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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46화 (46/63)

46 화

한참을 웃고 나니 다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수빈은 슬쩍 눈을 굴리 다가 놀리듯 물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왕따였어요?”

깜짝 놀란 예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뭘 그렇게 훅 치고 들어와서 거르지도 않고 물어봐요! 매너 없게!”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가 매너를 다 찾는다.

얼굴 두껍기로는 아까 걔들 못지않은 듯했다.

“하긴.”

예나의 그런 모습 따위 익숙하다는 듯 수빈이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 있게 받아쳤다.

“성격이 저렇게 지랄 맞은데 맨날 친구 만나러 간다고 나다니는 게 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어.”

“뭐, 뭐라고요?”

“친구가 있긴 있나 싶더라고.”

“허,참! 기, 기가 막혀서……r

예나가 눈을 까뒤집었지만, 수빈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러니까 성질 좀 죽여요. 말 좀 예쁘게 하고.”

“그리고 앞으로는 혼자 놀지 말고 나랑 놀아. 나도 심심하니까.”

수빈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싱긋 웃자, 예나가 얼굴이 벌개져서 새침하게 대꾸했다.

“내,내가 왜 나이 많은 새언니랑 놀아야 되는데요?”

“파하하!”

너무 되바라지니 웃음이 다 터진다.

어휴, 이 싸가지.

내 동생이었으면 쥐어박았다, 벌써.

“어차피 친구도 없잖아. 내가 절친 생길 때까지 베프 해줄게. 그리고 나, 별로 나이 안 많거든요?”

“그러니까 내가오 H……!”

“더 늦으면 어머님 걱정하시겠다. 얼른 들어가요.”

수빈이 예나의 팔에 제 팔을 끼워 넣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씩씩대던 예나는 아직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 만, 못이긴 척 그녀를 따랐다.

“하나 밖에 없는 막내딸이 밖에서 이런 험한 일 당하고 다니는 줄 알면 식구들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수빈의 타박에 예나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큰 오빠도 걱정 많이 할 거예요.”

집으로 걷는 내내 수빈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지만 예나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할머님, 할아버님이랑 어머님 아버님은 말할 것도 없……「

“……퍽이나 그러겠네.”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 집, 남아선호사상 엄청 심한 집이에요. 대 이어야 한다고. 그러니까큰오빠는 대놓고 사생아 취급받고, 나는 투명인간이지.”

예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탄생은 아들이 아니어서 서운한 정도도 아니라, 그저 태어나도 그만, 안 태어나도 그만이었을 거라고.

“서운한 것도 약간의 기대감이 있어야 가능한 거거든요.”

쌍둥이 오빠인 예훈만 태어 났어도 족했을 텐데, 자신은 그냥 원 플러스 원처럼 덤으로

끼워주는 그런 존재라고.

“저는 우리가족들 다 싫어요.”

악에 받친 듯 작게 중얼대던 그녀를 보며 수빈이 가만히 물었다.

“큰오빠볼 때는눈에서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아, 큰오빠는 예외예요.”

“왜요?”

이 어린애도 예준에게 연민이라는 걸 느낀 걸까 싶었지만.

“그야…… 잘생겼으니까.”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였던 걸로 결론이 났다.

“큰오빠 때문에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그래도 저한테 관심 있는 친구들 많았거든요.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오빠한테 관심이 있었던 거겠지만, 무튼 호의적이긴 했어요. 잘난 오빠 둔 덕에.”

“정작 큰오빠는 나한테 관심도 없었지만.”

“그렇지 않아요.”

“애쓰지 마세요 내가 큰오빠였어도 우리 집 지긋지긋했을 테니까.”

예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집 앞에 다오고 나서야수빈이 입을 열었다.

“예준 씨가 표현이 서툴러 그렇지, 식구들 생각 많이 해요. 아가씨도 조금 더 와帽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땐 다 알 거야.”

이 정도는 얘기해줘도 되것[지.

물론 사실이라고 하기엔 예준이 가족에 대해 얼마큼의 애정이 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자신과 연극까지 해가며 결혼 생활을 유지해오는 건 분명 가족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라고 믿었다.

