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화
“아아.”
수빈이 대놓고 고개를 떨궜고, 예준은 눈에서 불길이 일 것처럼 재원을 쏘아보았다.
a O ”
三....
고민하던 재원은 자꾸만 뜸을 들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야! 5번, 6번 누구냐?”
경수가 킥킥댄다.
다들 기대하는 표정인 걸 보니,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술래를 굳이 확인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키스해.”
재원이 힘차게 주사위를 던졌다.
“3초는 붙이고 있어야 돼.”
여태껏 단 한 번도 없던 폭탄선언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원이 왜 저러냐? 많이 외로웠나?”
“이래서 사람이 혼자 너무 오래 지내면 안 돼. 연애도 하고 그래야지. 쯧쯧.”
커플들의 애정 행각이 달갑지 않은 두 솔로가 못 볼 꼴 보게 생겼다며 구시렁대던 사이.
“자,잠깐……!”
놀란수빈이 벌떡 일어나다가 손에 쥔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테이블 위로 윷가락처럼 굴러간 나무젓가락에는 6이라는 숫자가 선명히 적혀있었다.
“에? 수빈 씨가 6번이었어? 에이, 그럼 안 되지.”
“맞아. 예준이한테 맞아죽을 일 있냐?”
임자 있는 제수씨 데려다가 더러운 꼴 보지 말자며, 친구들이 만류했지만 재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했다.
“초치지 마. 재원이가 미쳤냐? 딱 봐도
예준이가 5번인데 뭘. 우린 입 다물고 구경만
하면 돼.”
그에 또다시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오. 설마! 예준아! 너가 5번이야?”
“우린 그냥 므흣하게 구경 만 하면 되는 건가? 흐흐."
무표정한 예준을 바라보던 재원이 어깨를 한번 으쓱이 더니 웃는 낯으로 그를 도발했다.
“못하겠으면 하지 마. 벌칙은 가볍게 줄 테니까.”
그러면서 글라스에 소주와 맥주를 가득 따른다.
“에이 벌칙이 겨우 술이야?”
누군가는 실망했고.
“벌칙 받을 일이 없을 텐데, 상관있냐?
부부인데 당연히 하겠지.”
누군가는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수빈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남들 앞에서 매너 없게 이게 뭐하는
짓…….”
예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재원을 타박했지 만, 친구들은 계 탔다는 얼굴이 다.
“뭐가 매너 없어! 부부 사이인데 뭐 어때!”
“싫어. 내가 왜.”
“와, 지예준! 싫대! 제수씨가 그렇게 싫어?”
“그게 아니잖아, 이 웬수야!”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져간다.
수빈을 보니 거의 기절하기 일보직전이고, 뭐하러 남들 애정 행각을 봐야하냐고 항변하던 솔로부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이 며 초집중모드에 돌입했다.
“키스해!”
짝!
“키스해!”
짝!
“키스……
이것들이, 진짜.
인상을 쓰던 예준이 한숨을 푹 쉬며 재원이 만든 폭탄주 글라스를 들었을 때였다.
“유재원. 너는 나중에 나 좀 보……
누군가가 그의 넥타이를 콕卜, 하고 끌어당겼다.
고개가 돌아갔을 땐, 수빈의 얼굴이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예준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고, 그녀가 눈을 꽉 감고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 럼 늘어졌다.
그리고…….
“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악!”
……닿았다.
1.
2.
3…….
예준은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고, 그의 넥타이를 틀어 쥔 수빈은 입술을 부딪친 상태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
3초가 이렇게 긴 시간이었나 싶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지만, 두 사람의 귓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서로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풍경과 배경들이 사라지고, 남은 건 익숙한 체향과 열기.
그리고 터질 듯 뛰어대는 심장 소리뿐이었다.
쿵쾅쿵쾅.
어딘가에서 북소리가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입술이 떨어지는동시에 멀어졌던 시야와 소리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오듯 선명해졌다.
“와아. 제수씨…… 대박이다. 진짜.”
“아아아. 부러워. 나도 결혼하고 싶어어어.”
“괜히 봤어 ! 속만 쓰리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고, 수빈은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른 채 어깨를 잔뜩 옹송그리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예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더니 제 품에 끌어와 안았다.
그리고는 팔로 수빈의 어깨를 감싸며 자연스럽게 주위의 시야를 차단해주었다.
부끄러움이 조금은 물러가는 기분.
상상도 못했던 짓을 저질러버렸는데도, 예준의 품에 안겨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만 같은 묘한 상황이었다.
그때. 예준이 천천히 고개를돌리더니
재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만족해?”
경고라도 하듯 이글거 리는 눈동자와는 반대로 유려하게 굴곡진 입술은 호선을 그리 며 승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봤지? 신수빈 내 거야. 꿈 깨.' 하고 외치듯.
“……허.”
재원은 저도 모르게 작은 실소를 뱉었다.
“허는 무슨 허.”
