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2)화 (2/96)
  • 02.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남은 아이들

    다리 밑 움막 안에서 우렁찬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막 인피면구를 벗은 일랑이 움막 안으로 들어섰다.

    “나리, 아이가….”

    “고생했소. 못난 지아비 때문에 고생만 하는구려, 자칫 우리 아이까지….”

    “아닙니다. 그저 나리께서 살아계신 것만 하여도 감사합니다.”

    “부인.”

    일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불과 석 달 전만 하여도 화월국을 떠받는 세 개의 가문 중 하나인 천 가문의 수장으로 명성을 떨쳤었다.

    평소 성품이 좋아 호화로움과 권력만을 누리는 다른 두 가문과 달리 천한 거지조차 굽어살피어, 살아있는 부처라 칭송받기까지 했다. 하나, 좌의정 설변도의 계략에 빠져 천 가문은 하루아침에 멸문지화 당했다.

    자신 하나 죽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회임한 부인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것에 억울하고 분통했다. 만에 하나 제가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것들을 뒤집으리라. 분노에 찬 일랑의 염원을 하늘이 들어 준 것일까!

    처형일 전날 옥에 갇혀 있던 천 가문의 안부인이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일랑도 기절한 채 이틀 만에 다리 밑 쓰러져가는 이 움막에서 깨어났다. 다행히 부인도 곁에 있어 살아있음에 감사하여 눈물을 흘렸다.

    평소 쌓은 덕에 그 은혜를 갚는다고 개방의 제자가 일랑의 인피면구를 쓰고 대신 죽음을 자처했다. 일랑은 자신을 대신해 죽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를 위해,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남의 것을 빼앗고 그 복을 제 것인 양 누리는 너희를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선하고 선망받던 이가 돌아서면 얼마나 무서운지, 일랑은 가슴속에 분노를 한 켜, 한 켜 쌓으며 복수할 날 만을 기다렸다.

    하루아침에 천하디천한 거지가 되었지만, 일랑은 본연이 지닌 올곧고 유한 인품 때문인지 차기 개방 방주로 추대되었다.

    일랑은 좀 더 체계적으로 이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화월국 각지뿐 아니라, 주변국까지 발 빠르게 정보를 모았고, 궁 내 간자까지 심어둘 정도로 조직적이며 방대하게 움직였다.

    그러던 중 하늘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생기자, 늙은 거지의 말 한마디로 일랑은 눈빛을 번뜩거렸다. 그러지 않아도 중전뿐 아니라 대신들의 부인 몇몇이 오늘내일 해산한다는 정보에, 작은 불씨를 댕기러 인피면구를 쓰고 궁에 들어갔다.

    늘 서 있던 자리가 아닌 제일 끝, 눈에 띄지도 않는 자리에 서서 기회를 엿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서기 좋아하는 좌의정의 말에 일랑은 냉큼 기회를 잡았다. 그렇게 일랑은 검이 아닌 혀로 왕과 대신들의 마음에 불안감을 심어놓고 몰래 빠져나왔다.

    하나, 갑작스러운 가문의 몰락으로 회임을 한 부인의 고생이 컸는지, 아이를 낳고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젖을 물리다가 세상을 떴다.

    따사로운 햇살과 밥사발처럼 소담하게 핀 불두화와 어우러진 찔레꽃의 은은한 향기가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는 동시에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부인을 따라가겠소. 우리 아이만큼은 앞으로 기쁨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라고, 밖에 새하얗게 피어있는 두화라 짓겠소. 억울하게도 당장은 성을 붙이진 못하오. 하나, 내 언젠가… 꼭 두화에게 성을 돌려주겠소.”

    부인의 손을 잡고 일랑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어미의 마지막 젖을 빨기 위해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여식을 안으며 작게 불러본다.

    “두화야. 우리 두화, 저 소담스러운 꽃처럼 아무 근심·걱정 없이 살게 해주마. 이 아비가 꼭 그리해줄 것이다.”

    아기는 막 어미를 잃은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제 아비의 손가락을 꼭 쥐어 잡았다.

    ***

    편전을 나온 왕은 중전이 있는 동백궁이 아닌 대전으로 향했다.

    용맹스러운 범과 용이 그려진 벽면에 늘어진 금줄을 당기자, 새카만 복면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제 주인을 맞이한다.

