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 살벌한 부부-63화 (63/63)

63 화

“앉아라.”

훈탁이 소파에 앉아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평소에도 표정이 많지 않았던 시아버지의 얼굴은 어쩐지 오늘따라 더 무섭기만 했다.

혹시 이 결혼이 계약 후 끝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앞으로 쭉 이어가야 할 결혼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는 걸까?

수빈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훈탁이 어렵긴 했어도, 무섭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어쩐지 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수빈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거냐? 병원은 다녀왔고?”

“네.,,

예준이 곧장 대답했다.

수빈은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에 말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떨림이 멎을 정도로 단단한 예준의 눈빛이 걱정 말라며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망설임 없는 그의 대답에 훈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만……, 부부인 척 지내려던 거 아니었냐?”

“그랬죠.”

“그런데 임신이라니.”

훈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생각인 게냐, 둘이.”

듣는 예준과 수빈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걱정이 됐을 법한 질문이었지만, 사실 훈탁은 두 사람이 지금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거였다.

그에 예준은 맞잡은 수빈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올곧은 시선으로 훈탁을 바라보았다.

“저희 헤어지지 않을겁니다.”

“실수로 생긴 아이 아니고, 정말 사랑해서 생긴 아이예요.”

예준의 말에 내내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훈탁은 한동안 말없이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더 니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표정을 풀기 시작했다.

“하아.”

세상에 무서울 거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던 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 같은 게 흘러나왔다.

그걸 들은 예준은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행이구나.”

“네?”

“정말다행이야.”

훈탁은 말했다.

본인의 잘못된 욕심으로 두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은 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고.

자신에게도 죄책감이라는 게 있는 줄 몰랐는데,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던 집구석에 애정이 생기기 시작하니, 그제야 자신의 이기심과 무심함이 얼마나 가족들에게 상처였던지 알 수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이 집에서 제일 잘못하고 있던 건…… 바로, 나였을지도 모르겠구나.”

훈탁에게 있어서 그의 인생에 의미라는 걸 갖고 존재하는 건 오롯이 일과 부모님뿐이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저 어머니인 애자에 대한 연민을 일에 대한 집착으로 풀며 살아왔을 뿐이다.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은 위태로운 가정환경

속에서 악착같이 자식들을 키워낸 애자를 훈탁은 자신이 보필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결혼은 그냥 필요에 의한 거였다. 적당히 선봐서 한 결혼이 었고, 애정은커 녕 노력도 없었으니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지. 이혼후 너희 엄마와재혼했지만, 어쩐지 이후에도 아이는 쉬이 들어서질 않더구나.”

훈탁은 덤덤하게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소정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제일 먼저 안 건 애자였고, 그녀의 강력한 추진으로 아이를 입양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그 아이가 바로 예준이 너였다.”

아이가 죄가 있겠냐만은 사실 달갑지는 않았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제 오卜서 생각해보니 예준은 물론이고 예훈과 예나에게도 좋은 아빠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물론 아내인 소정에게조차 자신은 좋은 남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도 효자라는 자부심은 있었는데, 요즘엔 그마저도 모르겠더구나.”

바쁘다는 핑계, 나는 할 만큼 했다는 핑계 속에서 그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외 면하고 살았다 고백했다. 살아지니 사는 거였지 사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그런데 수빈이 오고 난 이후에 집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작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이상 불편하지 만은 않은 것에서부터 였다.

그 이후로 조금씩 대화가 늘고, 웃을 일이 생기고…….

자신을 마주하면 늘 긴장한 얼굴로 피하기 바빴던 식구들은 사적인 대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계약직으로 온 며느리는 일을 잘하는 거 였는지는 몰라도 무척이 나 싹싹했고, 늘 사랑이 넘치는 아이였다. 지은 죄가 많아 욕심 내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저 아이가 진짜 내 며느리면 좋겠다 싶었다.

“과찬이세요, 아버님.”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수빈이 건넨 말에 예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원래 사람 보는 안목이 좀 뛰어납니다.”

그의 농담 아닌 농담에 훈탁이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목이 뛰어난 네가 보기에 아비는 어떤 사람이더냐.”

“무덤을 파시네요.”

“뭐라?”

칼 같은 아들의 대꾸에 훈탁이 실소했다.

그러자 뒤늦게 그를 따라 옅은 웃음을 흘리던 예준이 다시 대답을 이었다.

“아버지 얘기를 들으니, 그냥…… 그동안 아버지가 살아오신 날들이 저만큼이나 외로우셨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예준의 말을 훈탁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들을 보면 이따금씩 젊은 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을 위해 지독히도 외로운 삶을 버 텨왔을지도 모른다고.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해……정말 미안하다. 예준아.”

