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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51화 (51/63)
  • 51 화

    휴일을 맞아 모처럼 함께 쉬게 된 주말.

    일어나자마자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고 있던 수빈은 예준의 등장에 입 안 가득 담고 있던 냉수를 시원하게 뿜었다.

    “푸학!”

    “으

    r

    물 한잔 마시려다 아침부터 냉수 싸대기를 맞은 예준이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날렵한 턱 선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괘, 괜찮아?”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진 수빈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 나 집어 그의 얼굴을 닦아

    내렸다.

    ……행주다.

    냉수 싸대기보다 이게 더 기분 나빠.

    가늘어진 눈매가 수빈을 응시한다.

    “세차해?”

    내 얼굴이 자동차냐고.

    “……미안합니다아아.”

    할 말이 없어진 수빈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여전히 붉게 상기된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예준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잡아 내렸匚匕

    웃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헤퍼진 것도 큰일인데, 이제는 통제조차 힘드니 총체적 난국이 다.

    짧은 침묵 후.

    죄인이 된 수빈의 머리 위로 전혀 다른 화제가 떨어졌다.

    “놀러 갈래?”

    툭 불거져 나온 듯한 예준의 말에 잘 익은 벼처럼 숙여져있던 수빈의 고개가 스프링처럼 튕겨져 올라왔다.

    “놀러가자고?”

    “。99 ■o.

    “어디로?”

    “그냥 아무 곳이나. 드라이브하러.”

    “쉬는 날이잖아. 간만에.”

    예준이 수빈의 곁을 살짝 스쳐지나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어디가고 싶었던 데 없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빈은 신이 나서 좋다고 대답하려다가, 곧 생각을 바꾸고 짓궂게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언제 같이 시간 맞춰 밥 먹던 사이였냐고 타박을 하던 예준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예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따라한 채 목소리를 힘껏 깔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쉬는 날 같이 놀러 다니던 사이였지?”

    오만한 팔짱과 짝다리는 옵션이었다.

    그녀의 건들거림에 예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싫으면 말고.”

    그러더니 미련 없이 물 한잔을 비우고 돌아선다.

    어? 이게 아닌데!

    “야!”

    이런 건 시간끌수록, 더 부끄러워지니까 빨리 수습하는 게 답이다.

    “에이! 장난이지, 장난!”

    하여간.

    이런 건 또 한결같이 매몰차서, 당최 받아주는 법이 없다.

    수빈은 빠르게 달려가 예준의 팔에 제 팔을 끼워 넣고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완전 좋아. 우리 어디로 갈까? 김밥 쌀까?”

    “어느 세월에. 그냥 외식해.”

    “좋아! 맛있는 거 먹자!”

    팔짱을 낀 그녀가 더욱 흥분한 채 방방 뛰며 몸을 밀착해온다.

    그런데 순간 예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말랑한 감촉이 그녀가 뛸 때마다 위아래로 출렁이며 팔뚝을 쓸어내렸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준이 도 닦게 된 줄도 모르고 수빈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예준은 울고 싶었다.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제길.

    난데없이 인고의 시간이 닥쳤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닿을 때마다 팔에 전기가 찌릿찌릿 오르는 느낌이었다.

    너 나한테 여자 아니라고.

    신수빈이 안 입느니만 못한 손바닥만 한 잠자리 날개를 걸치고 내 앞에서 패션쇼를 해도, 내 마음은 그저 잔잔한 호수마냥 평온할 거라고 호언장담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의 내면엔 풍랑이 일고 태풍이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역시 말이라는 건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닫게 된 그였다.

    그냥 봐도 예쁜 그녀가 자꾸만 설렘 포인트를 툭툭 건드린다.

    아니, 아주 휘휘 휘젓다 못해, 들쑤시고 헤집어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든다.

    속으로 애국가를 열창하던 예준이 얼른 수빈의 머리를 밀어내며 팔을 빼냈다.

