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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55화 (55/63)
  • 5 5화

    그녀가 이런 상태니, 예준은 더욱 난감해져 버렸다.

    가뜩이나눈치 빠른 재원 앞에서 어쭙잖게 변명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장난이라고 우기기에도 무리가 있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예준은 재원에게 솔직히 제 입장을 전했다.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줘.”

    “아. 그럴게.”

    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돌아가있어. 나 재원이랑 얘기 좀

    하고 갈게.”

    으응. 알았어.”

    수빈은 재원과 눈도 못 마주친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뒷수습은 예준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匚匕

    “한 대 피울래?”

    재원이 담배를 권했지만, 예준은 깔끔히 거절했다.

    “끊었어.”

    “아, 그래?”

    재원은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놀랐냐?”

    “많이 놀랐지.”

    “전혀 위화감이 없었으니까.”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재원이 웃었다.

    “당사자들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거든. 쇼윈도라고 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자신의 대답이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예준은 살짝 얼떨떨하다는 표정이었다.

    음.

    재원이 매의 눈으로 그의 반응을 살폈지 만, 대화 몇 마디로 단정 짓기엔 좀 애매모호했다.

    마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슬쩍 한 번 떠볼까?

    재원은 속내를 감추고는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걱정할거 없어 내주변에 의외로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역시나 포커페이스다.

    재원은 예준을 조금 자극해보기로 햇다.

    “어쨌든 임자 없다는거잖아, 제수……, 아니.수빈 씨.”

    “수빈 씨?”

    재원의 입에서 호칭이 바뀐 게 거슬렸는지, 예준이 즉각 반응했다.

    옳지. 걸렸구나.

    “엉뚱한데 욱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재원이 뻔뻔하게 되묻자, 예준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응했다.

    “마음이 있든 없든 내 아내야.”

    “1년 뒤면 찢어질 거라며.”

    그의 입술에서 흩어져 나온 새하얀 연기가 까만 밤사이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매캐한 냄새오卜, 적응 안 되는 재원의 태도에 예준의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 구겨졌다.

    “너 수빈 씨 좋아해?”

    “니가 알아서 뭐하게 한국에 나 취조하러 왔냐?”

    사실 재원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대화를 들은 사람이 그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가 입 이 무거운 사람이 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무리들 중에서도 예준과 제일 잘 지내던 친구였기 때문에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근데.

    “애매모호하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애인 있는 사람한테 관심 둘 만한 녀석이 아닌데.

    “너 왜이래, 오늘? 뭐 잘못 먹었어?”

    “아니? 내가오(지극히 정상이야.”

    “그런데 남의 아내한테는 왜 관심 갖는데?”

    “진짜 네 아내였으면 당연히 관심 껐지.

    그런데 아니라잖아. 그냥 일하는 중이라며, 두 사람.”

    “그렇다고 네가 마음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저게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나 싶어, 지켜보던 예준은 말문이 막혀 헛숨만 토했다.

    그런데 재원은 웃는 낯으로 시종일관 진심인 것만 같다.

    “나도 이제 괜찮은 사람 있으면 적극적으로 대시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여자 만나기 쉽지 않거든.” 담배를 비벼 끈 재원이 손을 흔들었다.

    “나 먼저 간다.”

    그는 웃으며 멀어졌지만, 지켜보는 예준은 전혀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못 박힌 듯 서人1 재원이 던지고 간 말을 곱씹을뿐이었다.

    '어쨌든 임자 없다는 거잖아.’

    '1 년 뒤면 찢어질 거라며.’ 이건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너 수빈 씨 좋아해?’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

    그냥그렇다고 대답해버리면 쉽게 끝났을 일일 텐데.

    아마도 자신의 변화된 마음이 스스로도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그게 수빈한테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고.

    '나도 이제 괜찮은 사람 있으면 적극적으로 대시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여자 만나기 쉽지 않거든.’

