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화
한번
……안아봐도 되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던 예준의 얼굴에 미세한균열이 일었다.
평소였다면 미쳤냐고 딱밤이라도 날리 며 받아쳤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나오던 그 당연한 반응이 어째서인지 쉬이 나오질 않는 당황스러운 상황.
예준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돼.”
하지만 거절을 당하고도 수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 들이댄다.
“나 오늘 생일인데?”
생일인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쏘아붙이 려다가, 한 번 꾹 눌렀다.
그래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조금만 더
친절해져보기로.
“자정 넘었어.”
“에이. 한번만.”
기껏 아량을 베풀었건만, 저 술또라이는 당최 굽힐 줄을 모른다.
술이 이렇게나 무서운 거란 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인생 흑역사를 갱신시켜
버리니까
“응응? 한 번만 뚜비니 오늘 땡일인데, 예듀니 댜꾸 그러묜……
“그만해. 여자 때리는 일만은 피하고
싶으니까.”
만렙이 되어버린 그녀의 애교⑺에 예준이 질색을 하고 떨어졌다.
당황스럽고 화가 올라와 얼굴이 벌게지는 느낌이었다.
그뿐인가.
못 볼꼴을 맞닥뜨린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널을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아.”
이 떨림은 뭐냐고.
순수 백 프로 분노가 아닌 것 같아서 더 기분 나쁘다고.
“늦었어. 얼른 자.”
예준은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냉큼 뒤를 돌았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수빈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다다다!
심상치 않은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려고 했을 땐, 이 미 늦은 후였다.
잰걸음으로 뛰어온 그녀가 망설임 없이 예준의 등에 고개를 묻으며 그를 세게 껴안았다.
로맨틱과는 조금 거리가 먼, 다소 격한 백허그였던지라 예준의 몸이 살짝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어쩐 일인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돌처럼 굳어버린 예준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던 수빈이 그의 너른 등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우리 둘 다 고생했고, 앞으로도 끝까지 잘해보자는 의미야, 이건.”
그러고는 틈새 없이 몸을 꽉 밀착한 채, 옅은 웃음이 섞인 숨을 흘렸다.
“여자당 게임하면서 좀 친해지나 싶었는데, 이제 네가 그것도 못하게 하잖아.”
잔뜩 발음이 꼬인 그녀가 툴툴거린다.
수빈의 팔목을 쥔 예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큰일이네.
뭔가 위험을 감지했던 게, 반응이 평소처럼 튀어나오질 않았던 게 이래서였나 보다.
지금 잡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아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잡아도 될까?
그러고 나면 더 욕심이 날 것 같은데.
뒷일 생각 안하고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것만큼 멍청한 게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는데, 지금은 냉정함을 조금씩 점령해가는 감정적 욕구에 이성이 가출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국 냉철한 이성도 힘없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예준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수빈의 손을 잡으려 던 그 순간.
기세 좋게 덤볐던 수빈이 불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홱 하고 떨어져나갔다.
예준이 뒤를 돌자 얼굴이 불고구마처 럼 달아오른 수빈이 보인다.
뭔데, 이 분위기.어떻게 수습할 건데.
그저 술기운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라고.
내일 아침에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정도의 포옹이 라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아니. 애써서라도 그렇게 여겨야만 했다.
속내를 드러낸 일로 어색함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수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어쭙잖은 변명을 뱉는다.
“아하하!”
시뻘게진 얼굴로.
“저,전우애가 막느껴지는 멋진 포옹이었다!”
전우애 같은 소리하네.
예준의 위태롭던 이성이 냉수마찰이라도 한 듯 빠르게 돌아왔다.
“누가 들으면 전쟁이라도 나가본 줄 알겠네.”
그래도 생각해서 기껏 찰떡같이
받아쳐줬건만.
“가끔은 사는 게 전쟁 같잖아.”
분위기 파악 못하고 분위기를 개판을 만드는 너, 어떡하지 진짜?
오그라들고 심각한 거 딱 질색인데.
하아
예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너 진짜…… 소질 있어.”
“무슨 소질?”
“분위기 개판 만드는 거.”
푸핫!”
칭찬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역시나 이렇게 또 마무리가 된다.
