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 살벌한 부부-57화 (57/63)

57 화

오랫동안 주위만 맴돌던 엇갈린 마음이 마침내 맞닿는 순간이었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사실은 세상 어떤 기쁨보다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숨결은 뜨거웠고,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에서 심장이 뛰듯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눈은 점점 감기고 온몸은 물에 가라앉는 것처럼 나른해지는데, 이상하게도 닿은 입술의 감각만큼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져갔다.

영혼을 모두 앗아갈 것 같던 그의 입술이 멀어졌다.

감겨져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보여주고 싶었어.”

이번엔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때라고 여긴 수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재원 씨가 우리 대화를 듣고, 우리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아.”

“아니. 너는 모르겠지만적어도 나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어쩐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래서 그랬어.”

팔을 뻗은 수빈이 예준의 목덜미를 깊게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소리 죽여 울었다.

온갗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먼 길을 돌아만난 이 마음이 너무나험한 길을 방황했던 것 같아 슬퍼졌다고 할까.

예준은 당혹스러웠다.

왜 우냐고 물어봐야 할지, 울지 말라고 달래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어떤 말을 꺼내는 대신, 수빈의 옆에 나란히 몸을 뉘 이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거두어 귀 뒤로 넘기고, 조금 더 그녀의 얼굴 곳곳을 세심하게, 그리고 오래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미 한참 전부터 서로는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이 이상, 어떤 질문이나 어떤 대답도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예준은 다시 한 번 수빈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살아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맞닿은 가슴 위로 기분 좋은 심장의 고동이 울렸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려도 후회스럽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한참 두I, 열린 수빈의 입술에 예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밤새도록 들어주겠다는 요량으로.

“해. 얼마든지 들어줄……

그런데.

“너무 졸려.”

엉뚱한 말이 이어졌다.

“뭐……T

황당해서 되물은 말에 수빈은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3일 밤을 새도 다 못 전할 거 같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엄두도 나지 않고, 술기운은 자꾸만 올라오고 온몸이 굳은 뒤 긴장이 풀리는 걸 계속 반복하다보니.

“기절할 거 같아.”

너무너무 피곤하다고.

말이 없던 예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수빈도 민망했는지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뒤늦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보려 안간힘을 쓴다.

바보같이 이게 뭔지.

“자자.”

예준이 수빈의 머리통을 가슴팍에 끌어안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지 만, 수빈은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빼고 물었다.

“너는 할말 없어?”

"예뻐,''

“뭐?’,

“예쁘다고, 너.”

이건 또 무슨

갑작스럽고 난데없는 그의 발언에 얼굴이 더 달아올라버렸다.

난 몰라. 겨우 가라앉혔는데 !

수빈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옹송그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나긋한 예준의 음성이 떨어졌다.

“일단 자자고. 얘기할 시간은 많으니까. 못 다한 얘기는 올라가서 천천히 해.”

매일매일.

조금씩.

또 조금씩.

애써 외면하고 몰라줬던 그 마음들, 그렇게 서서히 알아가자고.

* * *

다음 날. 동이 막 터오는 이른 새벽. 가장 먼저 일어난 건 재원이었다.

예준 역시 잠든 수빈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가 재원을 만났다.

“어디가냐? 이제 동텄는데?,,

“비행기 시간 때문에.”

“쪽팔려서 도망가는 거 아니고?”

예준의 말에 재원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너 솔직히 말해보卜. 어제 장난 친 거지?”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친구의 마음을, 가기 전에는 풀어주자는 생각에 재원은 곧장 고개를 끄덕 이 며 수긍했다.

“내가 또 궁금한 건 못 참잖아 너 놀리는 것도 재밌었고.”

이럴 줄알았다.

예준이 미간을 좁히자 재원이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쇼윈도고 나발이고 때려치우고, 얼른 제대로 자리 잡고 살아. 제수씨도 너 많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눈치 없이 마음고생 시키지 말라고.”

“너나잘해, 인마.”

“안 그래도 미국돌아가서 수빈 씨처럼 괜찮은 여자 있나 찾아보려고.”

“이게, 또…….”

“왜? 수빈 씨 괜찮은 사람인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너 되게 부러워.”

재원이 또한 번 웃었다.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진 거 같아서.”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이라는사족이 붙더니 재원이 슬쩍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우중충해보였거든. 뭐랄까 색깔로 따지면 회색…… 아니, 회색도 과분하다. 쥐색 있잖아. 명도도 낮고 채도도 애매해서 우중충한 막 그런 색.”

“걸어서 나가기 싫은가 보네?”

“어이쿠, 그럴 리가.”