    수빈이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 볼수록, 오히려 자신의 집안에 들이기엔 과분한 여자라는 생각도 자주 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수빈에게 있는 게 아니라, 예준 자신에게 있었다.

    단순히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감정을 깨닫게 된 것과는 별개로, 현실이라는 난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혼?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누군가를 평생 지키고 사랑하며 또한 평생 사랑받는 일.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고, 막대한 책임이 뒤따르는 일.

    솔직히 자신 없었다.

    자신은 좋은 자식 이었던 적도 없고,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큰 인생도 아니라 그걸 다시 물려 줄 수 없었다.

    좋은 남편, 그리고 좋은 아버지라는 건 그냥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단어에 불과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런 거였다.

    그게 뭔지 본 적도 없고, 모른 채 자랐으니까.

    “뭘 알아야 해주든 말든 할 거 아니냐고.” 그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평생 그 마음이 변치 않을거라 믿는 일.

    타인에게 상처 받을 자신

    예준이 자신하기엔 확신이 없는 것들이었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닌 것 같고.

    “하아.”

    예준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흘렀다.

    애매모호하네.’

    재원이 남기고 간 한마디가 따갑게 마음을 긁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아니,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예준에겐 너무나 무거운 숙제였다.

    * * *

    자리로 돌아갔을 때, 분위기는 무르익어 극에 달해있었다.

    밤늦게 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드는 상황이 이어졌고, 다들 취기에 느른하게 늘어져있는 상태였다.

    “얌마, 와이프 놔두고 자리를 그렇게 오래 비워? 매너 없이.”

    경수가 타박했다.

    하지만 녀석이 뭐라고 하든 예준의 신경은 온통 수빈에게 쏠려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난감해하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예준은 자리에 앉으며 수빈의 얼굴에 제 손바닥을 가져다댔匚上 보는 것만큼이나 뜨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괜찮아?”

    그리고 갑작스런 접촉에 놀란 수빈의 눈은 쏟아질 것처럼 커졌다.

    “……어, 어? 뭐가?”

    “얼굴 많이 빨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 예준의 말에 곁에 있던 친구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야! 누구 맘대로 수빈 씨 낚아채?”

    “우리 한참 잘 놀고 있었거든? 그죠, 수빈

    씨?”

    주변의 채근에 수빈이 마지못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 만, 예준은 수빈의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돌리 며 말했다.

    “쟤네 신경 쓰지 말고, 힘들면 말해.” 친구들의 의견을 말끔히 무시한 예준의 물음에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기야. 나 진짜 괜찮아.”

    그런데 건너편에 앉아있던 재원이 피긋 웃는다.

    수빈과 예준의 시선이 동시에 재원을 향하자, 재원이 곧 사과를 했다.

    “아. 미안 보기 좋아서.”

    저 새끼가 진짜. 오늘 늦더위를 먹었나.

    원래 저렇게 밉살스러운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계속 거슬리는 행동만 하는 그가 예준은 못마땅했다.

    아니. 어쩌면 그를 못마땅해 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단순히 제 마음에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도 모르고.

    짧은 침묵을 뒤로 한 채 누군가가 외쳤다.

    “됐고 아무도 못 나가! 분위기도 무르익었는데, 간만에 왕 게임이나 한판 하자!”

    왕 게임이라는 말에 수빈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녀가 잽싸게 고개를 돌려 예준을 바라보고는 똥마려운 강아지처 럼 안절부절못했다.

    뭐야, 이 표정은? 소싯적에 음탕한 왕 게임 좀즐겼나본데?

    예준이 놀리듯 피식 웃었다.

    “걱정 마. 네가 알던 그 왕 게임이 아니니까.” 뒤늦게 그의 웃음을 이해한 수빈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예준은 구경이 나 하라는 듯 수빈의 어깨를 툭툭쓸어내리며, 이내 테이블 아래에 놓인 손등을 꽉 잡아주었다.

    재원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고, 그 시선을 느낀 예준이 고개를 돌려 재원을 바라보았다.