훈탁이 사과를 건넸다.

예준은 낯선 훈탁의 모습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 었다.

침묵을 깬 건 수빈이었다.

“아버님……

제 손등 위로 포개진 그녀의 작고 하얀 손등을 물끄러 미 바라보던 훈탁이 옅은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수빈이 너한테도 미안하게 됐다. 고마운 게 참 많고.”

“아니에요.”

수빈은 예준의 손을 잡으며 훈탁에게 부탁했다.

“지난 일에 아쉬웠던 일은 앞으로 채울 수 있도록, 저희가 더 잘할게요.”

수빈은 가지고 온 초음파 사진을 내밀었다.

“태어날 아버님 손주랑 같이요.”

훈탁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했다.

그의 눈가가 습윤해졌다.

“고생했다. 고맙구나.”

마지 막으로 소식을 전한 건 애자였다.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바람에 어쩐지 집안은 한바탕 초상이 라도 겪은 것처 럼 울음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바라던 건, 예준의 결혼이 아니라 그의 행복이었다고.

애자의 주름진 손이 예준의 손을 잡았다.

“우리 예준이 정말 행복해 보이는구나.

다행이다.정말다행이야.”

가는 팔이 예준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뼈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여린 어깨 위로 예준의 이마가 떨어졌다.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내 금쪽같은 손주.

누가 뭐래도 너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 첫 손주이자, 소중한 가족이라고.

“아니에요 할머니 저 충분히

사랑해주셨어요.”

애자가 아니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차갑거나, 무관심할 때조차 유일하게 온정을 베풀었던 그녀의 사랑은 예준을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 니까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증손주보셔야죠.”

예준은 결국 애자의 어깨에서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인간이 누구나 죽는 걸 안다고 해서, 소중했던 사람이 떠나간다는 사실이 견디기 쉬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준에게도 그랬다.

애자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울지 마라, 우리 손자.”

처음으로 감정을 격하게 터트린 예준의 눈물을 주름진 손등으로 훔치 던 애자는 그의 너른 등을 다독였다.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는 걸 보면 모르느냐?”

“oWr흐. ”

---1 .

“내 약속하나 하마.”

힘겹게 말을 잇는 애자의 말에 예준은 턱 끝으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고개를 끄덕 였다.

“우리 증손주 만날 때까지, 이 할미 꼭

살아있을 테니, 울지 마라.”

기쁜 날이잖니.

나는 네가 앞으로도 매일 웃는 일만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단다.

* * *

“자기야, 준비 다 했어?”

“응! 지금 나가.”

수빈의 물음에 예준이 부랴부랴 재킷을 걸치며 뛰어나왔다.

오늘은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수빈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있는 예준의 손바닥은 띰一이 흥건했다.

얼굴에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떨려?”

“어.,,

“얼마큼?,,

“내가 전학 갔을 때, 그 반에서 제일 예쁜 애 옆자리에 앉게 된 날만큼.”

예준이 고개를 돌리 며 조금 웃었다.

이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능글맞게 농담을 건넬 줄도 알게 되었다.

칭찬은 임산부도 춤추게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아는 모범생 남편이었다.

태명은 축복이었다.

“축복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들이든 딸이든 다 좋아. 건강하게만

태어났으면 좋겠어.”

예준의 말에 수빈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왜?’,

“너한테 같이 목욕도 다니고, 축구도 할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수빈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던 예준이 말을 이었다.

“그럼 난 딸.”

“왜?’,

“너랑 같이 쇼핑도 다니고, 입이 아프도록 수다도 떨어줄 줄 아는 친구였으면 해서.”

“괜찮아. 아들이랑 쇼핑도 다니고, 수다도 떨면 되니까.”

끙.

딸이랑 같이 목욕도 다니고, 축구도 하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예준은 그쯤에서 수긍을 해야했다.

“그래.”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역시 아들이 좋겠다……

나 없을 땐 걔가 널 지켜줄 테니까.

두 사람은 다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꼭 주며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상냥하게 부부를 맞아주었다.

“아빠도 같이 오셨네요? 축복이 너무 좋아하겠다.”

배 위를 오가는 의사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크기를 보니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자, 축복아. 준비 됐지? 우리 힘차게 심장 소리 들려주자.”

그리고 곧 모니터 속 그래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

“어이쿠. 우렁차기도 해라.”

의사의 말에 수빈과 예준의 눈도 동그래졌다.

저 작은 몸에서 이렇게나 우렁찬 심장 소리라니.

