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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50화 (50/63)
  • 50 화

    “걱정 마. 어차피 걔 절대로 너 고소 못할 테니까. 혹시나 너 형사처벌 받게 되면 나도 걔 고소해서 지옥을 맛보여줄 거야.” 진심이었다.

    수빈은 그때는 확 고소라도 해볼 요량으로 증거를 다 남겨두고도 그를 처벌하는 일 자체에 회의감을 느껴 하지 않았지만, 그 증거물은 어쩌면 오늘을 대비해 챙겨놓았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뻔뻔하게 폭행 운운하며 예준을 고소하려 든다면, 어떻게든 더 큰 처벌을 받게 만들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감히 예준을 고소할 일 따위 꿈도 꾸지 못하게

    “아무튼 나만 믿어. 너 절대 고소 못하게 할 거니까.”

    이유는 모르겠지 만, 그날에 버금가는 분노가 넘쳐흘렀다.

    눈빛이 형형한 수빈의 각오에 예준의 입꼬리는 자꾸만 더 위로 향했다.

    아까는 눈이 뒤집혀 뵈는 게 없을 만큼 화가 났었는데, 집 나간 이성이 되돌아온 느낌이다.

    “조그만 게 되게 든든하네.”

    “나 안 조그맣거든?”

    조그만 게 눈을 부릅뜬다.

    예준은 그런 수빈의 모습이 귀여워 또 한 번 그녀의 머리를 아이처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수빈이 고개를 홱 뒤로 빼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 이런 거 하지 마.”

    “……왜?”

    왜긴 왜야. 기분이 이상해지니까그러지.

    설레기 싫은데, 내 의지랑은 상관없이 자꾸 설렌단 말이야.

    인정하기 싫어 꿋꿋하게 외면해오던 거라 더 마음이 착잡했다.

    수빈은 목구멍을 맴도는 대답을 꾹 삼키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지겹게 맞고 커서 폭력에 민감하다는 건 예준 자신도 알았고, 수빈도 어렴풋이 예상했다.

    결국 수빈은 예준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다짐 비슷한 말을 꺼내놓았다.

    “타인한테 그만 상처받고 살자.”

    굳이 누군가에게 상처 받지 않아도 술由이 늘 즐겁지만은 않은데, 삶은 늘 즐겁기만 해도 너무 짧잖아.

    그러니까 이제 우리 그만 상처 받고, 그만 날 세우고 그냥 행복하게 살자고.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말이었다.

    아무 말이 없는 예준 대신 수빈이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다른사람들이 다 너 욕해도, 나는 네 편들어줄게.”

    덤덤히 꺼내진 그녀의 말에 예준은 문득 묻고 싶었다.

    언제까지 그래줄 수 있겠냐고.

    언제까지 세상 모두가 날 욕해도, 너는 끝까지 내 편을 들어줄 수 있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묻지는못했다.

    대신

    “내일부터 일 끝나고 매일 데리러 갈게.” 약속을 건넸다.

    네가 내 옆에 있는 동안은 나도 최선을 다해 널 지켜주겠다고.

    그제야 수빈은 고개를 들어 예준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았는지,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작게 되물었다.

    “야근…… 자주 하잖아.”

    “앞으로는 집으로 가져와서 할 거야.”

    “출장은?’,

    “같이가면 되지.”

    “뭐?’,

    예준의 대답이 너무 망설임 없어 하마터면 그렇구나, 하고 고개라도 끄덕일 뻔했다.

    대쪽 같은 그의 의지에 수빈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떻게 번번이 출장을 같이 가냐?”

    “그럼 가끔만 같이 가던가.”

    눈 하나 깜짝 않고 한술 더 뜨는 예준이 었다.

    “나머지는 김기사님 보낼 테니까, 꼭 집 앞까지 데려다달라고 해.”

    아. 진심인가?

    난감하다. 이런 낯선 다정함.

    수빈은 어이가 없어 웃다가, 곧 포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그녀의 심경을 몽땅 담고 있는 짙은 한숨이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훈훈한 사이가 되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을 걱정해야만 하는 이상한 관계로 지내는 걸까.

    목적이 뭐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분명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 시작한 일이 었는데, 분명 행복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락되지 않는 행복이라니.

    이처럼 불행한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수빈은 쓰디쓴 마음을 뒤로한 채 애써 웃음을 머금고는 곧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맞아 죽을 때까지 돌 던진다고 할 땐 언제고.”

    이번엔 예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여간 분위기 개판 만드는데 뭐 있다니까.”

    “줍!”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 미 바라보던 두 사람은 조용히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그냥 그걸로 족했다.

    ,,아, 맞다,,

    예준이 재킷 주머니를 뒤적이며 혼잣말했다.

    “사실은 이거 사오느라 좀 늦었어.”

    “이게 뭔데?”

    그의 손에 들려나온 네모난 케이스를 받아들며 수빈이 물었다.

    “네 생일 선물.”

    덤덤히 흘러나온 예준의 대답에 수빈이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조심히 케이스를 열어보니, 로즈골드 컬러의 목걸이가 반짝였다.

    화관을 축소해놓은 듯한 동그란 팬던트 아래에는 물방울무늬의 작은 보석이 달려있었다.

