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화
“부지배인님!”
탈의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는데, 영하가 득달같이 달려와 울상을 지었다.
“엊그제 괜찮으셨어요? 호텔 앞에서 험한 일 당하실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요.”
“어떻게 들었대?”
“그날 보안 담당자들이 상황 수습하는 거 연회장 정아 선배가 봤대요.”
“그랬구나.”
영하는 어떻게 사람도 많은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며 무서운 세상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나 사람 많은 곳은 그만큼 소문도 참 빠르다.
“과장님도 걱정 많이 하셨는데, 괜히 쉬고 있는 사람 들쑤시지 말라고 하셔서 연락 안 드렸어요.”
건호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래간 함께 일해온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이 알았다.
부끄러운 일을 한 건 아니었지 만,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민 망한 것도 사실 이 었다.
“부지배인님 많이 다치신 거 아니죠?”
“다치긴. 하나도 안다쳤어. 괜찮아.”
“휴우. 다행이다. 형부가 그래도 때맞춰 나타나 주셔가지고……
걱정이 가득했던 영하의 얼굴에 조금은 시름이 덜어지는 듯 보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수빈이 어서 가자며 막 뒤를 돌았을 때였다.
“맞다! 부지배인님!”
“으기
“저기…… 그래서 집에는 언제 초대해주실 거예요?”
아. 잊고 있었다…….
“음. 이번 주까지 날 잡아서 알려줄게.”
수빈이 생긋 웃으며 먼저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까먹기 전에 얘기해둬야지.
휴대폰을 꺼낸 수빈은 회사에 있을 예준에게 문자를 보내두었다.
- 지 씨. 미안한데, 나 사고 쳤어. 눈 딱 감고 집들이 한 번만 하면 안 될까?
문자가 전송되자마자 수빈은 서둘러 휴대폰을 가방에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몰라. 나는 말했으니까, 욕이 오든 뭐가 오든 일단 통보에 의의를 두기로!
그런데 보낸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을 했다.
예준에게서 회신이 온 것이다.
- 이왕이면 주말로. 같。/ 쉬기 전날 잡아주면 더 좋고.
문자를 확인하던 수빈이 눈을 비비고 다시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졌다.
“오. 웬일이래?”
얼마 전에 케이크를 사올 때까지만 해도, 마음에도 없는 스윗 남 코스프레한다고 애쓴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다정한 대답이 돌아오다니.
심지어 제법 오래 간다! 이 다정함이 !
이게 진짜 모습이었나?
저한테만 그렇게 모질게 굴었나 싶어 마냥 웃을 일은 아니었지 만, 이 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자리에 멈춰선 그녀가 주먹을 꼭 쥐고 흔들었다.
그런데 그때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 그리고 '여자당' 게임 다시 시작해.
뭐야. 싫다고 할 땐 언제고?
바다처럼 넓어졌던 수빈의 마음이 다시 좁쌀 만해졌다.
그녀가 분노의 키패드를 두드렸다.
- 싫다며? 왜다시하쟤?
- 하자면 해. 지 씨라고 부르는 거 듣기 싫으니까
- 그럼 너도 신씨라고 불러.
진심으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수빈에게는 우주 최강 사랑꾼인 아버지 방훈의 정남을 향한 애칭이기도 했으니까.
어이, 장씨.'
그게 또 계속 들으면 엄청나게 박력도 있고, 달콤하고 매력 터진단 말이지.
예준에게서 신 从I, 하고 불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자가 날아온다.
- 집들이하기 싫은가봐?
식겁한 수빈이 번개처럼 회신을 보냈다.
- 마지막 주 금요일은 어때, 자기야?,, 그시각.
문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예준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꼬집 어주고 싶을 만큼 잔망스런 하트였다.
“내 차례군.”
회심의 답장을 날려준다.
- 시간빼놓을게. 수고해, 여보.
차마 하트까지 붙일 레벨은 안 돼서 포기했다.
보내기가 무섭게 회신이 온다.
- 당신도요”
……하여간.
적당히 라는 걸 모른다.
한 편, 아무것도 모르는 수빈은 세상 다정해진 예준의 변화에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의 뿌듯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진짜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스윗남일지도 모른다.
매장으로 향하는 수빈의 발걸음이 춤추듯 가벼웠다.
뒤늦게 탈의실을 빠져나온 영하는 그런 수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역시 결혼을 잘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오匕 역시 형부! 진짜 세기의 사랑꾼이었어!”
어마어마한 오해를 한 영하의 걸음도 매장을 향했다.
* * *
그날 이후 예준은 약속했던 것처럼 매일 수빈을 데리러 왔다.
사실 예전엔 일부러 수빈과 마주치는 시간을 줄이려 일부러 일을 더 만들어서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야근을 하는 횟수가 줄어드니, 반대로 본가나 처가댁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날도 자연스레 늘었다.
애자는 주치의에게 정기적으로 몸 상태를 검진 받았고, 그녀의 몸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큰 병을 앓고 있는 줄 모를 정도로 좋아보였다.