    “명아, 오늘 화월국에 태어난 모든 아이를 은밀하게 자연사로 위장해 전부 죽여라. 도성과 전국의 모든 부, 목, 군, 현의 수장들에게도 파발을 띄워 실행하게 하라.”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왕은 그저 귓가에 울리는 소리대로 하기로 하였다.

    -죽여! 그래야 살아.

    그래, 그 소리가 맞을 것이다. 제 아들의 앞날을 위해 화근이 될 것들은 죽여야 한다. 그래야 한다. 같은 소리가 윙윙 반복적으로 귓가에 들린다.

    “존명!”

    “오늘 태어난 아이는 우리 왕자 하나면 족하다.”

    금세 정적만이 흐르는 침전에 왕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아무리 흉을 불러들인다고 할지라도 갓 태어난 아이들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있다.

    하나, 자그마치 5년이나 기다리던 왕자다. 축복받아 마땅한 날에 괴이한 하늘의 변화 때문에, 왕자의 탄생이 쓸데없는 소문으로 얽혀, 장차 제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때 구설이 돌게 할 수는 없다.

    역병에도 가뭄과 홍수에도 분명 대신들과 천한 백성들은 오늘의 하늘을 떠올리며 왕자를 저주니, 불행이니 하는 말로 옭아매 저들 뜻대로 휘두를 것이다. 왕권이 무너지고 왕가의 존엄이 떨어질 것이다.

    그리 만들 수는 없다.

    왕자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그깟 어린아이 몇천 정도 희생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모든 죄는 과인이 끌어안으면 될 것이야.”

    선득하나 어딘지 괴로운 듯 혼잣말을 한 왕의 시선은 중궁전이 아닌 별궁인 동백궁에 향해 있었다.

    ***

    “두화야, 오늘은 나가지 말아라.”

    “알겠어요, 아버지. 나가지 않고 열심히 서책 보고 있을게요.”

    어쩐지 너무 빨리 수긍하는 여식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하필 오늘 개방의 장로들이 모이는 날이라 방주인 자신이 빠질 수가 없다.

    4월 초파일, 화월국의 가장 큰 절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행사가 열린다. 귀족은 물론 천한 신분의 백성들까지 시전을 지나, 구경하러 산에 오르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더구나 오늘은 여식이 태어난 날이다.

    20년 전 인피 면구를 쓰고 궁에 들어가 자신이 했던 말 때문인지, 왕은 그날 화월국에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죽였다. 정보원에 의하면 그날 태어나 달포 안에 죽은 아이가 모두 444명이라 하였다.

    단 자신의 여식을 포함 세 명의 아이만이 살아남았다. 어린 핏덩이들을 죄 죽이면서 왕자는 살려 둔 것이다.

    가증스러운 왕의 위선에 일랑은 지금도 분노가 치솟는다. 하지만 왕의 살생을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혀였으니, 자신 또한 살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무 관세음보살. 훗날 내 죄는 저승에서 모두 치러야 하겠지.’

    제 세 치 혀로 죽은 아이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그들을 기렸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일봉산까지 가시려면 서두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나가지 않는다고 약조해야 한다.”

    “아이고, 참. 안 나간다니까요. 꼬맹이들 검 잡는 거 알려주고 서책도 읽고, 밖에 불두화 꺾어다가 어머니 영정에 올리고 얌전히 있을게요.”

    “그래, 믿고 다녀오마.”

    비록 낡아 기운 더러운 의복을 걸친 부친이지만 늘 당당함과 기품을 뿜어냈다. 두화는 몇 해 전 자신의 출생과 가문에 대해 들었다.

    다리 밑 거지촌에 살고 있으면서도 부친은 늘 검술과 서책을 가까이하라 가르치셨다. 덕분에 거지 삼촌들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정도의 무예와 검에 능통했고, 계집이긴 하나 과거를 봐도 장원을 따낼 수 있을 정도의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부친은 늘 가문의 명예를 되찾을 때까진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두화는 명예와 복수보다는 제 주위에 배고파 우는 아이들이 먼저였다.

    “아버지도 참. 오늘 같은 날 한탕 제대로 할 수 있는데 뭘 그리 걱정을 하시고. 그럼, 어디 손 좀 풀러 나가 볼까?”

