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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월국애사 (1)화 (1/96)
  • 01. 되풀이되는 저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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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군님, 이러지 마세요. 네?”

    온순해 보이기만 하던 샌님 같던 도헌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위험하게 빛났다.

    두화는 뒷걸음치면서도 도헌을 흥분시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했다.

    “이제 널 마냥 바라볼 자신이 없다. 더는 세자가 널 탐하지 못하게 내 여인이 되어 줘. 두화야.”

    점점 가까워지는 도헌을 피하고 싶어도 좁은 방에서는 더는 피할 곳도 없다.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제품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두화는 보통의 여인과는 달랐다.

    도헌의 몸짓을 가볍게 뿌리치곤 그의 팔을 꺾어버렸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모습에 당황했고, 그의 찌푸린 표정에 미안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를 내버려 둔 채 나가려는 두화를 향해, 도헌이 절규하듯 외쳤다.

    “내게 와 제발….”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다 해줄 것이다. 비록 앞으로 숨어 살아야겠지만, 세자와는 다르게 내 곁엔 너만 두고 세상 귀하게 여기며 살 것이다. 하니 두화야! 나와 떠나자 제발, 응?”

    차라리 그가 호색한이어서 유희나 즐기려 그랬다면 미안한 마음이 덜 들 터인데. 저를 향한 그의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미안함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나간다면 이제부턴!”

    “…!”

    “너의 모든 것을 강제로라도 빼앗을 것이다. 마음이 우선이라 생각하였지만, 이젠 널 빼앗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할 것이란 말이다.”

    원망과 집착의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가 다가오던 그 순간, 작은 문이 활짝 열리며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세자, 자한이 검을 들고 서슬 퍼런 눈빛으로 들어섰다.

    “내 여인을 갖기 위해 지금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고 했나, 백도헌?”

    ***

    화월국 467년, 실로 괴이한 해가 아닐 수 없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은 온통 잿빛이 되어 음산함을 풍겼고, 태양마저 푸른빛을 띠니 사람들은 이 해괴한 현상을 구경하려 하나, 둘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를 아는 자라면 감히 잿빛 하늘을 올려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집안의 문과 창을 걸어 닫았다.

    해괴한 자연 현상은 도성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니, 이내 파발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하, 비단 하늘만 이상한 것이 아니옵니다. 저 아래 지방에서는 머리 둘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고, 또 강가에 죽은 물고기가 무수히 떠 있다고 합니다. 당장 법사를 불러 제를 올려서, 더 큰 액운이 닥치기 전에 하늘을 진정시키고, 민심을 안정시켜야 하옵니다.”

    좌의정 설변도의 발언에 대신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가만히 턱수염을 만지던 왕은 발언한 좌의정이 아닌 영의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영의정은 어찌 말이 없는가?”

    모든 이의 주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영의정 백기세는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긴장한 상태라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쏟아냈다.

    “신 또한 이 괴이한 현상에 생각이 많아져서 그만… 송구하옵니다. 전하.”

    거짓이 아니라 정말 생각이 많았다.

    하필 들어도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제발 이곳에 있는 누구도 제가 알고 있는 이상한 소문을 몰랐으면 하는 것이 지금 심정이다.

    ‘하필이면 내자의 진통이 오늘 시작되었는데… 허허, 정녕 하늘이 이 백기세를 버리시려 하는가!’

    그때 누군가의 조용한 목소리가 편전에 울렸다. 듣기 좋은 낮은 음색의 목소리는 금방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하! 신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사온데, 이것이 그냥 넘기기엔 매우 찜찜한지라 고하옵니다.”

    “고하라.”

    처음 보는 듯한 얼굴인데, 그의 직책과 이름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하는 소리에 모두 당황한 듯 놀라 경청할 뿐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잿빛 같은 하늘에, 푸른 태양이 뜰 때 태어난 아이의 운명으로 나라는 길과 흉으로 갈라진다고 전해 내려온다고 하옵니다. 나라의 길이 되는 운명의 아이는 아이의 복이 하늘에 닿아 태평성대를 이루게 하는 반면!”

    “…!”

    “흉이 되는 아이는… 피바람을 몰아온다고 하였나이다. 하여 신이 고서를 찾아본바, 오래전 화월국 103년이 되던 해에도 오늘과 같은 현상이 하늘에 생겼다 하옵니다. 당시 그날에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죽여 후환을 없애라는 국무의 간청을 듣지 않은 왕과 대신들은 훗날 크게 후회했다고 하옵니다.”

    “어찌하여?”

    어쩌면 자신 또한 똑같은 실수를 할지도 모르기에, 미간을 찌푸린 왕은 그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자신의 귀로 들어야 했다.

    “훗날 자란 아이 중 하나가 장군이 되었는데, 공주를 연모하여 혼사를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결국 그 아이가 화월국에 피바람을 몰고 왔었지요. 다행히도 화월국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인 백, 설, 천 세 가문 덕분에 왕실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사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신들은 저들끼리 숙덕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그럼 지금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인 천씨 가문은 이미 석 달 전 멸문지화를 당하였는데, 허허!”

    “천씨 가문의 위세가 높긴 하였으나, 이젠 그 못지않은 가문이 많으니 무에 걱정입니까? 다만 고서에 기록된 내용처럼 안 좋은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영의정은 맞잡은 손에 땀이 진득하니 났다. 계속 불안하던 것이 이것이었다. 소문, 당연히 허튼 소문이라 여겼거늘.

