빌리자.”

    남의 검으로 뭘 어쩌시려고요?

    저리 웃으며 말하여도 진짜 세자의 성격을 알고 있는 사림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자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솟았다.

    사고는 세자가 치고 뒷수습은 자기가 해야 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을 뒤로 감추었다.

    “아휴, 됐습니다. 차라리 소신이 하겠습니다.”

    “아, 그럴래?”

    딱 봐도 한주먹 거리도 되지 않는 귀족 나부랭이들이야 겁만 줘도 슬그머니 피할 것이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그런 사림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띤 자한이 뒤를 쫓았다.

    한눈에 봐도 여리여리한 여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두 손을 어찌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모양새에 자한의 눈빛이 바뀌려 했다.

    ‘저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화월국에 존재하다니! 뉘 집 자식들인지 알아내 그 싹부터 잘라낼 것이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림의 손에서 검을 빼앗으려던 찰나!

    “아 놔, 정말! 이런 십장생들이 오늘같이 좋은 날에 단명해 뒤지고 싶나!”

    “이, 이런! 남루한 차림이나 분명 귀족 여식인 줄 알았더니 입이 거친 것을 보아 천한 계집이렷다!”

    여인의 걸쭉한 입담에 옆에 섰던 선비는 손을 들어 삿대질하며 부르르 떨었다.

    “네 이년! 감히 우리가 뉜 줄 알고!”

    “이년? 그런 넌 감히 내가 누군 줄 아냐?”

    찰나였다.

    아주 정성껏 치마 양쪽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두화가 상대들을 향해 싱긋 웃어주더니, 순식간에 발을 들어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한꺼번에 얼굴을 강타당한 세 명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선비들을 내려다보던 두화가 작게 중얼댔다.

    “좀 있어 보여서 맞장구쳐줬더니만, 쥐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어디 더러운 손을 자꾸 들이미는지 원.”

    더는 볼 일 없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발을 한 번 더 들어 올리던 두화가 싸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골목길 끝자락에서 새하얗게 질린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두 사내의 모습에 두 눈을 껌뻑거리던 두화가 천천히 치맛자락을 끌어 내렸다.

    ‘난감하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왜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거야?’

    한데 여기서 봐도 서늘해 보이는 눈매와 짙은 눈썹에 풍골이 준수하기까지 한, 귀한 자태이다.

    ‘저런 자를 털어야 했는데, 웬 속 빈 강정 같은 놈들만 건드려서 원. 괜히 시간만 버렸네.’

    어디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부끄러운 마음과 더불어 털지 못한 귀인을 보려니 저 품속에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그것을 털지 못해 아까워서 죽겠다.

    “아무 일도 아니니 가던 길 가세요. 그럼, 전 이만.”

    새초롬하니 웃으며 인사까지 하고는 사라진다.

    그때까지도 자한과 사림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어리둥절했다.

    “음, 내가 지금 헛것을 본 것이냐? 어디 여인이 속살을 드러내고 어험!”

    “저도 보았사옵니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저자들의 얼굴을 가격하는 것을 말이옵니다.”

    “그렇지, 내가 헛것을 본 건 아닌 게야. 궁금하여 그러는데, 네가 아는 여인 중에도 저리 싸움을 잘하는 여인이 있더냐?”

    “…”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든 사림이 몸을 돌렸다.

    “어허, 어디 웃전보다 먼저 가려 드느냐?”

    “제 나이 여덟 되는 해부터 저하의 곁에 있었사옵니다. 그런 소신이 아는 여인이라고는 세자궁에 있는 궁녀들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사림은 저도 모르게 울분이 솟구쳐 감히 웃전 앞에서 따지고 들었다.

    다른 친우들은 기생집은 기본이요, 알음알음 소개로 여인을 만나 이 좋은 날 뱃놀이도 가고 강가에 가서 고기도 구워 먹는다는데, 저는 늘 성질 더러운 세자 곁만 주야장천 지켜야 한다.

    ‘내 주위에 여인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리 묻는 것은 필시 날 놀리려 하는 게지.’

    사림은 입술을 쭉 내밀며 속으로 신세를 한탄했다.

    “해서 지금 또 토라졌느냐?”

    “허, 제가 무슨 계집입니까? 토라지게?”