    우두둑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푼 두화가 히죽 웃으며 작은 보따리를 들고 움막을 나섰다.

    ***

    한편 궁 안, 세자궁에서는 세자익위사의 우익위 주사림과 세자 태자한이 문 앞에서 옥신각신한다.

    “아니 되옵니다.”

    “어허, 감히 세자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그래도 아니 되옵니다.”

    “사림아, 내가 세자니라.”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잘 알고 있사옵니다.”

    “네가 모시는 윗전이니라.”

    “그것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벌써 반 시진을 이리 말싸움하고 있다.

    정말 별것도 아닌 것으로 웃전의 심기를 이리 흩트려서야 원.

    자한의 굵은 눈썹이 기분 나쁘다는 듯 꿈틀댔다.

    “웃전의 명을 이리 안 들으니 더는 내 호위무사로 두기 어렵구나.”

    “그리 말씀하셔도 아니 되옵니다. 더구나 오늘은 4월 초파일이라 시전은 물론이고 가는 곳곳마다 인파 때문에 위험하옵니다. 어찌 그리 제 말은 항시 귓등으로도 안 들으려 하십니까?”

    늘 그렇듯 아랫입술이 툭 불거져서는 지친 사림이 먼저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자한은 콧등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사림은 평소 세자의 습관을 아는지라 지금 저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안다. 저를 또 무엇으로 달래려 저러시나. 하나, 마음속으로는 진즉 자포자기한 상태다.

    “아무렴 내가 금련사만 구경하고 오겠느냐? 도성의 제일가는 기생집에도 다녀올 작정이다.”

    “예. 그러시겠… 예?”

    순간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댄다.

    아, 이 두근거림은 과연 놀람인가? 기대인가, 사림 자신도 모르겠다.

    ‘화월국 사내라면 죽기 전, 한 번쯤은 꼭 가봐야 한다는 도성의 송월관을 나도 가 볼 수 있겠구나.’

    결국 두근거림은 기대감이었다.

    사림이 뭘 상상하든 벌써 느른하게 퍼지는 입꼬리와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아서, 자한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럼, 나가는 거다.”

    좀 전과는 달리 비장한 표정으로 사림이 답하였다.

    “예. 소신이 길을 트겠사옵니다.”

    ***

    남루한 차림새이긴 하나 귀족인 듯 보이는 여인이 숲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누구 하나 갑자기 숲에서 나온 이상한 여인을 수상하게 보는 이는 없다.

    마침 웅장하고 깊이 있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산 중턱, 금련사에서부터 산 아래까지 알록달록한 연등의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종소리에 많은 인파가 점심 공양을 먹기 위해 금련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휴, 거지인 나도 안 뛰는데… 이럴 때 보면 꼭 있는 것들이 더하단 말이지. 음.”

    손을 털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두화의 눈에 먹잇감이 포착되었다. 싱긋 웃은 두화의 발걸음이 사뭇 달라졌다.

    한편 궁을 나온 자한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뒷짐을 지고 서서 금련사로 향하는 인파를 바라봤다.

    “저하?”

    “어허, 밖에서는 형님이라 불러라.”

    “…”

    대답하지 않는 사림을 본 자한의 미간이 움찔하며 좁혀졌다.

    “어찌 답이 없느냐?”

    “그것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한 살 더 많습니다, 저하.”

    “…”

    본인이 한 살 더 많은데 왜 형님으로 불러야 하느냐, 뭐 그런 심통이 난 듯한 표정이다. 자한의 눈썹 한쪽이 홱 올라갔다.

    “그럼, 그냥 나리라 불러라. 넌 지금부터 내 종이다.”

    “예? 아니… 전.”

    “시끄럽다. 가자.”

    졸졸 쫓아가매 사림은 그냥 형님으로 불러드린다고 하였으나, 자한은 그까짓 일로 투덕거릴 마음이 없는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탐색하기 바빴다.

    궁을 나온 지 한 시진이 채 못 되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구경도 하고 백성들이 즐기는 떡도 먹어 보았다. 점심 공양 시간도 지났으니 금련사에 몰리던 인파도 많이 빠져나갔을 것이다. 해서 자한은 지금 그리로 향할 참이었다.

    산길로 들어서기 전 골목 안쪽에서 여인의 작은 비명이 들렸다.

    지나가던 자한의 발걸음이 뒤로 후진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