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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49화 (49/63)

49 화

“수빈아. 삼겹살 먹으러 가자!”

퇴근 후, 이 과장은 호텔이 떠나가라 외쳤다.

하지만 예준에게서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은 후였다.

아침에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나 보다.

수빈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안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하. 저는 남편이 데리러 오기로 해서.”

이런 대답을 하게 될 날이 오다니. 자기가 뱉어놓고도 그저 신기하기 만 하다.

수빈의 거절에 이 과장은 빈정이 상해버렸다.

“너 결혼하더 니 진짜 변했어. 깨 볶느라 바쁘지? 혼자만 볶으니까 좋으냐? 어? 좋아?

배신자 같으니.”

……시댁 식구들이랑 밥 먹느라 그런 거예요, 과장님.

물론 깨 볶는 정도는 아니 어도, 둘이 살아 즐거운 일도 생기고 있는 요즘이지만 말이다.

수빈은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수빈의 선배 지배인이 말했다.

“신혼인데 봐줘요. 아침에 봤는데 진짜 그대로 다시 차 태워 못 보내준 게 막 내가 다 나쁜 사람 된 거 같고 그랬단 말이에요.”

보는 눈이 많은 곳이라는 건 알았는데, 예준이 데려다준 걸 본 게 영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 찰나를 참 많이들 목격했다.

“에휴.”

이 과장은 입이 비죽 튀어나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기러기 아빠 서러워 살겠냐. 알았다.

배신자는 그만 갈 길 가렴.”

처연한 그의 뒷모습에 수빈이 맘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죄송해요, 과장님 나중에 집들이 한 번 초대할게요.”

순간 이 과장의 눈빛이 짐승처 럼 돌변했다.

“야.너네 다 들었지?”

수빈은 아차, 싶었다.

“언제할 건데.”

물밀듯이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늦은 상황.

“네? 아, 그게…… 나중에.”

수빈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자, 이 과장이 코웃음을 쳤다.

“나중 같은 소리하네. 먹힐 거라 생각했어? 나중에? 이 나한테 그게 통할 거라고?”

아. 안돼.

뭔가 주워 담을 수 없는 망언을 한 기분이다.

“지금당장정해. 어서.”

이 과장이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랑이랑 시간도 맞춰야 하고……

“다음 달로 하자. 그 안에 정해라 진짜 찾아간다.”

“그러니까과장님, 제가 신랑이랑 얘기해보고……

“대답 안 하냐? 여차하면 네 신랑 차 타고 오늘 바로 같이 가는 수가 있어 .”

식겁한 수빈이 고개가 부러질 듯 끄덕여댔다.

“다, 다음 달로 하죠!”

“다들 들었지? 다음 달이라고 신수빈 분명히 말했다.”

모두가 신이 나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들었습니다!”

“네에 ! 좋아요!”

……이것들이! 한통속이었냐?

기어이 수빈의 대답을 듣고서야 이 과장과 똘마니들이 멀어졌다.

그녀는 멀어지는 동료들의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아. 지예준한테 죽었다.

수빈이 편두를 짚던 그때였다.

경적 소리가 짧게 울리더니 멀리서 검은 차 한 대가 다가왔다.

“양반은 못되네.”

혼잣말을 하는 그녀의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리며 올라섰다.

“음?,,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당연히 예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준이 아니었다.

차가 가까워올수록 수빈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갔다.

익숙한 차였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차.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타.”

바로 건호였다.

수빈이 굳은 얼굴만큼이 나 딱딱한 음성을 뱉어 냈다.

“뭐야. 너.”

“타라고.”

“무슨 소리야! 우리 이제 볼일 없는 걸로 아는……

“타라면 타지 말이 많아!”

건호가 위협적으로 클랙슨을 내리치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수빈은 깜짝 놀라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고, 건호는운전석에서 내리더니 다가와 다짜고짜 수빈의 팔목을 낚아챘다.

“왜,왜 이래, 너 ! 진짜 미쳤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비명이 절로 나올 만큼 손목을 옥죄는 힘만 강해졌다.

게다가 가까이서 맞닥뜨린 건호에게는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겼다.

“설마……,술 마셨니기”

수빈의 물음에 그가 반쯤 풀린 눈으로 탁해진 음성을 뱉었다.

“그래. 하루라도 맨 정신으로 살기가

힘들어서 좀 마셨어.”

저렇게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니 .

