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화
모두의 부러움과 질투와 축하를 한꺼번에 몰아 받은 새신랑과 새신부는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힘에 겨워했다.
하지 만 짓궂은 하객들은 축하를 가장한 질투를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더 이상은 못 마시겠어요.”
종이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신부가 테이블 위에 있던 흰색 냅킨을 허공에 휘휘 흔들었다.
“에이, 제수 从I. 남수가 제수 씨 말술이라고 다 불었는데, 이제 와서 빼기…… 으읍!”
친구 중 한 명의 타박에 남수는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 미친놈아! 내가 언제!”
마른침을 삼키던 남수가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테이블 위에 반쯤 고꾸라진 새신부는 눈을 홉뜬 채 남수를 원수 보듯 흘겨보다가 결국 못이긴 척 폭탄주 몇 잔을 더 건네받았다.
하지만 이내 반쯤 정신을 잃고, 결국 먼저 가서 죄송하다는 한마디만 남긴 채 신랑에게 업혀 사라졌다.
순식간에 신혼부부를 골로 보내버린 그들의 무서운 신고식 현장을 바라보던 수빈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결혼식 때 뒤풀이를 하지 않았던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분위기는 점점 더 무르익었고, 바람에 섞여 들리는 희미한 파도 소리와 바다 내음은 한껏 기분을 들뜨게 했다.
유난히 별이 잘 보이는 밤이었다.
“제수씨. 예준이가 잘해줘요? 이 녀석 워낙에 무뚝뚝해서.”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예준의 친구 경수가 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내 어디가무뚝뚝해? 헛소리하지 말고 저쪽 가서 앉아.”
“저거 보匕 저거.”
쌀쌀맞은 예준의 반응에 경수가 혀를 끌끌 찼고, 두 남자를 지켜보던 수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한때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원수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예준을 한껏 치켜세워주고 싶었다.
“예준 씨가 무뚝뚝해요?”
커다란 눈을 깜박이던 수빈이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얼굴로 뻔뻔하게 그를 감쌌다.
“전혀 아닌데? 얼마나 다정하고 세심한데요.”
“에? 말도 안도!!. 이 녀석 어디가 다정해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니고?”
경수의 말에 예준이 오만상을 썼다.
“저게 아주 큰일 날 소리하고 있어.”
수빈의 말에 테이블에 둘러 앉아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귀를 쫑긋거렸다.
“예준이가 다정해?”
“심지어 세심해?”
세심해요. 특히나 우리 부모님한테는 더 !
수빈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준다.
“어머나, 정말?”
“믿을 수 없어. 세상 시크한 지예준의 팔푼이 같은 모습이라니.”
팔푼이가 아니라 팔불출이겠다만, 그게 뭐든 일단 기분이 나쁘다는 건 확실했다.
예준은 한 마음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동기들의 대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왜들 이래, 오늘? 나 매장해버리기로 했어?” 까칠한 그의 반응에 동기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래야 지예준이지.”
하!
새신랑은 따로 있는데, 왜 이렇게 자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만들 해라, 진짜.”
예준이 슬쩍 눈가를 구기자, 신나게 놀려대던 친구들도 살며시 꼬리를 내렸다.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그러게 말이야. 시집, 장가 못 간 사람들은 서러워서 살겠냐고.”
새까만 밤하늘 위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나저나 재원이 너는 결혼 안 해? 여자친구는?”
누군가의 물음에 예준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재원이 턱을 괴고 웃었다.
,,아직,,
“잘난 놈이 뭐가 아쉬워서 연애도 안 해? 너는 뭐 안 늙을 줄 알아? 잘 생긴 얼굴 썩힐 거면 나나줘.”
재원이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때 되면 알아서 하겠지.”
그의 시선이 스르륵 수빈을 향했다.
“남수나 예준이네 제수씨처럼 괜찮은 여자분 만나면,,
재원의 칭찬에 수빈이 웃음을 터트리며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비웠다.
“하하. 칭찬 고마워요. 재원 씨 정도면 충분히 좋은 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어휴. 제수씨 만큼만 되어주면 과분하죠.
삼보일배 하면서 모셔올 의향도 있어요.”
그의 센스 넘치는 대답에 수빈이 또 한 번 웃었고,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예준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져갔다.
……이것들이 아주 하하호호 난리가 났네.
어?
수빈의 옆에 있던 진경이 물었다.
“재원아. 나는 어떠니? 나사실 입학식 때부터 널 눈 여겨 봤…….”
“왜 이래, 진경아. 가족끼리 이러는거 아니다.”
“쳇!”
과장된 정색으로 칼 같은 대꾸를 날린 재원의 반응에 한바탕 크게 웃음이 터졌다.
“제수씨 주변에 제수씨처럼 괜찮은 사람 있으면 저 소개 좀 시켜주세요.”
“꿈 깨.”
시베리아 한기가 휘몰아치는 냉정한 두 글자를 날린 건 곁에 있던 예준이었다.
보다보다 기어코 한마디를 뱉어버리고 만 것이다.
“뭐?’,
재원이 놀라서 쳐다보자, 예준이 보란 듯이 팔을두르며 말했다.
“소개팅 백 번을 해보卜라. 이 런 아내 만나는 게 쉬운가.”