“아무튼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음, 그러니까…… 주황색? 그래, 주황색 정도일 것 같다. 타오르는 불같기도 하고 따듯한 햇살 같기도 한 그런 색깔.”

“미대생 아니랄까 봐 비유하고는.”

“간다. 행복해라.”

마뜩찮은 표정의 예준을 향해 재원이 덤덤히 손을 흔들었다.

“재수 씨한테 잘해. 나 말고도 노리는 놈 많을 걸? 네 빈틈만 노리고 있을 지도 몰라.”

“아직도 안 갔냐? 빨리 좀 꺼져라.”

“하하! 간다! 수빈 씨한테 인사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남수네 제수씨한테도. 애들한테는 인사 다 했어 .”

남수 와이프한테만 얘기해둘게. 수빈이 인생에서 네 녀석 소식 듣는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테니 얼른 미국으로 사라져버려.

예준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재원이 사라지고, 예준은 그가 했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수빈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 무채색이었던 내 세상이 밝은 오렌지 빛으로 변했다는…….

그 말만큼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되게 고마운 놈이었잖아.” 따지고 보면 불이 날까 말까 했던 집에 열심히 불을 지피고 기름을 들이 부어준 꼴이 됐으니 말이다.

피식 웃은 예준이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아침으로 성게미역국이 나왔지만, 수빈과 예준은 먼저 남수 부부의 집을 나섰다.

“뭐야. 시간 아깝다 이거냐? 둘만 데이트하려고?”

“당연하지.방해하지 마. 둘만 있어도 부족하니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닭살스러운 말을 쭉쭉 뽑아 던지는 예준을 친구들이 못마땅하게 흘겨보았다.

“그래. 커플들은 얼른 꺼져주자. 잘 가라.”

“나중에 집들이 한 번 해! 알았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친구들이 인사를 건넸다.

수빈과 예준은 일일이 화답을 한 뒤 마지막으로 남수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대문을 나섰다.

* * *

“뭐 먹고 싶어?”

u o ” 口....

수빈이 고민했다.

사실은 남수의 아내가 아침 메뉴로 준비해준 성게미역국이 너무나 먹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오시기 전 예준과 둘이 있는 시간을 좀 보내고 싶어, 흔쾌히 그를 따라 나온것이다.

그랬는데…….

수빈은 슬쩍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예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막상 둘이 되니 자꾸만 어젯밤 기억이 떠올라 어쩐지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나 부정맥 있나?

그녀가 불규칙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술과 밤은 사람을 너무 감성적으로 만들어 탈이다.

어제의 행동을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벌건 대낮에 맨 정신으로 어제의 일을 떠올리려니 어쩐지 낯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원수 시절의 예준과 어젯밤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영혼을 앗아가던 그의 모습이 번갈아 떠오르며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얼굴 닳겠다, 아주.”

정면만 보고 있던 예준이 살짝 고개를 비틀더니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에 수빈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답했다.

“자꾸 어제 일 생각나서.”

그러자 예준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덤덤히 대꾸를 이었다.

“차 세우고 한번더 할래?”

u o ” o-.

묻기가 무섭게 돌아온 그녀의 화끈한 대꾸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예준의 손이 살짝 미끄러지며 차가 휘청거렸다.

놀리려고 한 말인데, 내성이 생겼는지. 아니면 이게 본 모습인지.

“빨리 차세워. 꿈인지 생시인지 직접 확인해야 되겠으니까.”

수빈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예준을 역습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예준은 침착하게 짐승으로 돌변한 그녀를 달래보기로 한다.

“일단 도로라 못 멈추니까,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더 가면 해수욕장 하나 나오니까 거기서…….”

그러니까, 거기서…….

“하자.”

말을 맺고 보니 어쩐지 우스운 상황이 된 것 같았지만, 수빈은 진지하게 또 고개를 끄덕여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제주도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희미할 만큼 온통 푸른 쪽빛의 향연이었다.

“일단좀 내려서 걸을까?”

“좋아。

예준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빈이 싱긋 웃으며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바탕 헝클고 지나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쪽, 하고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 o ”

三.

자신의 도톰한 입술 위를 매만지던 수빈이 살짝 웃었다.

“꿈은 아니었던 걸로.”

그러자 예준이 그녀의 허리를 당겨 또 한 번 가볍게 입술을 마주 댔다가 뗐다.

그러더니 유려하게 입술 끝을 올리며 속삭였다.

“꿈이 아니라는 건, 앞으로도 수시로 느낄 거야.”

바람에 섞여든 그의 향수 냄새가 온몸에 번지는 느낌이었다.

상쾌한 바람과 푸른 바다, 쪽빛 하늘과 하얀 백사장.

그리고 거기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예준과 수빈이 있었다.

변화는, 빠르게 일어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