수빈이 싱긋 웃으며 예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심히 들어가요.”

“아, 우리 다음 주 주말에 놀러 갈래요? 같이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생각해보고요.”

계집애.튕기기는.

“잘 자요, 아가从I.그리고 쟤네 혹시 해코지하면 바로 오빠나 나한테 말해요. 알았죠?”

“언니 같으면, 아까 그 모습 보고도 해코지하겠어요?”

“아하하하! 제가 좀 짱이긴 했죠?” 예나의 말에 수빈이 호쾌하게 웃었다.

멀어지는 수빈의 뒷모습을 예나의 시선이 가만히 좇았다.

* * *

집에 거의 다 와 가는데 예준이 나와있는 게 보였다.

“어? 여 버……

저도 모르게 여보 소리가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삼킨 수빈이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지 씨 !”

수빈을 발견한 예준이 다가와 수빈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날렸다.

“지 씨가 뭐냐, 지 씨가.”

“왜. 우리 아빠는 우리 엄마한테 맨날 장 씨라고 부르는데. 애칭이야, 애칭.”

예준의 곧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근데 왜 나와있었어? 슈퍼 가려고? 설마 나 기다렸던 건 아닐 테고.”

수빈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너 기다렸던 거 맞아.”

무심한 목소리치고는 담고 있는 대답의 의미가 어마어마한지라 수빈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제대로 들은 거 맞아?”

“까불지, 또.”

예준이 말을 얼버무리며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나와있었어? 설마 내가 걱정됐던 건 아닐 거고.”

“뭐야. 왜 안하던 짓을 해? 불안하게 대답은 또 왜 안하는데?”

현관으로 먼저 들어선 예준이 수빈의 말에 답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전화는 왜 안 받아? 어머니가 너 나간 지 한참 됐다고 하는데 안 들어와서 얼마나 걱정 했……

“아. 그게 오다가 일이 좀 있어서.”

“무스 OI ”

“그런데 나 걱정했어?”

서로는 듣고 싶은 대답이 달랐던 듯 자꾸 저 할말만 물어댔다.

“시끄러워.”

결국 예준이 대답을 회피하며 집 안으로 향했다.

식탁에 보니 '러블리 베리'의 케이크가 있었다.

“헐 ! 케이크! 안 그래도 다 먹고 계속 생각나서 너무 힘들었는데!”

“사 먹으면 되지, 뭘 힘들기까지 해? 그깟

탄수화물이 뭐라고.”

예준이 타박했지만, 수빈은 그저 기쁜 듯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오늘 무슨 날이야?”

“사다주면 토 달지 말고 그냥 좀 먹어라.”

“헤헤. 좋아서 그러지.”

수빈이 애교 섞인 동작으로 팔꿈치를 들더니 예준의 옆구리를 툭 쳤다.

“신난다!”

잰걸음으로 뛰어간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케이크 두 조각을 먹어치우고는 뒤늦게 곁에 있던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야?”

“몰라. 10주년이라고 주던데?”

“오오! 마셔보자!”

“내일출근안 해?”

“하지! 너는?”

“난 안 해. 주말이잖아.”

“아, 그럼……

“나만 아니면 되니까 먹으면 되겠군.” 그가 와인을 따 잔에 콸콸 따랐다.

“하하.”

……나쁜 새X.

자조적으로 웃던 수빈이 굳이 콕 집어 되물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 너는 출근 안 한다, 이거지?”

“한 번에 알아듣다니. 이해력이 빨라졌네?”

……아오.

예준을 말없이 노려보던 수빈이 케이크를 한 번 흘깃 바라보고는 못이긴 척 너그럽게 넘어가주었다.

역시 달콤한 건 위대하다니까.

넌 '러블리 베리' 사장님께 감사해라. 네 명줄은 그분이 구제해주셨으니 .

수빈은 잔을 들고는 예준을 향해 비장하게 외쳤다.

“자, 마셔.”

예준이 잔을 건네받고는 가볍게 부딪쳤다.

빛 좋은 붉은 포도주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오! 엄청 맛있는데?”