그 힘찬 생명의 울림이 마치 '아빠, 엄마!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 오는 것처럼 느껴져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쿵쿵쿵…….

아기의 작지만 선명한 심장박동이 두 사람의 가슴 속에 큰 울림이 되어 번졌다.

그 작은 울림 이 주는 감동은 이로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만 했다.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벅찬 감동이었다.

“……고마워.”

예준은 고개를 숙여 수빈의 이마에 깊게 입을 맞추고는, 모니터 속 콩알만 한 아기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쿵쿵쿵 울리는 아이의 심장 소리를 따라 두근두근, 그의 심장도 뛰어댔다.

“안녕, 축복아.”

예준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 인사를 건넸다.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너를 만나는 순간 거짓말처럼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예준은 확신했다.

자신은 이렇게 또 한 번 사랑에 빠지고 말 거라는 걸.

내가,……아빠가 됐다.

외전

“엄마. 나 진짜 너무힘들어 .엄마도 나 가졌을때, 이랬어?”

[나는 두 달 동안 밥 냄새도 못 맡아서 종일 귤만 끼고 살았어. 오죽하면 너희 아빠가 노란 애 나온다고 걱정을 다 했다니까기

정남이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니, 우리 딸. 그런 것까지 날 꼭 닮아가지고』

하루하루 입덧 때문에 고역스러운 날들을 견디고 있는 수빈이었다.

말 그대로 정말 견뎌내고 있다는 표현이 맞았다.

[엄마 되는 게 보통이 아니지? 그래도 아기가 잘 크고 있다는 증거야. 조금만 참아보卜. 엄마가

다음 주쯤 한번 올라갈게』

가게도 바쁜데 뭘 오냐고 하고 싶은데.

“엄마, 빨리 오卜. 너무 보고싶어…… 못 이긴 척, 진심을 털어놔버렸다.

방훈은 수빈의 임신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다가도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운지 매일 밤 남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우리 공주 힘들어서 어떡……

찰싹!

“아야!”

“나 임신했을 때나 좀 우는 시늉이라도

해보지 그랬어. 어?”

남편의 청승에 정남은 정신 차리라며 등짝을 갈겨주고는 호쾌하게 웃어 젖혔다.

유쾌한 통화를 마친 수빈은 접시에 놓인 배를 집어 베어 물었다.

임신 후, 어지간한 음식은 도통 먹지를 못해 과일 만 달고 사는 중이었다.

“배 하나 더 깎아줄까?”

예준은 그런 그녀를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중이 었고.

“아니 괜찮아.”

“아직도 속 많이 안좋아?”

“。99

O-.

“어떻게 안 좋은데? 아픈가? 아니면 막 멀미나는 것처럼 토할 거 같고그래?”

궁금한 게 남아진 남편은 덩달아 말이 많아졌다.

수빈은 그런 남편에게 생생한 입덧의 느낌을 전해주기로 했다.

“음…… 그러니까 이게, 술 잔뜩 먹고 다음날 술병 난 상태에서 롤러코스터 랑 바이킹을 종일 타는 느낌이라고 하면 좀 와닿으려나?”

술병은 길어봤자 하루요, 놀이기구는 내릴 수라도 있지.

이건 뭐 답도 없다.

그런데 찰떡같이 설명을 해놔도 예준은 도통 모르겠다는 눈치 다.

술이 떡이 되도록 먹어본 적이 없으니, 술병이란 걸 겪어봤어야지.

게다가, 놀이기구?

그런 거 타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하지만 예준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이 며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어쨌든 엄마가 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옆에서 지켜만 봐도 알수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보(시원한 수건으로 입이랑 코를 좀 대고 있으면 나을지도 몰라.”

그는 집에 있는 동안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움직이는 예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빈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예준은 겪어본 적이 없어 어떤 아빠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수빈은

그가좋은 아빠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 물수건. 이거 코에 좀 대고 있어봐.”

“자기야.”

수빈은 가져온 물수건은 받을 생각도 않고, 빤히 예준을 올려다본다.

“왜? 뭐 다른 거 가져다줄까?”

“아니.,,

“그럼,,

“그냥. 한번 불러보고 싶었어.”

“너무고마워서.”

수빈은 진심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나랑축복이 이렇게 행복하게 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들어 가벼운 입 맞춤을 했다.

“사랑해.”

밤낮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이제 어색하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살며시 입술을 포갰다.

“나도사랑해.”

행복을 머금은 잔잔한 웃음이 입가에 걸린 채, 그가 말했다.

고백은 예준에게도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시가 식구들은 역할을 나눠 수빈이 마음 편히 태교를 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했다.

입덧이 끝난 수빈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불러오고 있었다.