그마저도 맘에 안 들었던 예준이 턱 끝을 치켜들고 말했다.
“속 쓰리면 술이나 한잔 해. 네가 만든 폭탄주. 그거 네가 마시면 되겠네.”
놀리는 게 확실했지만, 재원은 너그럽게 받아주며 술잔을 들었다.
“그래야겠다. 솔로는 먹고 잠이나 자야지.”
그는 폭탄주 잔을 허공에 살짝 들었다 내리며, 덕담을 건넸다.
“두 사람.백년해로해라.”
이내 술잔을 가득 채운 황금빛 액체는 깔끔하게 비워졌다.
밤도 기울고, 달콤 쌉싸름한 향기 한줌을 머금은 달빛은 모두의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차례로 씻고 나왔다.
긴장이 풀린 수빈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고, 예준은 군말 없이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불을 끄자, 짙은 어둠이 순식간에 공간을 집어삼켰다.
수빈은 노곤했던 몸이 다시 긴장감으로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은은한 달빛이 담겼다.
자연히 청각이 곤두섰다.
풀벌레 소리오匕 이따금씩 부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규칙적이지 못한 두 사람의 희미한 숨소리가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냥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어쩐지 마음대로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던 수빈이 이불자락만 꼭 움켜쥔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끔벅였다.
'지금이게 꿈은 아니겠지?'
이불만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랫입술을 더듬거 렸다.
불에 덴 듯 뜨거웠던 열기가 고스란히 아까의 기억을 머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감촉이 자꾸만 되살아나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수빈은 살짝 고개를 돌려 침대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완전히 적응한 시선 속에 예준의 모습이 비추었다.
푸릇한 월광이 그의 매끈한 뺨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위를 반짝이며 미끄러져 내렸다.
“……허리 안 아파?”
바닥은 허리가 아파 못 잔다던 예준의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려 슬쩍 말을 걸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직 잠든 것 같지는 않은데.
수빈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편하면 올라와서 자도 돼.”
“어차피 우리 한 침대에서 자도 아무 일 없을 거잖아. 네 말처럼 예전에 술 잔뜩 먹고 호텔방에서 일어났을 때도 아무 일 없었고……
딱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헉!,,
시야가 뒤집혔는데,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질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예준이 수빈의 어깨를 누른 채 위를 점령했다.
그러고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匚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 바로 아래에 있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유려했다.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
묵직한 저음이 고막을 파고들더니.
“하지만……
단박에 심장을 긁어내렸다.
“이젠 아니야.”
이젠, ……아니라는 말.
그 말 한마디에 수빈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서히 조여 오는 듯한 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 했다.
“말해.”
예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도 실수였어?”
“그러 니까 사과하고 없었던 일로 할 거야?” 수빈은 그제야 예준이 예전에 두 사람이 호텔방에서 눈을 떴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 그럴 일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잤다면…… 그건 실수야.’
그래. 그렇게 얘기했었다.
하지만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이었다.
게다가 예준이 자신을 덮친 게 아니라, 자신이 예준의 입술을 덮친 거였고.
떠밀리는 분위기였지만, 절대 등 떠밀려 저지른 실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묻잖아. 실수였냐고.”
“그게……:
“대답해봐.”
수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 예준이 재원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저 겁먹은 눈으로 예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사과를 들으려는 게 아니야.”
예준이 듣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그래서 사과를 들으려 던 게 아니라고 타박 아닌 타박을 건넸다가, 이내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한숨이 흘렀다.
누가 누굴 책망하고 있는 건지.
지금 이 순간 용기가 필요한 건 수빈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눈치만 살피고 있던 수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냥……
“됐어 그만 말해.”
말끝을 흐리던 예준의 손끝에 수빈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늘 그랬어.”
미안했다.
“매번 내 마음은 감추면서, 너만
재촉했었어.”
너도 나처럼 두려웠을 텐데.
너도 나만큼이나 마음에 상처가 큰 사람이었을 텐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햇살처럼 밝았던 너는 정말로 마음이 건강한 사람인 거다.
나는 그걸 동경했던 거고.
“내가 비겁했어.”
무섭기만 했던 그의 얼굴이 탁 하고 풀리며 부드러워지더니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이미 충분히 대답하고 있었는데…….
“듣지 못했던 건 나야.”
예준이 수빈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더니 천천히 상체를 숙여 내려왔다.
“어쩌면 내가 깨닫기 훨씬 전부터.”
어쩌면 그날.
유난히 하늘이 파랗고 햇살이 따스했던 봄.
운동장에 앉아있던 내게 손을 내밀던 널
마주했던 그때.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내가 전학을 간 곳에서, 너를 처음 만났던 그때.
온통 어둠뿐이던 나의 잿빛 세상이 너로 인해 무지갯빛으로 변했던 바로 그때.
“이미 나는……
커다래진 수빈의 눈이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고.
“너를 좋아했을 거야.”
살짝 벌어져있던 그녀의 입술 위로, 예준의 입술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