수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풍부한 향을 가진 레드와인은 적당한 달콤함을 머금은 채 전신의 혈류를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온몸이 나른해지는듯한 기분. 취기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석 잔이 되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참 많이도 마셨다.

수빈은 문득 예준과 대화다운 대화를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살짝 속내를 좀 물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예준의 얼굴엔 별다른 불편함이 묻어나지 않는다.

좋았어 이 분위기 그대로 밀고 나가는 거다.

“외국엔 왜가려는 거야?”

수빈이 던진 질문에 예준은 방금 전 내려놓은 잔을 다시 들어올렸다.

딱 한 모금 남아있던 포도주가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냔,,

예상했던 대로 별거 아닌 대답이 돌아오나 싶었는데.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뒷말이 따라붙는다.

수빈은 그 말뜻이 궁금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무엇으로부터?”

예준은 이번에도 잠시 침묵하긴 했지만, 곧 덤덤히 대답을 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온갚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예를들면 뭐랄까……,그냥.

아무 곳에도 섞이지 못하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된 것만 같다고 할까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아무 의미도 아닌.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견디기 쉬웠던 적은 사실 단 한 번도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감정 소모가 너무 클 것 같아 외 면해왔을 뿐

특별히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지만, 이건 그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였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엄마는 내 존재 때문에 자기가 불행하다고 느꼈대.”

“결국자기 인생을 택하느라, 날 외할아버지한테 떠맡기고 집을 나가버렸고.”

알코올 중독에 일용직을 전전하던 예준의 외할아버지는 상습적으로 손주에게 손찌검을 가했었다.

그가 그의 딸이자 예준의 모친인 소정을 때렸던 것처럼.

세상의 울분을 피붙이에게 토해내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버리지 않고 거둬준 거에 감사하라는데, 내가 못돼 처먹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단 한순간도 고마웠던 적이 없었어 .”

배를 곯는 일이 허다했고, 진저리가 나도록 맞고 살던 때였다.

소정이 가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저절로 납득할 수밖에 없게 된 환경이었지만,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더 고마울 지경이었으니, 말다했지.”

친부라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적어도 직접적인 물리적 폭행은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까 밉지도 않았다고

수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복잡한 얼굴로 예준을 바라볼 뿐이 었다.

소정에게 들은 이야기로 그를 위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자의 입장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굳게 다물려있던 예준의 입술이 벌어지며 옅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래서 싫은거다.

별로 좋지도 않은 기억, 떠올려봤자 바뀌는 것도 없는데 기분만 더러워지니까.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농담 섞인 사족을 덧붙였다.

“뭘 또 그렇게 심각해져? 내 자격지심 때문이라는데.”

“워낙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래.

지긋지긋하잖아.”

역시, 적당한 취기는 깊은 대화를 나누게 하는 윤활제가 되어주는 법인가 보다.

수빈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중한 대답이 돌아와놀라웠지만,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심정이 어땠을까.

한국엔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어 지긋지긋하다던 그가 너무나 가엽다.

그런 네게 나까지 상처를 줬으니, 나는 어떻게 네게 보상을 해줘야 할까.

“……미안해.”

할수 있는 건 진심이 닿기를 바라는 일뿐이었다.

“뭐가?’,

“그냥. 왠지 거기에 내가 거하게 한몫 보탠

거 같아서.”

수빈의 심심한 사과에 예준이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됐어. 충분히 되갚아줬으니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빈이 예준의 비어있는 잔을 또 다시 채웠다.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나도 당할 만큼 당해줬지. 사과 취소할까봐.”

“하하.”

호쾌하게 웃던 예준이 순식간에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죽을래?”

“마셔. 넌 역시 당이 부족해.”

수빈의 심심한 사과 번복을 끝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게 실소든, 아니면 정말 웃겨서 터져 나온 웃음이든 이제 두 사람 사이에 웃는 일은 예전만큼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서로가 예전보다 많이 편해졌다는 증거였다.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조금씩.

예준과 수빈은 자신들도 모르는 人卜이에 그렇게 조금씩 서로에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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