    “딱 보니 토라졌네 뭐. 해서 나온 것이잖느냐.”

    “…”

    궁 생활 답답하다고 다음날인 탄일 핑계로 저 좋자고 나와 놓고서는 남 핑계를 대려 하는 뻔뻔한 세자 같으니!

    “자꾸 그리 불경스러운 눈으로 보면 송월관엔 가지 않….”

    “저하!”

    자한의 말을 자른 사림은 충직한 호위무사처럼 재빨리 세자의 뒤로 가서 고개를 숙여 깍듯이 대했다.

    태세 전환이 참 빠르다. 자한은 그런 사림이 늘 귀엽기만 하다. 어려서부터 제 주변에만 있었으니 답답도 하겠거니와, 칼 같은 제 성격을 받아주느라 저런 능청스러움이 생긴 것이겠지. 그의 부친의 성정을 닮았다면 올곧고 우직한 성품으로 크게 되고도 남았을 터인데.

    “저하!”

    “어허, 형님으로 불러라. 송월관에 가서도 그리 부를 터이냐?”

    사림의 눈썹이 흐물거리며 옆으로 늘어졌다. 그리고 그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도 사심이 한가득 실렸다.

    “형님, 가십시다.”

    “그리 좋더냐?”

    “좋다 뿐입니까?”

    “허허, 녀석. 오늘만큼은 길을 아는 네가 앞장서거라.”

    “예. 형님!”

    시원스레 웃으며 가는 그의 뒤를 자한 또한 웃으며 따랐다. 송월관까지는 꽤 거리가 되었다. 가는 도중 수정이란 큰 연못가로 인파가 빼곡하게 둘러섰다.

    “사림아, 이곳에 사람들이 많구나. 뭐 하는 곳이냐?”

    “아, 여긴 수정이라는 연못인데, 오늘이 초파일이니 그것을 길하기 위해 액막이 불꽃놀이라 하여 낙화놀이를 하려고 하나 봅니다.”

    “낙화놀이? 한데 하필 연못가에서 하느냐?”

    “저기 보시면 연못 위로 수십 개의 새끼줄이 엮여 있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잘 보시면 그 아래에 숯가루를 종이에 넣고 봉한 낙화봉을 저리 수천 개를 매답니다. 이제 곧 어두워지면 낙화봉 아래 심지에 불을 붙일 것이옵니다. 그럼, 수천 개의 낙화봉 아래로 불씨들이 꽃비를 떨어뜨리듯 붉은빛을 쏟아냅니다. 그 광경이 아주 장관이지요.”

    자한은 궁에서 화려한 불꽃놀이와 연회를 구경하여도 감흥이 없지만, 저리 평범하다 못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매달려 어떤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이리 사람들이 목매어 기다리나 싶어 궁금은 하다.

    “한데 넌 어찌 그리 잘 아느냐?”

    “궁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초파일에 어머니를 따라 금련사에 들렸다가 꼭 낙화놀이를 보고 갔지요. 어릴 때 일이지만 아직도 그 가슴 벅찬 감동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보고 싶구나. 우리 구경하고 가자꾸나.”

    “예? 하지만… 알겠사옵니다.”

    빨리 송월관에 가고 싶지만, 사림 또한 어릴 때의 추억인 낙화놀이를 보고 싶었다. 자한이 가까이서 잘 볼 수 있도록 길을 트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반 각 정도가 지나자 연못 위로 몇 척의 배가 띄워지고, 낙화봉에 불씨가 붙기 시작하였다. 절반 정도 붙여졌을 때 살랑 부는 바람에, 낙화봉에서 붉은 꽃비가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이 장관인지라 구경하던 여인들의 환호가 터졌다.

    자한도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뭔지 모를 숭고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어느새 낙화봉 전체에 불씨를 붙였다. 그사이 벌써 사위가 캄캄해지자 그 아름다움은 배로 커졌다.

    붉은 꽃비가 우수수 떨어지면, 수면에 비친 그 모습은 또 한 번 반짝이는 수많은 아름다움으로 사방을 빛냈다. 붉은 꽃비 같기도 하고, 붉게 빛나는 수많은 반딧불이 같기도 한 장관은 실로 아름다워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작은 불티들이 한 번에 터지며 이런 아름다움을 보여주는지, 신기하여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이런 아름다움을 어마마마께서도 보셨을까?’