    “……허어.”

    수빈이 입을 손으로 가리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왜? 맘에 안들어?”

    “아니.”

    “근데 반응이 왜 그래?”

    “너무맘에 들어서.”

    너무 맘에 들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에 예준은 적잖이 장황한 눈치였지만, 수빈 또한 진심이었다.

    이렇게 마음에 꼭 드는 선물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예준의 센스가 이 정도였다는 것 역시, 큰 충격이었다.

    “……진짜 예쁘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액세서리 중 단연 최고라며 그녀가 작고 조그만 엄지를 치켜들었다.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

    예준도 그녀를 따라 조용히 미소 지었다. 수빈은 곧장 목걸이를 꺼내 제 목에 둘렀다. 긴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가지런히 모아 내리고 열심히 손끝을 움직이고 있자니, 지켜보던 예준이 손을 뻗어 목걸이 끝을 잡았다.

    목 언저리에 닿는 그의 손길이 낯설어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앗!”

    “아, 움직이지 좀 마.”

    “간지러워서 그래. 나 간지러움 많이 탄단 말이야.”

    수빈의 말에 예준이 아예 고개를 내리고 목덜미에 코를 파묻을 듯 가까이 다가섰다.

    “그래도 가만히 있어.”

    “악! 너 일부러 이러지!”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수빈이 눈을 감고 소리쳤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예준은 대놓고 귓가에 바람을 훅 불었다.

    “아악! 야!”

    수빈이 손사래를 치며 파리 쫓듯 고개를 뒤로 뺐다.

    아이처럼 웃던 예준이 목걸이를 채우고는 멀어졌다.

    “됐다.”

    그가 소파에 앉아 턱을 괸 채 수빈을 바라보았다.

    싱긋 웃는 예준의 모습에 수빈이 고개를 내려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오!■아. 진짜 예쁘다.”

    그녀의 눈이 별을 부셔서 뿌려놓은 듯

    바짜5 다

    신이 난 수빈이 가슴을 활짝 펴서 내밀며 손끝으로 자신의 쇄골을 쓸었다.

    “어때?”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마음껏 예쁜 척을 한다.

    “예뻐? 잘어울려?”

    예쁘냐고 묻는 수빈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예준이 웃으며 뒤늦게 고개를 끄덕 였다.

    “어.예뻐.”

    “진짜? 망설이다 대답한 거 보니까 아닌 거 같은데?”

    “진짜.”

    “엄청 예뻐.”

    진득하니 마주해오는 시선이 낯설기도 하고, 무척 이 나 간지 럽 다.

    “..어?”

    이상하다.

    그냥, 목걸이가 예쁘다는 뜻일 텐데. 저 눈빛은 뭐냐고.

    그의 눈에서 자기도 모르게 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는 걸, 수빈이 느끼고 예준 본인도 느끼는 순간.

    분위기가 묘해져버리고 말았다.

    나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느낌이랄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지는데 눈동자가 묶여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달랐다.

    평소의 그 어색함과는 어쩐지 다른 향기를 풍기는 게, 그들이 평소 느끼던 무안하고 민망한 어색함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의 어색함이 었다.

    '무슨 생각하냐? 너 말고 목걸이. 목걸이가 예쁘다고.’

    '설마 내가 예쁘다고 한 게 너인 줄 안 건 아니지?’

    '미쳤구나, 네가. 드디어 미쳤어.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

    그렇게 면박을 주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예준은 오늘따라 쓸데없이 과묵하다.

    아, 제발.그 눈빛 좀 어떻게 해보라…….

    순간.

    예준의 시선이 살짝 내려오는 게 보였다.

    자신이 보는 각도가 맞다면 그가 쳐다본 곳은 분명 자신의 입술이었다.

    흠칫 놀란 수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느, 늦었다! 얼른 자자!”

    허둥대는 그녀의 모습을 예준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목걸이 고마워 ! 잘 자!”

    수빈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웃고는, 고장 난 양철로봇처럼 제 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온 수빈은 문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아. 난몰라.”

    하마터면 그대로…….

    무슨 생각을 한거야, 정말.”

    수빈의 심장이 요동쳤다.

    자신과 예준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건 누구라도 눈치챌 만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심경의 변화가 가져다줄 변화를 받아들일 자신이 있냐는 것.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예준과의 결혼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결혼 자체가 엔딩까지 정해진 완벽한 각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두렵기도 했다.

    현실은 다르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진심이 수반되는 순간 더 이상 연극이 아닌 것이다.

    나만 이런 거면 어쩌지.

    그냥 나혼자만의 착각이면 어쩌나.

    김칫국 마시고 쇼하다가 결국 또 상처받고 혼자 남겨지고, 시간이 지나 남는 건 기억하기 싫은 기억들뿐일까 봐 겁이 났다.

    지예준.

    너는 어때?

    ……우리는정말이대로괜찮을걸까?

    한편, 방으로 돌아온 예준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른세수를 하던 그의 입술 사이로 묵직한 한숨이 흘러 나왔다.

    “큰일 났네.”

    함초롬한 그녀의 입술이, 반짝이는 눈빛이, 농염한 목선이 자꾸만 이성을 헤집어놓는다.

    수빈이…… 세상 누구보다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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