    “……팔짱끼라고 한적 없어. 멋대로

    들러붙지 마.”

    아.

    이게 아닌데.

    민망함에 되레 불쾌함을 내비쳐버렸다.

    “쳇.,,

    지는 막 아무 때나 내 머리 쓰다듬고 그랬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수빈은 도끼눈을 뜨며

    꽁알거렸다.

    몸을 돌려 욕실로 걸어가던 수빈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다시 걸음을 멈추고 예준을 불렀다.

    “지 씨 !”

    “저게 또 지 씨라고……

    “식구들이 랑 다 같이 가는 거 어때?

    일요일이라 다들 집에 계실 텐데.”

    “……다 같이 가자고?”

    “응!”

    어쩐지 흔쾌히 그러자는 대답이 안 나왔다.

    간만에…… 아니, 처음으로 함께 하는 외출에 시댁 식구들과 함께 가는 게 좋겠다며 눈을 빛내는 아내라니.

    잠시 나마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은 건 왜일까.

    할머니 아시면 되게 서운하시겠네.

    ……죄송해요, 할머니.

    예준은 자기도 모르게 들었던 낯선 감정에 자책을 하며, 수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뭔가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이걸 일이라고 생각해 결정한 일이라고 해도, 잘 해내주고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갖기로 했다.

    말이 없는 예준의 눈치를 살피던 수빈이 다시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소심하게 잡고 웃었다.

    “아침 자주 못 먹는 대신에, 할머님 그나마 건강하실 때 같이 외식도 하고 놀러 다니자고 약속했잖아. 왜. 싫어?”

    “싫긴 왜 싫어.”

    예준이 가볍게 수빈의 코끝을 손끝으로 튕겼다.

    “아야!”

    제 코끝을 부여잡은 수빈이 분한 듯 방방 뛰었다.

    “네가 싫다고 했어도 갈 거였거든, 바보야!”

    “뭐 기 너 지금뭐 라고했어 !”

    “아, 몰라 이 말미잘! 외출 준비나 해!” 딸기처럼 빨개진 코끝을 비비던 수빈이 재빨리 말미잘 모친에게 전화를 걸며 멀어졌다.

    “어머님, 저예요!”

    홍홍홍. 신이 난 듯 콧소리가 평소보다 풍부하게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준이 조용히 웃으며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어디 해외 휴양지라도 가?”

    한껏 들뜬 기색이 역력한 수빈의 차림새를 본 예준이 물었지 만, 수빈은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식으로 신이 나서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데 딱히 수빈을 흉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머지않아 들었다.

    다들 어찌나 멋을 부렸는지, 예준은 오히려 지나치게 평범한 자신의 차림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어디 멀리 가시나 봐요.”

    장거리 이동이 부담스러울 애자 때문에라도 차 타고 30분 이상을 못 갈텐데, 차림새는 흡사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사람들 같았다.

    “가족 여행은 처음이잖니.”

    소정이 주먹만 한 선글라스를 추어올리 며 대꾸했다.

    “그냥 근처에서 밥이나 한끼 먹고 돌아올 거예요.”

    “근데?”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 “오해 안 했는데? 어쨌든 다 같이 하는 외출은 처음이잖아.”

    어깨를 으쓱이던 소정이 예준을 지나쳤다.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은 출발이었다. 온몸으로 싫은 티 팍팍 낼 거라고 생각했던 예나도 얌전했고, 훈탁이 식사 시간 이외의 가족 모임에 모습을 보인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아니 사실은 소정의 말처럼 삼대가 모두 모여 제대로 된 외출을 시도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예준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덕분에 다인승 차까지 대절해야했다.

    “출발할게요.”

    예준이 서서히 차를 움직였다.

    어쩐지 운전기사가 된 것 같았지만, 손해 보는 기분은 아니었다.