    “넌, 남의 와이프 그만 좀 쳐다보고.”

    “왜.닳을까봐 겁나?”

    “더러운 시선 닿을까 봐 겁난다. 됐냐?

    불경한 면상 저리 치워.”

    예준의 순도 백 프로 막말에 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두 남자는 눈에 불꽃이 튀었다.

    “잡음 치우고, 게임 시작!”

    경수가 재빨리 나무젓가락 끝에 번호를 적어서 동그란 원형 통에 집어넣고 내밀었다

    “자! 다들 하나씩 골라!”

    첫 번째 왕이 된 여자는 신이 나서 외쳤다.

    “꺄! 나다! 니들 다 죽었어 ! 3번, 5번 누구야!”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존재하는 재미있는 룰이 하나 있다면, 왕의 재량에 따라 술래를 먼저 오픈한 후 벌칙을 정할 수 있다는 거였다.

    이렇듯 왕이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룰을 바꾼 건 철저히 술래에게 최적화된 맞춤형 흑역사를 생성시키는 게 그들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3번, 5번을 뽑은 여자 친구 둘이 긴장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자. 씨름 붙습니다. 지는 사람이 내일 커피 쏩니다.”

    왕의 말에 두 친구는 벌떡 일어나 즉각 명령에 따랐다.

    “이야아!”

    “봐주지 않겠다!”

    샅바도 없는데 서로의 바지춤을 잡고 인정사정없이 달라붙는 단짝 친구들을 보던

    수빈은 입이 떡 벌어졌다.

    팔씨름이 아니라 진짜 씨름이었다.

    승자는 인정사정 없이 자신의 친구를 잔디 위에 매다꽂고는 백두장사처럼 포효했다.

    진 친구는 내일 커피 당첨이었다.

    “자, 다음 왕은 나다!”

    경수가 왕이 되었다.

    “1 번, 6번! 가지고 있는 동전 중에서 제일 오래된 동전 꺼내. 더 오래된 동전 가진 사람이 이기는 거야. 지는 사람은 설거지 당첨 참고로 혼자 한다! 고로 오늘 못 잔다는 소리고!

    크하하!”

    어마어마한 중노동이 걸린 끔찍한 벌칙이었다.

    1 번이 꺼낸 동전은 2005년 동전, 2번은 2010년 동전이었다. 결과는 1번 승.

    “으아아아!”

    독박 설거지에 당첨된 2번은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잔혹한 왕 게임은 계속 되었다.

    “2번, 4번. 저기 서있는 나뭇잎 뜯어오上 먼저 오는 사람이 이긴다.”

    남녀가 붙기엔 불리한 게임이었지만 운동신경이라고는 영 젬병인 경수와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 선수로 활약하던 여자 친구가 붙으며 경수가 패했다.

    벌칙은 술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며 술래의 얼굴에 낙서를 하는 거였다.

    “미안해요. 경수 씨.”

    이런 걸 어떻게 하냐던 수빈이 경수의 코 옆에 왕 점을 찍는 바람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는 점점 더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음 왕 누구야?”

    경수의 외침에 구석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아, 올 것이 왔구나.

    다음 왕은 재원이 었다.

    “재원이 저거 멀쩡하게 생겨서 제일 지독한 거 시키고 그랬잖아. 벌칙도 완전 추한 거 주고!”

    “그래도 재미는 있었지.”

    “네가 걸려도 재미있다는 소리가 나오나 보자.”

    “이 자식이 ! 재수 없는 소리를!”

    경수와 상준이 멱살을 틀어쥐고 아옹다옹하는 사이, 재원이 무심히 번호를 불렀다.

    “5번, 6번.”

    사실 복불복이라 처음부터 두 사람이 걸릴 거 란 기 대는 하지 않았다.

    시간은 많고 밤은 기니, 그저 걸릴 때까지 뽑아보자는 생각이었는데…….

    표정을 보니 두 사람, 딱 당첨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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