    아름다움에 빠져든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불꽃이 떨어질 때마다 소원을 빌었고, 누군가는 그 위로 소원을 적은 연등을 날리기도 하였다.

    “이제 가자꾸나.”

    “예.”

    북적거리는 인파를 제치고 앞으로 나가던 그때, 풍물 패거리가 지나가며 옆의 누군가와 부딪쳤다.

    훅하고 풍겨오는 고혹적이면서도 은은하고 따뜻한 향기에 자한은 저도 모르게 상대를 내려다봤다. 어두워 잘 몰랐으나, 근처에서 날아오르는 연등으로 인해 잠시나마 불빛이 비치자 아까 사내들을 두들겨 팬 여인이 아니던가.

    “아, 죄송해요. 급히 가다 보니 결례하였어요.”

    “아니요. 다친 곳은 없소이까?”

    “예. 그럼.”

    스쳐 가려는데 부채가 두화의 앞을 가로막는다.

    “잠깐!”

    아이, 놀라라.

    설마 걸렸나?

    어쩌지?

    두화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예?”

    “이거 보았소?”

    반짝이는 낙화봉을 가리키는 자한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둔 두화가 눈을 껌뻑이며 답하였다.

    “아… 예. 지금 보고 있네요.”

    걸린 줄 알고 식겁하였다.

    불꽃이니 뭐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만약 이자가 자신의 주머니가 털린 걸 알게 된다면, 전 여기서 꼼짝없이 관아로 끌려가고 말겠지. 그러기 전에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조급해지는 마음에 한 발 옆으로 가면, 그도 그만큼 가까워졌다.

    “참으로 장관이지 않소?”

    “뭐… 예.”

    한데 사내들은 하여간 다 똑같다.

    ‘아휴, 고운 건 알아서 벌써 이게 몇 번째 사내야.’

    부친에게 걸리지 않으려면 빨리 몇 탕 더 털어 주머니 채워서 가야 하는데, 좀 비켜서지. 왜 자꾸 다가온담!

    “낭자도 혼자요?”

    “…예.”

    이런 날 혼자 다니는 여인네가 뭐 저 혼자인가? 둘러보면 많기만 한데 왜 저한테 들러붙어서… 아니지. 그렇게 따지면 제가 먼저 이자의 품을 털었으니 할 말이 없다.

    “한데… 그 아까… 막!”

    허공에 손을 휘두르는 자한을 보며 두화가 기겁하여 한발 뒤로 물러났다.

    ‘뭐 하는 짓이야?’

    “아, 아까 골목에서 말이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한다.

    “…!”

    ‘뭐야, 아까 날 본 사내가 이자야? 에이, 창피하게… 그나저나 어디서부터 본 거야?’

    한데 아까는 다소 멀어서 그저 훤칠하니 수려하게 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수려한 정도를 넘어 귀태가 흐른다. 다만, 눈매가 좀 차갑다? 아니, 매섭다고나 할까?

    “다친 곳은 없소? 내, 도우려 했으나, 이미 낭자가 그자들을 때려눕힌지라….”

    때려눕혀!

    봤네, 다 봤어. 염병!

    “하하하, 당황스럽게 그 무슨 망측한 말을… 벌레 하나 잡지 못하는 제가 누굴 때려눕힙니까? 누가 들을까 겁나니, 그만하시지요.”

    두화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옅은 미소를 지은 두화의 모습에 자한은 눈길을 거두지 못하였다.

    오밀조밀 작은 이목구비에 초승달 같은 눈썹과 반듯한 이마만으로도 상당한 미인인데, 뺨과 입술마저 복숭앗빛을 닮은 붉은 기운을 띠었다. 무엇보다 말간 눈동자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아닌데… 분명 낭자인 것을 내 보았소. 이 손으로 그자들을….”

    순간 자한은 물끄러미 저를 보던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찰나 자한과 두화의 시선이 서로 얽혔다.

    두화는 지금이 그로부터 빠져나갈 기회라 여겼다.

    평소대로라면 걸쭉한 욕 한 사발 날리고 자리를 벗어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주위에 사람도 많았기에 최대한 성격을 죽여 존대해 주었다. 그리고 이내 손을 들어 올렸다.

    “어멋! 어딜 잡아요, 지금?”

    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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