어쩌면 갑자기가 아닐지도 모를 이 변화가 언제든 어색하지 않게.
“잘자, 그럼.”
수빈은 싱긋 웃어보이고는 잰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무얼 하나 지켜보니, 술상을 치운다.
술상을 치우든, 밥상을 치우든 신경 꺼버리면 그만인데.
기껏 잡혀가던 분위기까지 깨진 마당에 뭐가 좋다고 자꾸 자존심도 없이 그녀의 뒤를 졸졸 쯫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휴우.”
수빈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예준이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일을 거들자, 수빈이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할게. 가서 자.”
“됐어. 같이 해.”
말만 무뚝뚝한 그의 다정함에 수빈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용돈 주셨다는 거 진짜야?”
“응. 너랑 보약 해먹으라고.”
“별일이네,,
“근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아버님도 똑같이 주셨다? 어른이 주면 그냥 받는 거라고 두 분 말씀하시는 것도 똑같고……,아무튼 그랬어.”
신이 나서 재잘대던 수빈이 급히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시부모님에게 예쁨 받는 게 남편에게 눈치 보일 일이 될 줄이야.
타박 받는 건 상관없는데, 혹시나 예준이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싶어 걱정이 되었다.
수빈이 눈치 보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예준은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나마 한 번 웃어주었다.
“뭘 눈치를 보고 있어. 네가 그만큼 잘해주고 있다는 증거인데.”
그가 손끝으로 수빈의 머리를 살짝 흩트려놓았다.
너무 눈치 보는 것 같아,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가볍게 했던 행동이었는데 수빈이 저렇게 놀란 토끼눈을 뜨니 괜히 민망했다.
“어머니랑 또 무슨 얘기했어?”
예준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걸로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했다.
“나 없을 때 우리 집 자주 놀러갔잖아 얘기 좀해보上 뭐하고 놀았는지.”
너 자랑하는 거 좋아하잖아.
예준이 우스갯소리를 덧붙였다.
“그래도 돼?”
그녀가 슬쩍 눈에 레이저를 밝히며 시동을 건다.
저럴 때보면 꼭 강아지 같기도 하다.
예준은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티 나지 않게 꾹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시까지만 얘기하자고 약속했던 게 무색해질 만큼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됐다.
소정과 얼마 전 나눴던 얘기를 했을 때, 예준은 딱히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깊은 얘기는 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예준은 소정의 이야기를 들어도 민감하게 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이야기를 전한 장본인이 수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었다고 생각했다.
수빈은 함부로 그를 회유하려거 나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며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선에서 그녀가 남겼던 말만 들려주었을 뿐이 다.
'어미가 자식 생각하는 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염치가 없어 표현을 못할 뿐이지.’
그걸로 충분했다.
밤은 깊어갔지만, 그 누구도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수빈은 가족에 대한 예준의 심 경에도 뭔가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채고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홀짝.
반쯤 남은 캔맥주를 버리기 아깝다고 야금야금 마셔댈 때부터 알아봤다.
신나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던 그녀는 기절하듯 식탁에 엎어져버렸다.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해도 조잘조잘 끝도 없이 떠들어대더니.
창밖엔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너 큰일 났다. 출근 어떻게 할래?”
맞은편에 앉은 예준이 턱을 괸 채 수빈을 향해 물었지만, 이미 그녀는꿈나라로 떠난 지 오래.
예준은 수빈을 조심스럽 게 안아들고는 그녀의 방으로 데리고 가 침대에 눕혔다.
기절하듯 잠이 든 수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준이 짧게 혀를 찼다.
“너는 아직도 내가 편한가보지 ?”
무늬만 남편인 계약직 짐승을 눈앞에 두고 팔자좋게 뻗어버린 꼴을보자니, 어쩐지 살짝 부아도 치민다.
“생일빵이나 먹어.”
예준이 괘씸하다는 듯 그녀의 코끝을 살짝 비틀자, 미간을 구긴 수빈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야, 아야…… 아아아.”
그러더 니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세상 달콤한 잠을 잔다.
예준은 제법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수빈을 내려 다보았다.