    ‘성군이라 칭송받는 전하께서 설마 부풀려 써진 고사 따위를 믿고, 아이들을 희생시키진 않으시겠지?’

    너른 소매 속에 숨겨져 있어 용케 티는 나지 않았으나, 불안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다.

    “전하, 하여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오늘 이 기이한 일을 해결할 방책은 오직 하나, 나라의 화근이 될 오늘 태어난 모든 아이를… 그 불길한 싹을 없애시옵소서.”

    강하게 주청하는 그 목소리에, 왕의 눈빛이 누구도 모르게 찰나 흔들렸다. 화월국과 민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하나, 화월국을 뒤흔들 화근이, 갓 태어난 어린아이라 하니 마음이 어지럽다.

    선뜻 뭐라 결정짓지 못할 그때 중궁전의 상궁이 다급히 들어왔다.

    ‘설마!’

    중전이 해산하면 알리라 명했던 것이 떠오른 왕은 재빨리 상선에게 상궁을 가까이 데려오라 명하였다.

    헐떡이는 숨을 채 갈무리하지도 못한 상궁의 입가엔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상궁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왕은 이미 짐작하였다. 지금 심각하게 논의 중인 것만 아니라면 기쁜 소식을 이 자리에서 공표하겠지만, 이 기쁨이 오늘만큼은 기쁜 일이 아니기에 꾹 눌러 속으로 삼키었다.

    “과인에게만 들리게 은밀히 말하거라.”

    왕의 말에 상선은 용상 앞 수렴을 내려 그 모습을 차단했다. 상궁은 의아해하면서도 기쁜 소식을 빨리 알리고자 작게 고하였다.

    “중전마마께옵서 왕자님을….”

    “쉿, 되었다.”

    “예?”

    그토록 기다렸던 기쁜 소식에 어찌하여 용안이 차디찬 것인지, 상궁은 순간 목덜미가 쭈뼛거렸다.

    “중전이 오늘 해산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알아서는 아니 될 터.”

    왕의 본디 성정대로라면 이깟 미신 같은 일이 무에 대수냐, 해괴한 일들은 조사하여 철저하게 밝히면 그만이고, 갓 태어난 핏덩이들이 무슨 국운을 결정짓느냐고 소리쳤을 것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귓가에 이명이 들린 듯 내내 윙윙거린다. 불길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왕자의 탄생을 대신들 앞에서 숨기고 만다.

    “저, 전하! 그 말씀은!”

    “왕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본 모든 자를 은밀히 가둬라. 또한 왕자는 내일 태어날 것이다.”

    “…!”

    창백해진 얼굴로 수렴 뒤에서 조심스럽게 나오는 상궁을 영의정은 보고 말았다. 분명 기뻐하며 들어올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더구나 상궁의 뒤를 상선이 뒤따르고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오늘내일 해산하신다더니 설마, 해산을 하신 건가? 한데 상궁의 표정이… 전하께서는 결국 다 죽일 셈이로구나. 그리 결심하신 게야!’

    그때 왕이 옥좌의 손잡이를 내려치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그대들은 더는 이 일을 거론하지 말라.”

    “전하, 하오면 어찌 처리하실 요량이시옵니까?”

    “과인은 짐의 백성을 구할 것이다. 당장 법사를 불러 하늘에 제를 올려 기괴한 기운을 다스리라 하라!”

    근엄한 왕의 명에 대신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편전을 나서며 대신들은 왕을 성군이라 칭송했다. 하지만 영의정만큼은 편전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분명 서늘한 그 눈빛과 함께 상궁의 뒤를 쫓는 상선까지, 더구나 중전의 해산을 숨기는 듯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생각에 빠진 영의정 곁으로 좌의정이 다가왔다.

    “오늘따라 이상하구려.”

    “흠, 뭐가 말이요?”

    “부원군인 내 의견을 늘 묵살하던 분께서 오늘 같은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시니 말입니다.”

    이죽대는 좌의정의 말에도, 영의정은 한시바삐 저택으로 돌아가 부인이 해산했다면 상황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고심이다.

    “좌의정, 오늘은 그대의 말이 옳기에 더는….”

    그러다 문득 편전에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고한 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어찌 말을 하다 마시는 게요?”

    “혹 아까 전하께 소문을 고한 자가 누구입니까? 처음 본 자인데.”

    “아, 그자는… 그러니까, 누구지? 그러게요, 누굴까요? 이 사람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좌의정조차 누군지 모른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지엄한 궁에서 그것도 왕과 대신들이 정사를 논하는 편전에, 감히 쥐새끼처럼 들어와 왕과 대신들을 기만했다. 한데 정말 그자는 누구였을까?

    영의정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에 불안했다. 마치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다.

    서둘러 퇴청하여 저택으로 돌아갔다.

    안채로 뛰어가던 영의정은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응애!”

    우렁찬 소리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안채로 들어간 백기세는 부인을 평생 따른 유모 한 사람만 남기고, 해산을 돕던 종년과 산파를 광으로 끌고 가 가차 없이 베어 버렸다.

    ‘미안하구나. 내 아들이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유모는 듣게. 내 아들은 내일 세상에 나올 것이다. 결코 오늘 태어난 것이 아니야.”

    “대감마님, 어찌하여….”

    “그냥 따르게. 그리고 혹 관군이 들이닥친다면 자넨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 아들을 잘 숨겨야 할 것이야. 내일 동이 틀 때까진 마님의 배가 불러 있어야 하네. 그래야 내 아들도 부인도 그리고 자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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