“나 어떡해. 이제 자기보다 몸무게 더 나갈 것 같아.”

수빈의 울먹임에 예준이 그녀의 배 위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웃었다.

“괜찮아. 그래도 예뻐.”

“아기 낳고 나면 살도 쳐지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진대.”

“그래도 예쁠 거 같은데?”

“아, 무조건 예쁘다고 하면 어떡해!”

“무조건 예쁠 거 같은데 어떡해, 그럼.”

“진심이야.”

제 마음을 좀 알아달라는 듯 예준은 수빈의 눈을 똑바로 쳐 다보며 웃었다.

충분히 와닿는 진심에 수빈도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준은 수빈의 배에 살짝 고개를 내린 뒤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축복아. 엄마 너무 고생시키지 말고 나오上 알았지?”

아기는 아빠의 목소리를 더 좋아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과학적 근거 따위 모르겠지만, 예준은 그 말을 맹목적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 아기에게 대화를 하듯 말을 걸어주고, 사랑한다고 해주었다.

그렇게 넘치는 아빠의 사랑 고백을 매일매일 듣던 축복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듬해, 봄 제주도.

“아유, 너무 잘 나왔다! 살 쪘다고 툴툴대더니 배만 나왔네!”

“그러게. 임산부는 무슨! 오늘 시집가는 새색시 같다. 우리 딸!”

정 남과 방훈은 수빈의 만삭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준은 예전에 야외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던 수빈의 말을 기억했다가, 정남과 방훈이 사는

집 앞 마당을 꾸며 리마인드 웨딩콘셉트로 수빈의 만삭 기 념 촬영을 준비해주었다.

비록 배는 나왔지만, 턱시도와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두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새로운 인생의 2막을 시작하는 신혼부부 같았다.

바람에 날리는 수빈의 기다란 면사포와 드레스.

자연스럽게 흩날리는 두 사람의 머리카락.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하늘 돌담과 색색의 꽃과 풀을 배경으로 찍은 만삭 사진은 두 사람의 집은 물론 시가와 처가에도 대문짝만하게 걸려 그 존재감을 뽐냈다.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축복이를 만날 날이 조금씩 가까워졌고, 그 해 여름.

마침내 모두의 기다림과 사랑속에……, “응애애! 응애!”

우렁찬 울음소리를 터트리 던 아기는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서린아.”

“우우!”

“어이구, 그래. 이 증조할미가 보이니?”

애자는 침대에 누워 고사리 같은 아기의 손을 꼭 잡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아기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6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애자는 벌써 1 년이 넘도록 여전히 가족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처음 계춘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식구들이 받았던 충격은 말도 못했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 던 계춘은 애써 웃었었다.

“제일 미웠던 사람부터 차례로 잊힌다고 하더이다.”

축축해진 눈가를 연신 훔치며 그가 말했다.

“젊었을 때 고생시켜 미안했네.”

나중에 정신이 돌아온 애자가 그 말을 듣고 참 많이 울었었다.

계춘도 그녀를 따라 울며 투박한 손으로 연신 아내의 눈가를 훔쳤다.

“울지 마오 내가 자네를 기억하는데 무에 대수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식구들은 그렇게 조금은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애자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할무니 힘내세요 우우!”

수빈이 6개월이 된 아기의 손을 잡고 흔들며 애자의 곁에서 재잘거렸다.

아기를 안을 힘은 없었지만, 애자는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매일 아기의 앞날을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님.,,

늘 누워만 있던 애자가 휠체어에 앉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언제의 날처럼.

그녀의 곁엔 등이 굽어 한껏 작아진 계춘이 함께였다.

두 사람은 낙하하는 태양이 만들어 내는 붉은 노을을 오래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애자는 고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아주 편안히 웃는 얼굴로 가족들의 곁을 떠났다.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 번은 더 준비한 이별이었는데도 쉽지 않았다.

결국 계춘을 제외한 모두가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보. 내가 가더라도 울지 마오 너무 빨리 오지도 마시고, 천천히 오시오.'

계춘이 끝까지 울지 않았던 건 애자가 했던 말때문이었다.

'나는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소, 이제.'

'언제나 사랑하며 사시오, 영감.,

애자의 장례가 치러지고, 몇 달이 지났다.

우려했던 것처럼 집안에 그늘은 없었다.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갔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나날이 튼튼해져 갔으니까.

봄이 오자 마당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가 피었다.

계춘은 애자가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을 터트렸다.

왜 조금 더 일찍 서로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까.