소정이 요리 교실을 다니는 횟수가
늘어 날수록 그녀도 점점 요리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어머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옛날에 시골에서 많이 드셨었다고 했죠? 오늘 요리 교실에서 만들어 왔어요.”
“어이구. 이런 것도 만들어?”
“네. 이게 시골식 양념 막장이래요.” 어렵기만 했던 고부 사이가 조금씩 틈을 좁히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훈은 종종
생일날 수빈은 큰맘 먹고 그림을 그리는 도구인 타블렛을 선물하기도 했다.
“도련님 생일 축하해요.”
“아, 형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진짜 사인은 언제 해줄 거예요? 나 꼭 1호사인이 갖고 싶은데.”
“지, 지금해드릴게요.”
그렇게 예훈의 첫 번째 사인은 수빈에게 돌아갔다.
사실 타블렛 정도야 용돈으로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부족함 없이 자랐던 예훈이었지만, 수빈이 어떤 마음으로 그걸 선물했는지 알기 때문에 정말 큰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수빈이 가족들 앞에서 예훈의 그림 실력을 치켜세우는 일이 잦아졌고, 그저 별볼일 없는 취미 정도로만 여기던 식구들은 예훈의 그림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는 일이 많아졌다.
까칠하기만 했던 예나는 짜증이 줄었다. 시한폭탄 같기만 하던 골칫덩이 막내딸은 어느새 애교도, 웃음도 많아졌고, 수빈과 종종 외출을 나가고는 했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들이 어느새 자연스러운 집안의 풍경이 되었고, 무채색으로만 보이 던 건조한 일상은 풍부한 색감을 머금은 채 향기를 내뿜었다.
예준은 이 모든 게, 수빈이 있어 가능한 일이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대망의 집들이 날이 되고야 말았다.
수빈은 시어머니인 소정과 친정엄마인 정남이 보내준 밑반찬들을 꺼내놓고, 메인 요리들은 직접 팔을 걷어붙인 채, 그동안 갈고 닦아온 실력을 발휘하기로 했다.
메인 요리는 갈비찜과 새우, 전복버터구이. 그리고 잡채였다.
전복에 버터소스를 바르던 수빈이 힐끗 조리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까만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채 야채를 썰고 있는 예준이 있었다.
칼질하는 걸 보니, 어느 세월에 저걸 다 하려나 싶을 정도로 서툴기만 한데, 그림만 보면 또 예술이다.
넋 놓고 예준을 바라보던 수빈이 휴대폰을 꺼내 그의 모습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나자 예준이 고개를 들었다.
“……나 찍은 거야?”
“응. 엄마한테 보내주려고.”
“장모님?”
“어.우리 엄마 사위 사진 모으는 게 취미잖아. 지예준 콜렉터라니까, 아주?”
수빈이 킥킥 웃으며 만족스러운 듯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오 이거 완전 잘 나왔어. 봐봐.”
쪼르르 예준에게 달려간 수빈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때? 잘 나왔지.”
“피사체가 훌륭하니, 결과물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예준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핀잔을 주었다.
그의 말을 깔끔히 묵살한 수빈이 제 하고 싶은 말만 해댔다.
“요섹남 같아.”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아니. 요섹히 한 대 콱 때려주고 싶은 남자.”
“헤헤. 수고해.”
싸늘하게 굳은 예준의 옆구리를 팔로 툭 친 수빈이 다시 종종거리며 제자리로돌아갔다.
분주하게 상을 차려놓고 보니 쉬는 날이거나 오전 근무를 마친 동료들이 먼저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중엔 수빈의 동기인 성호도 있었다.
예준에게는 술자리에서 남의 아내에게 함부로 엉덩이 온기를 나눠준 기분 나쁜 녀석일 뿐이라 썩 반갑지는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성호가 먼저 웃으며 인사했고, 예준은 보란 듯이 수빈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화답했다.
“어서 오세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섰다.
“우와! 이거 전부 부지배인님이 하신 거예요?”
영하의 감탄 어린 탄성에 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밑반찬은 양가 어 머 님들 솜씨고, 메인은 신랑이 많이 도와줬어.”
사실을 전달했을 뿐인데, 뭔지 모르게 뿌듯했다.
“이야. 우리 수빈이 시집가더니 얼굴 핀 이유가 있었네. 남편분이 엄청난 애처가인가 봐, 아주.”
“그러 니까요 사랑받는 여자는 확실히 태가 난다니까요.”
이 과장과 김 지배인이 나란히 거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영하가 외쳤고, 파티가 시작됐다.
“아유. 부럽 다. 나는 왜 결혼을 했는데도 부럽지?”
김 지배인의 말에 성호가 고개를 끄덕였고, 영하가 맞장구쳤다.
“저도 결혼 관심 하나도 없었는데, 수빈 부지배인님 보니까 진짜 부쩍 하고 싶어진 거 있죠. 저 진짜 소개팅이라도 할까 봐요.”
턱을 괸 채 한숨을 포르륵 내쉬던 영하의 시선이 불현듯 상 아래를 향했다.