미쳤구나,정말.

수빈이 질색을 했지만, 건호는

막무가내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

낮게 뇌까리는 그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만큼 싸늘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라버린 것이다.

건호는 술만 마시면 전혀 다른 사람처 럼 인격이 변했었다.

그때마다 다투다가 결국 마지막엔 그에게 맞아서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단 한 번이었지만,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그 일로 인해 둘은 결국 다시는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정 남과 방훈이 자신의 얼굴을 봤다가는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아, 병원 치료를 받는 동안 친구와 여행에 다녀온다고 둘러댔었다.

술이 깬 그가 울고불고 빌었지만, 사이를 회복하기엔 이미 너무 멀어진 후였다.

그와 만났던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건호 집안의 반대에도 꿋꿋이 견뎌오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고,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다시는 그에게 휘둘릴 수 없었다.

“지금 안 놓으면, 소리 지르고 경찰 부를

거야.”

그럴 이유가 없었다.

완강히 버티는 수빈을 내려다보던 건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 그때처럼 맞아야 정신 차릴래? 험한꼴 보기 싫으면 그냥 조용히 따라와.”

“……뭐라고?”

수빈은 제 귀를 의심했다.

“나랑 결혼하겠다고 할 땐 언제고, 그새 남자가 생겨서 시집을 가? 더러운 년.”

퍼억

“악!”

들고 있던 핸드백으로 있는 힘껏 건호의 옆통수를 가격한 수빈의 눈에서 분에 찬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더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이 쓰레기 새끼야. 너야말로 재활용도 안 되고 고쳐 쓰지도 못하는 핵폐기물이라고. 알아?”

“이게 진짜……!”

“네가 뭔데 날 함부로 대해 !”

건호의 손이 올라갔지 만, 수빈이 그의 어깨를 가방으로 내려친 게 먼저였다.

퍼억

“아!”

그녀는 정말로 억울했던 듯 다시 한 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뭔데 나한테 상처를 주고 멋대로 거지같은 기억을 심어놓느냐고! 네가 뭔데!”

“안 닥쳐 ?”

악을 쓰던 수빈의 얼굴 위로 이번엔 건호의 주먹이 올라갔을 때였다.

수빈이 눈을 질끈 감았고, 곧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건호가 떨어져나갔다.

쿠당탕!

“어억!”

수빈이 꾹 감았던 눈을 떴다.

바닥엔 건호가 엎어져있었고, 제 앞엔 난생 처음 보는 얼굴로 서있는 예준이 보였다.

“……지예준.”

놀란 수빈이 조용히 그를 불렀지만, 예준은 아무런 대꾸 없이 바닥에 고꾸라진 건호만 응시할뿐이었다.

이상했다.

그가 워느f 서늘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긴 했어도, 이건 뭔가 달랐다.

그러니까뭔가…….

“죽여 달라고 발악을 하는 구나, 네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사는데 미련이 없으면…… 위험했다.

“그냥죽어버려, 너 같은거.”

이 순간, 예준은 극도로 건호를 혐오하고 있었다.

“자, 잠깐!”

뒤늦게 수빈이 그를 만류하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예준은 건호의 위를 점령해버린 후였다.

그리고 건호는 자신의 얼굴 위로 내리꽂힌 예준의 주먹에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지예준!”

수빈이 소리를 지르며 얼른 달려가 예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놔, 이거.”

예준이 수빈을 등에 매단 채 또 한 번 주먹을 휘둘렀고, 그의 새하얀 얼굴에 건호의 피가 튀었다.

기겁을 한 수빈이 예준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안 돼! 하지 마!”

“놓으라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 패는 재미로 세상 사는 새끼들은 싹 다 뒤져버려야 돼.”

“그만하라고, 제발!”

소리를 지른 수빈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무섭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만해. 응? 부탁이야. 제발 그만하고…… 집에 가자.”

겁에 질린 수빈이 덜덜 떨며 애원했다.

그제야 예준이 기절한 건호를 내려다보며 말아 쥔 주먹을 조용히 내렸다.

소리를 들은 호텔 직원들이 뒤늦게 뛰어나와 상황을수습했다.

경찰서를 나왔을 때는 아주 많이 늦은 시각이었다.

“경고야.”

술에 취해 코피가 터진 줄도 모르고 거의 드러눕듯 앉아있던 건호에게.

“다신 수빈이 앞에 나타나지 마.”