턱을 괸 채 무심하게 뱉는 말 치고는 상당히 오그라드는 말들을 예준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
“전생에 나라를 오억 오천만 번쯤 구해야 가능할걸?”
“너는구했고?”
“그랬으니까 결혼했겠지?”
그랬으니까 얘 옆에 있는 게, 네가 아니라, 나인 거라고
알았냐?
예준이 피식하고 대놓고 썩소를 날렸다.
“와. 지예준 팔푼이 다됐네.”
재원이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것들이 자꾸 여기저기서 팔푼이, 팔푼이 해댄다. 듣는 팔푼이 기분 나쁜 줄도 모르고.
다른 친구들은 듣고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어우! 닭살!”
“야! 다음 모임엔 무조건 애인 데리고 오자!”
“가능하겠어?”
“없으면 심부름센터에라도 전화 해 ! 요즘 애인 대행해주는 곳도 많다더 만!”
“엮지 마. 그렇게까지 비참해지고 싶진 않으니까.”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아내를 재우고 나타난 남수가 합류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그러자 경수가 남수의 등짝을 후려쳤다.
“네 욕하느라 재미있었다!”
“아야! 다짜고짜 왜 때려?”
“짝 있는 것들은 죄 다 맞아야 도H. 그래도 从卜.” 경수가 또 한 번 남수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지만, 마냥 기분 좋은 새신랑은 얻어 맞으면서도 자꾸만 웃음을 흘렸다.
“자! 한잔 하자!”
분위기 바꾸는 데는 술이 최고라며 또 한바탕 술판이 벌어졌다.
수빈도 즐거웠는지, 웃음이 잦아졌고 친화력 좋은 그녀의 쾌활함은 어디서나 빛을 발했다.
결국은 모두 수빈의 주변에 둥글게 둘러앉아 어느덧 눈을 반짝이며 수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적당히 오른 취기에 다들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둘씩 짝을 지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괜찮아?”
예준이 수빈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고, 수빈은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뭐가 그렇게 좋아.”
“그냥다 좋아.”
헤헤. 반쯤 눈이 풀린 그녀가 히죽 웃는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천천히 일어선 그녀가 남수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자, 남수가 별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수씨는 오늘 예준이랑 저기서 주무시면 돼요 화장실이랑 욕실도 거기 있는 거 쓰시면 되고요.”
“네? 아까 2층에서 여자들 다 같이 자기로…….”
“에이. 커플을 어떻게 떨어트려 놔요. 특별히 드리는 거니까 다른 애들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주무세요.”
아. 아니…….
무늬만 금슬 좋은 부부일 뿐 집에서도 동침하지 않는 두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남수의 호의에 수빈은 난색을 표했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예준이 수빈의 손을 잡아끌었다.
“화장실부터 다녀오자.”
“아, 응.”
두 사람은 함께 코너를 돌아 별채 쪽으로 걸음 했다.
그리고는 일행이 멀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수빈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 별채에 방하나뿐인 것 같은데.”
“바득바득 따로 자겠다고 우기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냥 같이 자.”
“뭐어?”
펄쩍 뛰는 그녀의 모습이 흡사 사자에게 오늘 저녁 메뉴는 너로 정했다, 라는 선전포고라도 들은 사슴 같았다.
“뭘 그렇게 놀래? 안 잡아먹어.”
“그, 그래도…… 같이 자본 적도 없는데, 좀.”
“왜 같이 자본 적이 없어? 결혼하기 전에 너 술 떡 되서 호텔에서 같이 일어난 적도 있었……읍!”
“조, 조용히 좀 해! 그 얘기는 왜 또 꺼내?” 수빈이 얼른 예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튼 그냥 별채에서 같이 자. 네가 침대에서 자고 내가 바닥에서 자면 되잖아.”
“너 입 돌아가면 어떡해.”
“그런 것까지 걱정되면, 옆에서 재워주던가.”
“아니, 그건 좀…….”
……어쩌자는 거냐.
“아무튼 그냥 같이 자. 남들한테 동네방네 쇼윈도라고 광고하고 다닐 거 아니면.”
“그래, 알았어. 오늘만 진짜 부부해, 그러면.”
“무슨 뜻이야?”
“네가 생각하는 건 아닌 건 확실해.”
웃음을 터트린 예준이 말했다.
“오늘만이라고는 장담 못해.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
얼마 전, 장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은 예준이 미리 선을 그었다.
“아무튼 계약 기간 동안은 사람 많은 곳은 좀 피해야겠어 나 진짜 거짓말엔 소질 없어서.”
“그래. 1 년만 참아.”
안절부절못하는 수빈의 머리를 예준이 툭툭 쓸어내렸을 때였다.
파삭
갑자기 난 인기척에 놀란 수빈이 뒤를 돌아보았고, 예준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별채의 뒤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걸 본 두 사람이 그대로 굳어버 렸다.
“……뭐야, 너?”
상대방 역시 난감하다는 듯 뒷목을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아. 미안 담배피울 곳 찾다가 왔는데 나갈
타이 밍을 못 찾아서.”
재원이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온지좀 됐지.”
a ”
혹시 다 들었냐고, 섣불리 묻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
수빈은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멋쩍게 웃던 재원이 먼저 사실을 털어놓았다.
“미안해.”
“뭐가?”
“다 들었어. 두사람 얘기.”
수빈은 놀라다 못해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