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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60화 (60/63)

60 화

다음 날.

이상하게 눈이 일찍 떠진 아침이었다.

여기저기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려, 밤새 여러 번 뒤척였던 이유 때문인 것같기도 하다.

수빈은 자신의 어깨를 꽉 끌어안은 채 깊이 잠든 예준의 품을 조심히 벗어났다.

늘 텅 빈 운동장처럼 넓게만 느껴지던 침대가 예준으로 인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수빈의 입술 사이로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피곤했는지 그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처럼 깊이 잠들어있었다.

“……그럴 만도 해.”

바닥엔 격했던 어젯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입고 있던 잠자리 날개는 저만치 날아가 화장대 의자에 걸쳐져 있었고, 속옷이며 옷가지가 사방으로 날아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정신이 멀쩡해지니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아. 민망해. 어제 소리는 왜 그렇게 질렀는지. 앙앙대던 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니 얼굴이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수빈은 고개를 내려 괜히 예준을 흘겨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예준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능력자일 줄이야.

제 심장을 몇 번이나 뚝뚝 떨어트리던 어젯밤 그의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정말 어떻게 숨기고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

그런데 그때, 살짝 눈을 뜬 예준과 눈이 마주쳐버 리고 말았다.

“뭐가나 때문이야?”

잠이 가득 묻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 다보던 예준이 순식간에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제 품으로 끌어 안았다.

“아앗!”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수빈이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포박되었다.

예준이 눈을 감은 채 푹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

“。n

품에 갇힌 수빈이 조그만 머리통을 끄덕였다.

손을 뻗은 예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뿐히 쓸어 넘긴 두I, 드러난 동그란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어제……:

“어제 뭐?”

“굉장하더라……

그가 허공에 엄지를 척 치켜들고는 흔들었다.

수빈은 사실 굉장함으로 따지자면, 예준을 스승으로 모셔야 할 판이 라고 생각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자신은 원석이었고 예준은 그것을 다듬고 길들여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석공이 랄까.

아무튼 그랬다.

“흥!”

하지만 부끄러운 일엔 외려 뻔뻔하게 나가는 게 답이라 수빈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외쳤다.

“나의 굉장함을 몸소 체험하다니. 영광인 줄 알아라.”

그녀의 뻔뻔하고 귀여운 자신감에 예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내가 여자로 보이나 보지? 너도 취향이라는 게 있다며?”

“내 취향은 오래전부터 너였어.”

덤덤히 흘러나오는 말치고는 참 달콤한 말이었던지라, 수빈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야했다.

“외면하는 나도 힘들었으니까, 좀 봐주라. 미안해.”

그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사과를 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 쪽, 하고 짧은 베이비키스를 나누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수가 있다니.

철천지원수 같았던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나 좋아할 수가 있다니 .

“지예준.”

“응, 말해.”

그가 중얼거리자.

“……사랑해.”

한참 뒤에 수빈이 대답했다.

생뚱맞았지만, 솔직한 표현이었다.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냥 너무너무 네가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뱉어버리고 말아버린 말.

마음이 이제는 그래도 된다고 그녀를 쿡쿡 찔러댄 것이다.

미동도 없이 감겨있던 예준의 눈이 떠졌다.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그 때문에 조금 민망해지려 던 찰나, 예준이 수빈의 뺨을 가만히 쓸다가 물었다.

“이거 꿈이야?”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꿈아니야.”

그녀의 말에 또 다시 침묵하던 예준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섰다.

천천히 다가온 그가 다시 깊게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나 역시도 널 사랑한다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온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러모로 그녀는 대단했다.

수빈의 따듯하고 솔직한 성정은 이길 수가 없어, 그녀에게 매번 몸도 마음도 항복을 해버리고 만다.

예준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을 돌렸다.

“호칭은 역시 자기나 여보가 낫겠다. 이름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편이 나을 거 같아.,,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화답했다.

“동감이야, 여봉.”

바로 여보, 자기 하기는 조금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장난을 쳤다.

그녀는 자신에게 사랑이 나 고백 따위를 강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묵묵히 기다려 줄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

조용히 미소 짓던 예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오늘 회사 쨀까?”

“째고 뭐하게?”

“그냥지쳐 쓰러질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의 눈빛이 또 다시 그윽해졌다.

“사랑하게.”