때마침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예준은 보란 듯이 수빈의 손에 제 손을 깍지 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척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한손으로 턱을 괸 채 영하에게 씩 웃어 보인 그가 맘껏 부러워하라는 듯 수빈의 손등 위를 만지작거 렸다.
“아아아.”
대놓고 쪽쪽 입술 박치기를 하는 것보다 훨씬 건전한 애정 표현이건만, 깍지 낀 손을 만지작거리는 행위가 저렇게 야해 보이긴 또 처음이다.
“부럽다아아아. 부러워 죽겠다아아아.”
상 아래에서 분주하게 움직 이고 있는 신혼부부의 나쁜 손에 영하는 땅이 꺼져라 탄식을 쏟아냈다.
“왜 그래? 영하?”
이 과장의 물음에 영하가 상 아래를 가리키며 우는소리를 했다.
“둘이 상 아래에서 막 야한 짓해요! 여기, 저기 막 만지고!”
“야! 우리가 언제……!”
몹시 당황한 수빈이 얼른 손을
빼내려했지만, 예준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쥔 채 넉살 좋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와, 두 사람 둘이 있을 땐 장난 아니겠는데?” 성호가 놀리듯 건넨 말에 예준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신혼부부인데 말해봤자 입만 아프죠.”
여유 있는 웃음은 기본이었다.
그렇게 승리는 예준의 몫이오, 의문의 1패를 당한 성호는 조용히 눈물을 삼켜야했다.
겉으로만 보기에 두 사람은 위화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완벽한 신혼부부였고, 손님맞이는 더없이 완벽했다.
신나게 먹고 마시던 동료들은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돌아갔고, 소파 위엔 그들이 남기고 간 선물 상자 두 개만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어휴. 드디어 끝났다.”
파김치가 된 그녀가 예준의 옆구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가.
“앗, 미안”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에 얼른 떨어졌다.
그녀가 뒤늦게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와. 우리 진짜 너무 몰입했나 보卜. 연기를
했어야 돼, 둘다.”
당황해서 멀어지는 수빈을 바라보던 예준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어쩜 이렇게 위화감이 없냐.”
자신이 민망할까 싶어 맞장구쳐주는 그의 반응이 고마웠다.
수빈이 소파에 걸터앉은 채 쇼핑 봉투 두 개를 허공에 흔들었다.
“이건 직원들이 다 같이 준비한 거고, 이건 여자 직원들이 따로 준비한 거래.”
“열어봐,,
“같이 열어보자.”
수빈이 신이 나서 외쳤지만, 잠시 후 그녀는 같이 열어보자고 했던 자신의 말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첫 번째 선물을 개봉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안에 들어있던 건 입체감이 훌륭한 보름달 모양의 커다란 무드등이었으니까.
몇 번이나 딸칵딸칵 스위치를 껐다 켜며 ,우와! 예쁘다.'를 반복해 외쳤었다.
문제는 두 번째 선물이었는데…….
손끝에 웬 새하얀 양파망이 걸려나온다.
시골 큰아빠가 냇가에서 고기 잡을 때 쓰던 뜰채의 망인 것도 같고, 모기장 같기도 한……
“뭐야. 이게……T
수빈은 제 손으로 꺼내놓고도 이게 뭔지 모르는 눈치다.
그러자 예준이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소파에 기대 앉아 대답했다.
“보면 몰라? 속옷이잖아.”
“……속옷?”
“망사 팬티 같은데? 이건 뭐야. 슬립?”
예준이 상자에 가지런히 놓인 또 다른 모기장을 꺼내 들더니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피식 웃었다.
“맞네. 슬립.”
“와. 엄청 야한데? 원래 흰색이 제일 야한
“내, 내놔!”
기겁한 수빈이 예준의 손에 들려있던 망사 슬립을 거의 낚아채듯 빼앗고는 얼른 그걸 다시 상자에 구겨 넣고 뚜껑을 닫았다.
“왜? 입어보지.”
“입으면 뭐. 네가 봐줄 거야?”
“그럴까?”
1초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대꾸에 수빈이 예준의 어깨를 때렸다.
“아!”
“이 변태 ! 그럴까, 는 뭐가 그럴까, 야!”
“변태는 이걸 사온 사람들이 변태지, 왜 엄한 날 잡고 난리야?!”
억울한 예준이 항변했지 만, 수빈은 주방으로 도망치듯 사라져 버 렸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분노의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런데 예준이 와 수빈의 손에 껴진 고무장갑을 벗겨내고는 그녀를 살포시 밀어낸다.
“내가 치울 테니까, 가서 쉬어.”
“왜?’,
“요리하느라 힘들었잖아.”
“변태인 거 걸린 거 민망해서 일거리 찾는 건 아니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준이 고무장갑을 벗는 시늉을 했다.
“니가 해.”
“아아! 알았어. 농담이야, 농담! 같이 하자.”
수빈이 얼른 그를 뜯어말리고는 접시를
나르기 시작했다.
부부는 밤이 새도록 사이좋게 설거지를 하고 나서야 소파에 널브러지듯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