오늘 그녀와 나누었던 대호卜, 그녀가 자신을 안았을 때의 그 촉감, 그리고 생기가 넘치던 눈빛과 말투, 표정 하나하나가 차례로 뇌리를 스쳤다.
'내가 봤을 땐, 네가 제일 예쁜 꽃이야.’
그 낯간지러운 말은 왜 또 떠오르고 난리인지.
피식. 바보병은 전염성이 강한 만큼 옮으면 약도 없다는데, 자꾸만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예준은 허리를 숙이고.
잠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생일 축하해.”
그러고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도망치듯 그녀의 방을 나섰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예준은 곧장 욕실로 들어가 냉수마찰을 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자신의 짐승력은 나날이 늘어가는데, 신수빈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전우애 나부랭이나 운운하며 자신을 조련해대니 말이다.
다음 날.
“이거봐. 내가이럴 줄알았지.”
동이 틀 때까지 마시던 수빈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예준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출근 준비를 마쳤다.
“이상하다. 어제 마실 때까지만해도 괜찮았는데.”
죽는다고 찡찡거리며.
“와인이랑 맥주? 어휴 탈 안 난 내가 이상한 거지. 그렇게 퍼마시고 멀쩡하길 바랐냐?
양심도 없어?”
“나, 왜 안 말렸어 !”
“말리면 뭐 해. 또 그럴 건데. 된통 당해봐야 정신차리지.”
매정하게 꾸짖는 예준을 수빈이 원망스럽 다는 듯 노려보았다.
그런데 쌀쌀맞은 말과는 달리 차 키를 챙긴다.
“태워다줄게. 타.”
순식간에 수빈의 표정이 순한 양이 되었다.
“호텔까지 태워줄 거야?”
“그럼 중간에 버리고 올까?”
“오예!”
수빈은 신이 나서 만세를 했다가, 곧 끙끙 앓는 척을 하며 차에 올라탔다.
“너무 아프면 쉬지 그래?”
“괜찮아. 짬뽕 국물 하나 마시고 점심 때 잠 좀 자면 돼.”
“앞으로는 못 이길 술 마시지 좀 마.”
“너 때문이잖아.”
“왜 그게 나 때문……!”
“너 때문에 술이 너무 달았어. 네가 사준 케이크도 맛있었고.”
허허. 분위기 봐라?
두 사람은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쳤지만, 전과 같이 서로 타박하지는 않았匚上 혹시나 이런 게 너무 부끄러워지면, 그 이상은 가까워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녁에 데리러 올게.”
냉기가 사그라진 자리엔 서서히 훈풍이 번지기 시작했다.
* * *
차에서 내려 탈의실로 간 수빈의 곁으로 인영이 드리워졌다.
“부지배인님”
“아, 깜짝이야!”
소리도 없이 다가온 영하가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와, 진짜 세상제일 부럽네요.”
“언제 왔어?”
“계속부지배인님 뒤에 있었거든요?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으시고.”
“언제부터 뒤에 있었는데?”
“부지배인님이 남편분이랑 여보, 우리 어떻게 9시간이나 떨어져있지? 힘들지만 참아볼게, 그리울 거야. 사랑해. 마이 달링 할 때부터…… 아야!”
영하는 생사람 잡는데 도가 튼 모양이다.
……내가 언제 여보, 달링 그랬다고 괴리감이 너무 크*너 리액션도 안 나온다.
“작작좀 놀려라.”
수빈이 큰 반응 없이 받아쳤지만, 영하는 놀리는 게 아니라며 되레 펄쩍 뛰었다.
“진심으로 부럽거든요? 난 비혼주의자에 가까웠는데 아니었나 보卜. 요즘 부쩍 결혼이
하고 싶어지는 거 있죠.”
영하의 말에 수빈이 조용히 웃었다.
빈말은 아닌 모양,
그런데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행복해 보인다는데.
결혼이라고는 그냥 환상이나 마찬가지라던 비혼주의자가 결혼을 생각하게끔 부럽고, 부럽다는데.
수빈은 쓰게 웃었다.
왠지 행복해지면 안될 거 같은 느낌인데, 행복해서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커지는 행복의 크기만큼 불안함과 아쉬움도, 슬픔도 커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