* * *

물 흐르듯 시간이 흘렀다. 날씨는 제법 서늘해졌고, 예준이 유럽으로 출장을 떠난 지 닷새 째였다.

가까운 곳이었다면 수빈을 데리고 갔을 텐데, 제법 빽빽한 일정에 체류 기간도 긴

출장이 될 것 같아 예준은 홀로 떠나야했다.

“어머님. 저 왔어요.”

수빈은 늘 그렇듯 시가 식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언니, 왔어요?”

예나는 이제 수빈을 졸졸 따라다닐 만큼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다음 쉬는 날 언제예요?〈그대 곁에 잠들다 > 개봉했대요. 빨리 보러 가요.”

“아, 정말? 벌써 개봉했구나. 그래요, 아가씨. 주말에 가요.”

“오예! 예약해놓을게요!”

예나는 신이 나서 손을 흔들고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부쩍 밝아진 그녀는 근래 마음이 꼭 맞는 단짝 친구가 생겼다며, 수빈에게 자랑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건 언니니 질투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아직은 수빈과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다니는 걸, 예나는 제일 좋아했다.

“오셨어요?”

“네,도련님 작업은 잘되세요?”

“네, 뭐.완성되면 보여드릴게요.”

낯을 많이 가리던 예훈도 스스럼없이 수빈을 대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관심사가 통해서인지 그림을 그려도 제일 먼저 수빈을 보여주기 일쑤였고, 특히〈K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외계인이라도 보듯 했지만, 더 이상 눈치를 보는 일은 없었다.

예훈 역시 웃는 일이 잦아졌고,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던 그가 거실에 나와 앉아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시댁의 모든 식구들은 조금 더 살뜰히 애자를 챙기며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렸다.

“할머님. 이거 한 번 드셔보실래요?”

“이게 뭐니?”

“한과요 부드러운 거라 드시기 편하실 거예요.”

“어디서 났어?”

“엄마가 직접 만들어서 보내주셨어요.”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애자가 느릿느릿 한과를 씹어 삼키며 웃었다.

휠체어 곁에 앉아있던 수빈이 애자의 무릎 위에 뺌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할머님.,,

“응?,,

“저희랑 오래오래 계셔주셔야 해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한 손자며느리는 예쁜 얼굴만큼이나 뱉는 말도 고와 번번이 애자의 심금을 울렸다.

“아가.”

“네,할머님.”

그녀는 젖은 눈길로 수빈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우리에게 와줘서, 고맙다.”

애자의 말에 수빈 또한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아니에요. 할머님. 저야말로 감사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감사는 무슨.”

“정말이에요. 그때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여기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집이 정말 어려웠을 때, 예준의 이야기를 듣고 선뜻 자신에게 내어준 그 따듯한 손길을 수빈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지만 정말 고마운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예준 씨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준을 향한 그녀의 아낌없는 사랑이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예준을 있게 한 것 또한 애자의 애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심을 담은 수빈의 인사에 주름진 애자의 눈가가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할미가 손주 사랑하는 게 어찌 감사를 받아야 할일이야.”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였지만, 애자에게도 예준은 바라보기만 해도 아픈 손주이자, 피우기 어려운 꽃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피지 못한꽃이라 하여, 꽃이 아닌 건 아니었다.

“앞으로는 네가 내 몫까지 계속해서 사랑해주련.”

그저 저마다의 개화하는 시기가 다르듯 예준도 그럴 뿐이 라고 믿었다.

애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왔다.

그 꽃망울이 언젠가는 보란 듯이 꽃을 피우길.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꽃보다 자신이 지닌 향기가 아름답다는 걸 알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길.

늦은 시각.

본가에서 저녁을 해결한 수빈은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부己己 부己已

I--• I-.

그녀의 휴대폰을 경쾌하게 울린 발신인은 바로 정남이었다.

수빈은 반가운 얼굴로 재빨리 전화를 받아들었다.

“응, 엄마!”

한결같이 명랑한 딸아이의 목소리에 정남의 목소리도 덩달아 경쾌해졌다.

[우리 딸 잘 지내고 있어기

“나야, 늘 잘 지 내지 . 엄마랑 아빠는?”

[우리도 잘 있어. 지 서방은 잘 지내니?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걱정 마.둘다잘지내고 있으니까.”

수빈이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만 들어도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느껴지는 것 같아 정남이 소리 없이 웃었다.

한때는 내심 걱정을 하던 때도 있었다.