예준은 마지막까지 경고를 날리고서야 걸음을 돌렸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문 여사가 경찰서의 문을 열자마자 고래고래 육두문자를 날리 며 들어왔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예준을보고는 꽁꽁 얼어 찍소리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예준은 핏발 선 눈으로 문 여사를 내려다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아들 귀한 줄 알면, 남의 딸 귀한 줄도 알아야지.”

기어이 예준에게 한소리를 듣고 나서야 문 여사도 부아가 치민 듯 소리쳤다.

“나한테는 내 아들이 더 소중해 ! 어 딜 감히 귀한 남의 새끼를 피떡으로 만들어놓고!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당신이야말로 내 아내 그렇게 괴롭히고도 무사하길 바랐어? 당신 새끼 피떡이 되든 개떡이 되든 알 게 뭐야. 나는 더 패주지 못해 화가 나는데.”

문 여사가 악에 받쳐 고래고래 악을 썼지만, 예준도 지지 않았다.

“그쪽한테 그쪽 아들이 더 소중한 것처럼.”

“나한테는 내 아내가 더 소중해.”

그의 묵직한 음성이 주변을 부유하는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말문이 막힌 문 여사가 그나마 만만한 수빈을 향해 눈을 홉떴지 만, 예준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경고했다.

“함부로 위협할 생각 마.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예준은 문 여사가 수빈을 저렇게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보는 것마저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끔 확실히 못을 박아두어 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 수빈이 인생 휘저어놓으면, 그땐 정말 갈 때까지 가는 거야.”

싸늘한 일갈이었다.

“……가자. 응?”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시간 스파크가 튀었으나, 수빈이 예준의 팔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 겨우 더 큰 소란을 막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간간이 훌쩍이는 수빈의 울음소리만 적 막한 공간을 메울 뿐이 었다.

아직도 이성이 다 돌아오지 못한 예준은 운전석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맞으며 화를 삭이기 바빴다.

어릴 적 자신이 폭행을 당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화를 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아까 호텔 앞에서 수빈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끄는 박건호를 보는 순간, 말 그대로 눈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했다.

자신이 경찰서에서 그 거지같은 모자에게 뭐라고 지껄였는지 기억마저 가물거렸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음은 확실해지고야 말았다.

“후우,,

복잡한 심경이 섞인 한숨이 바람결에 흩날려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수빈은 엉망이 된 예준의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냥 보기에도 당연히 괜찮지 않아 보여서 겨우 멈췄던 눈물이 도로 흘렀다.

“아. 왜 또울어. 울지 마.”

예준이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반대쪽 손끝으로 수빈의 눈가를 투박하게 쓸었다.

수빈은 제 손등으로도 눈가를 한 번 훔쳐내고는 구급상자를 가져와 열었다.

“얼른소독하고 약바르자.”

“됐어. 너나 해.”

껄끄럽다는 듯 손목을 비틀어 빼던 예준의 손목을 다시 낚아 챈 수빈이 힘을 꽉 주며 타박했다.

“나는 다친데 없거든? 너만 치료하면 도H. 그러 니까 가만히 좀 있어.”

“됐다고 유난 좀 떨지 마.”

“떨 거야, 유난!”

꽥 소리 지른 수빈이 소독약을 꺼내들고는 정성껏 예준을 치료해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준이 조용히 혼잣말하듯 물었다.

“……나한테 실망했지?”

“왜?’,

수빈이 여전히 예준의 손등 위에 신경을 쏟으며 덤덤히 물었다.

“폭력 썼잖아.”

예준이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수빈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박했다.

“정당방위야.”

“필요 이상이었어. 정당방위 아니야.”

“정당방위야. 나한테 있어서는

정당방위였어.”

“뭘 좀 알고 우겨 . 정당방위 라고 우겨봤자

택도 없……

“나 지켜주려고 그랬던 거잖아.”

수빈이 망설임 없이 얘기했다.

“그러니까 나도 너지켜줄게.”

그리고 예준은 더 이상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나도 너 지켜줄게.

그녀의 말을 곱씹던 예준은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져 버렸다.

분노로 얼룩져 한껏 날이 서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누그러지는 경험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이상한 마음이 들게 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한 번도 부리지 못했던 응석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고 할까.

생채기가 나있던 손등 위에 그녀가 덕지덕지 붙여놓은 밴드가 보였다.

예준이 조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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