    가까운 근교로 나간 식구들은 짧은 산책을 마치고, 수빈이 미리 예약한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애자의 건강 상태를 배려한 짧고 굵은 코스였지만, 그 어떤 여행보다 값진 외출이었다.

    “할머님 혹시 춥거나 덥진 않으세요?”

    “괜찮다.”

    수빈의 살뜰한 챙김에 애자는 눈가가 자글자글해지도록 웃었다.

    “저희 사진 한 번 찍어요!”

    집에 돌아가려는데 예나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다들 저게 무슨 바람이 들었나 하는 얼굴로 예나를 쳐다봤다.

    전에 없던 행동에 자신도 민망했는지, 괜히 옆에 있던 예훈의 옆구리를 툭 친다.

    “뭐하고 있어? 빨리 할머니 휠체어 밀어드려.”

    “어. 알았어.”

    멍하니 서있던 예훈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오오 좋은 생각이에요!”

    수빈이 물개박수를 치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제가 찍어드릴게요. 얼른 자리 잡으세요.”

    힘차게 외친 그녀가 전문 작가 뺨치는 듯한 자세로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지 씨네 삼대가 동시에 수빈을 바라보았다.

    “가족사진인데, 제일 예쁜 우리 손자며느리가 빠지면 어쩌자는 거냐!”

    “그래・ 어서 이리오렴.”

    계춘과 애자가 펄쩍 뛰자, 훈탁과 소정도 어색하게 손짓을 했다.

    오세요, 형수님. 같이 찍어요.”

    예훈의 말에.

    “맞아. 가족이 다 같이 찍어야 가족사진이지. 빨리 와요, 언니.”

    예나가 맞장구를 쳤다.

    “……어.”

    살짝 당황한 수빈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자, 예준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그러더 니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받아 지나가던 행인에게 부탁을 하며 넘겨주었다.

    “실례합니다. 사진 한 장만부탁드립니다.”

    “아, 네.”

    지 나가던 중년의 부부가 선뜻 다가왔고, 남자가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휴대폰을 주고 돌아선 예준이 그대로 수빈의 손을 잡았다.

    “가자.”

    그는 수빈과 함께 망설임 없이 가족들 사이로 걸어갔다.

    사실 수빈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 떠나도 이 사진은 남을 텐데, 어쩌면 완벽한추억으로 남겨질 이 사진이 떠올리면 씁쓸한 기억으로 남을까 보卜.

    “자, 찍습니 匚匕 한서너 장 찍을게요.”

    남자가외치더니, 곁에 서있던 그의 아내가 조금 더 가까이 붙으라며 세심하게 구도를 잡아주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수빈의 얼굴을 힐끔 바라본 예준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웃어.”

    그 말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봤지만, 자연스럽게 웃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예준이 불시에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웃으라고.”

    “파핫!”

    수빈이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그 소리에 다른 식구들도 다 같이

    크게 웃었다.

    신혼여행 때 하나우마베이에서 사진을 찍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어.' 하고 말했었는데.

    수빈이 입술을 꾹 물며, 예준을 올려다보자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웃어.”

    “웃고 있잖……

    “넌 웃을때가제일 예뻐.”

    예고도 없이 날아든 예준의 말에 수빈의 눈이 커다래졌고, 곧 귀가 빨개졌다.

    “거기여자분. 이쪽 보시겠어요?”

    남자가 손짓을 하자, 수빈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아! 네, 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네, 지금 딱 좋네요! 찍습니다,

    그럼!”

    화면을 들여다보던 부부가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띠며 외쳤다.

    “자! 하나……

    수빈은 천천히 입꼬리를 늘여 미소 지었다.

    그래. 언제 보더라도 오늘의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의 한조각이길 바란다.

    그러니까 언제 보더라도 기분 좋아지도록, 웃자.

    “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셋!,,

    우리 모두는 행복할 테니까.

    찰칵.

    지 씨 삼대의 첫 가족사진이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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