우리는 왜 영원히 살 것처럼 우매하게 젊음을 흘려보냈을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더니, 올봄엔 꽃이 되어 왔구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당엔 이름 모를 꽃이 피거나 나비가 날아들고, 새가 날아들었다.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듯 스쳐지나갈 때면, 모두는 온정 많던 애자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를 추억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사랑은 모두의 마음속에 저 마다의 꽃을 피우게 했다.

“아바, 아빠빠.”

“수, 수빈아! 자기야! 여보!”

딸 서린의 옹알이에 예준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서린이가 나보고 아빠라고 했어! 얘 완전 천재인가 보H 어떡해?”

아빠가 된 예준은 바보가 되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딸 바보가.

“그러게, 우리 딸. 누굴 닮아 이렇게 똑똑한가? 아빠를 닮았나?”

책을 읽고 있던 수빈이 얼른 아기 방으로 달려와 다정하게 예준에게 팔짱을 끼고 서린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했듯 예준은 좋은 남편이 되어주었고, 백 점을 줘도 부족한 만점 아빠가 되어주었다.

새벽잠이 없는 딸아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잠 한숨 제대로 못자면서도 짜증 한번 내는 법이 없었고, 향수와 로션 대신 아기의 침을 바르고 살면서도 나사 빠진 사람처럼 웃기만 했다.

귀한 딸 엉덩이라도 짓무를까 새벽에도 수시로 기저귀를 확인하는 일과 아직 말도 못 하는 아기와 매일 잠들기 전까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게 그의 퇴근 후 일상이었다.

“서린아. 넌 내 딸이지만 진짜 좋겄!다. 이런 아빠가 너희 아빠라서. 너도 좋지? 나중에 커서 유치원이나 학교 가도 인기 캡짱일 걸?”

엄지를 추켜세우는 수빈을 예준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결같이 그를 미소 짓게 했다.

예나와 예훈은 조카 바보가 되고, 양가 어르신들은 손주 바보가 되었다.

가족은 모두 단체로 매일 헤픈 웃음을 흘리 면서도, 마냥 좋기만 한 바보 단체가 되고 말았다.

훈탁이 예준의 하나뿐인 돌 사진을 가지고 와서 서린의 사진을 번갈아보며 비교했다.

“예준이 어릴 때랑 꼭 닮았는데?”

“어머. 저희 집에서는 저 닮았다고 하던데요, 아버님?”

수빈이 항변했지만, 훈탁은 썩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었다.

“음. 그래도 내가 봤을 땐 우리 예준이를 좀 더 닮은 거 같은데……

가장 많은 변화를 일으킨 건 훈탁이었다.

그는 조금씩 팔이 안으로 굽는, 피보다 진한 사랑으로 아들을 대하고 있었다.

“언니! 서린이는 우리가 보고 있을 테니까 오빠랑 나가서 데이트 좀 하고 와요.”

예나가 서린을 안아들자, 예훈은 이제 자기도 좀 안아보자며 동생을 들볶았다.

“그럴까?”

동생들이 그러든 말든, 예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섰다.

그러자 소정이 부리나케 그의 외투를 챙겨들었다.

“예준아 너, 그러고 나가면 감기 걸린다? 가장이 아프면 안 되지!”

“괜찮아요, 제가 애도 아니고.”

아직은 소정의 손길이 어색했는지 예준이 괜히 외투 자락을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너 늙어도 애거든? 어미 마음이 다 똑같지.”

소정은 타박을 주고는 또다시 잰걸음으로 돌아가 서린을 안아들었다.

예나는 방금 안았는데 왜 또 빼앗아 가냐며 앙탈을 부렸다.

그 모습에 수빈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린 나가자, 그만.”

예준이 수빈의 손을 잡아 제 외투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추운 겨울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그래서 더욱 서로의 온기가 소중했다.

그리고 수빈은 여전히 예준의 햇살이고, 꽃이었으며, 살아가는 이유였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예준이 입을 열었다.

“안 추워? 그냥 집에 들어갈까?”

“아니.”

수빈이 더욱 바짝 몸을 붙이며 팔짱을 꼭 꼈다.

“이렇게 하면 완전 따듯하거든. 하나도 안 추워.”

사랑스럽게 웃는 그녀의 얼굴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사랑을 고백하게 했다.

“수빈아,,

호칭은 여보나 자기가 된지 오래였지만, 예준은 가끔 이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44그냥 불러보고 싶어서.”

이유 없이 그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서린을 낳고그해, 첫눈이 내리던 날.

두 사람은 입을 맞추며 맹세했다.

우리 행복하자.

더 이상누구에게도 상처받지 말고,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어리석게 살지도 말고,

매일매일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달콤 살벌한 부부》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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