잘 지내냐는 별 거 아닌 안부에 잘 지낸다고 답하는 게 애쓰는 것처럼 느껴져서.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딸아이가 얼마나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세상에 숨길 수 없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가 사랑이라던데, 그건 사랑을 받는 이의 모습을 포함한 말이었다.

[제주도 한번 놀러와. 여기 정말 좋아.]

“나 없는데도 그렇게 좋아?”

정 남의 말에 수빈이 입술을 샐쭉 거렸다.

좋으면서도 괜히 짓궂게 농담 한번 던져본 거였다.

[자주 못 봐서 아쉽긴 한데, 좋긴 너무 좋다. 얘」

하지만 정 남은 늘 그렇듯 솔직한 입담을 과시하며 깔깔 웃었다.

[그나저나 우리 딸 사진 보니까 얼굴에 살이 좀 오른 거 같던데? 시댁에서 너무 잘 먹고 다니는 거 아니니? 지 서방이랑툭하면 외식도 하는거 같던데」

“사진? 무슨 사진?”

[지 서방이 말 안 해? 너랑 찍은 사진 거의 매일 보내주는데』

“아 정말?,,

[요즘엔 출장 가 있느라 풍경 사진이 랑 셀카 보내주고 있어. 아휴 우리 예준이 볼 때마다 눈이 호강해서 안 먹어도 배부른 거 있지?]

유럽의 멋진 풍경도 사위라는 피사체가 끼어들면 장모인 자신에게는 한낱 배경에

불과할뿐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 해. 내가 맨날 자랑하거든』

정 남은 또 다시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위 사랑이 나날이 커가는 장모였다.

조용히 그녀를 따라 웃던 수빈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 엄마. 조만간 신랑이랑 갈게.

맛있는 거 해줘.”

[맛있는 것만 해줘? 오기면 하면 아주 다 해주지, 엄마가.]

“하하. 커피는 좀 내릴만해?”

[웬걸. 나보다는 네 아버지가 소질 있는 거 있지? 깜짝 놀랐어. 나날이 늘어간다니까기

“안 그래도 아빠가 가끔 라테아트 만든 거라고 사진 보내주는데, 볼 때마다 놀라고 있어. 굉장하던데?”

정 남은 예준이 마련해준 건물에 터를 잡고 방훈과 함께 브런치 카페를 차렸다.

방훈의 커피와 정남이 공들여 개발한

크레페는 예준이 특히나 인테리어에 신경을 쏟아 마련해준 카페의 예쁘고 따듯한 분위기와 맞물려 금세 유명세를 탔다.

정남은 매일 같이 집안에 복덩이가 굴러들어왔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준을 칭찬했다.

그때 스리슬쩍 방훈이 끼어들었다.

[어이, 장 씨. 나도 좀 바꿔줘 보卜. 맨날 혼자만 통화하고 말이야』

옆에 있던 그가 정 남을 채근해 전화를 넘겨받고는 금세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공주! 잘 지내? 보고 싶다』

“아빠아아. 나도보고 싶어.”

애교가 가득한 무남독녀 외동딸은 어느 때보다 힘껏 콧소리를 냈다.

[언제 놀러올래? 지 서방이랑 꼭 한번 오上 우리 사위 보고 싶다고, 고맙다고 말 좀 전해주고』

“헤헤. 그럴게, 아빠. 몸 건강하시고, 곧

봬요.”

[그래. 사랑해 우리 딸』

“나도사랑해.”

수빈은 송화기에 대고 몇 번이나 쪽쪽 입술을 붙였다 뗀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집으로 돌아간 수빈은 소파에 파김치처럼 널브러져 있다가 비척이며 욕실로 향했다.

“아. 너무 피곤하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욕실에서 들어가서도 변기 위에 한참을 앉아있다가 겨우 씻고 밖으로 나왔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일이 고됐나 싶다.

그러다가 문気

“..어?”

문득 수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풀렸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그녀는 황급히 스케줄러를 열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허.”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몰랐는데 생리예정일이 일주일이나 훌쩍 지나있었다.

생전 하루 이상 미뤄지던 법이 없었는데.

“설마……:

수빈은 정수리에 번개라도 꽂힌 것처럼 벌떡 이러나 곧장 약국을 다녀왔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들었다.

사용법을 읽어보니 아침 첫 소변으로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하지만, 아침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결과는, ……두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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