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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45화 (45/63)
  • 45 화

    식사를 마친 수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가보겠습니다.”

    “벌써 가려고?”

    계춘의 말에 훈탁이 말했다.

    “수빈이도 가서 쉬어야죠, 아버지.” 그에 수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또 올게요, 할아버 님 . 그래도 되죠?” 애교 있는 그녀의 태도에 계춘이 껄껄 웃었다.

    “아예 와서 살면 더 좋지.”

    “신혼이니까 그건 좀 봐주세요.”

    “허허, 농이다. 농.”

    수빈이 위트 있게 답했고, 분위기는 늘 그렇듯 훈훈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늘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훈탁이 어쩐 일인지 현관까지 마중 나와 용돈을 쥐 어주었다.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

    “이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어라.”

    놀란 수빈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버14 얼마 전에 어머님께 용돈 받았어요.”

    “예훈이 엄마가 용돈을 줬다고?”

    훈탁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일이라며 중얼거리던 그가 다시 수빈의 손에 수표를 쥐어주었다.

    “아무튼 집사람이 준 건, 집사람이 준 거고. 어른이 주는 돈은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다.”

    며칠 전 소정이 했던 말을 똑같이 하면서 말이다.

    수빈은 못 이기는 척 돈을 받아들며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훈탁은 뻣뻣하게 고개를 주억거 리 며 작게 헛기 침을 하고는 슬쩍 말을 보탰다.

    “네가수고가 많다.”

    “많이 고되면 말해라. 어디 여행이라도 보내줄 테니.”

    시아버지의 호의에 수빈은 기분이 묘해졌다. 훈탁은 두 사람의 결혼이 계약 하에 이뤄진 위장 결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뚝뚝하기만 했던 시아버지가 겉으로 표현한 첫 마음이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일이었기에 수빈은 조용히 미소를 그리며 저택을 벗어났다.

    ★ * 1*

    수빈이 골목을 막 빠져 나가려는데 어딘가에서 새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깜짝 놀란 그녀는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골목 안.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교복을 입은 여학생 무리들이 떼 지어있는 게 보였다.

    “진짜, 왜들 이래?”

    카랑카랑한 목소리 뒤로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조용히 안 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 왜 때리냐고!”

    “이게 진짜 미쳤나.”

    수빈은 앞뒤 잴 것 없이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저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였다.

    그건 예나의 목소리 였다.

    “아가씨.”

    수빈의 등장에 놀란 여고생 무리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건 예나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새언니?”

    수빈은 예나를 빙 둘러싸고 있는 무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예나의 옆자리를 꿰차고 눈을 부릅떴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얘들은 뭐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예나가 당황한 듯 얼버무렸다.

    “아……. 그, 그냥 친구들이랑 놀다가 이제 들어가려던 길이에요.”

    친구는 무슨.

    “친구 아닌 거 같은데?”

    수빈이 예나 앞을 가로막으며 하는 말에 빙 둘러 서있던 여고생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친구 맞아요.”

    “상부상조 몰라요?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친구라고요.”

    예나를 후려치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아이들은 주눅 들기는커 녕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굴었다.

    분위기를 지켜보던 예나가 급히 끼어들었다.

    “내, 내일 학교에서 얘기해!”

    그러고는 냅다 수빈의 팔을 잡아끈다.

    “가요, 언니.”

    아무래도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 보였다.

    예나가 도움을 청하지 않는 걸 보니, 수빈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 보여 못이기는 척 움직였다.

    빙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도 순순히 길을 터주고는 지나가라는 듯 손까지 뻗는다.

    찜찜했지만, 예나와 먼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뒤통수에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 지금 쟤 하는 짓이 너어무 호구 같아서 눈물이 다 나오려고 그래.”

    “알 게 뭐야. 돈 많은 호구면 우린 고맙지, 뭐.”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린 수빈이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데, 예나가 수빈의 팔을 꽉 잡았다.

    “뒤돌아보지 말아요.”

    “……아가씨.”

    “제발요 그냥가요. 부탁이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예나가 너무 곤란해하는 것 같아 수빈도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떵!다.

    그러자 깔깔거리는 비웃음 속에 누군가 외쳤다.

    “돈 떼어먹을 생각 마. 학교생활 종 치는

    수가 있으니까.”

    순간 수빈은 편두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건 아마도 이성이 날아가는 소리일 테고, 등 뒤의 저 잡것들은 아무래도 곱게 집에 가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다.

    망설임 없이 걸음을 멈춘 수빈의 시선이 제 팔을 꼭 붙들고 있는 예나의 손으로 향했다.

    “이것좀 놔봐요.”

    “뭐,뭐하려고요!”

    화들짝 놀란 예나가 양손으로 수빈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자 수빈은 제 팔을 잡고 있는 예나의 손등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괜찮아요. 잠깐이면 돼.”

    “언니! 잠깐만요!”

    예나가 겁을 집어 먹고 외쳤지만, 수빈은 아랑곳 않고 휴대폰을 만지며 여고생 무리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어린 양들이 어른을 우습게 알아도

    너어무' 우습게 아나 보다.

    사람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지.

    ……각오해라, 이것들아.

    수빈은 자신을 하이에나같이 쏘아보고 있는 여고생 무리 사이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니.”

    “뭐가요?”

    고개를 한껏 치켜든 아이 하나가 위협이라도 하듯 다가왔지 만, 수빈은 기죽지 않고 똑같이 눈을 치켜떴다.

    “뱉은 지 5분도 안 된 말이 기억이 안 나?” 만만치 않은 그녀의 반응에 제일 앞에 있던 여자아이는 슬쩍 미간이 구겨졌다.

    “어우, 무서워.이 아줌마아주한대 치겠네?”

    그러더니 급기야수빈의 얼굴 앞에 머리통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쳐보卜 어디 한번 쳐보라고. 어?

    쳐보라니까?”

    그 도발적인 행동에 먼발치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예나가 달려왔다.

    “그, 그냥 가요, 언니!”

    예나가 수빈의 팔을 열심히 잡아끌었지만, 수빈은 뚝심 있게 버티며 예나에게 말했다.

    “피한다고 될 일 아니에요, 아가씨.”

    수빈은 예나에게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제 앞에 머리통을 들이대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냄새 나는 정수리 좀 치워줄래? 어떻게든 먼저 맞을 요량인가 본데, 꿈 깨. 내가 널 왜 치니? 덩치로 보나 뭐로 보나 내가 불리할 텐데.”

    “뭐,뭐야?,,

    속내를 간파당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말해봐. 너희 이러는 거 처음 아니지? 언제부터 이랬어?”

    “아, 뭐를 언제부터 이래요?”

    “우리 아가씨 돈 뜯고, 협박해댄 거 누가 들어도 오늘이 처음 아니잖아.”

    수빈의 물음에 저들끼리 눈짓을 하던 아이들은 될 대로 되라는 듯 막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한 번밖에 못 뜯어먹었는데요, 왜요?” “맞아. 벗겨먹을 게 수두룩한데? 왜요?” 이것들이 말장난을 하려고 드네?

    얄미운 표정으로 따박따박 대꾸하는 여고생들을 향해 수빈이 따끔히 꾸짖었다.

    “돈이 필요하면 아르바이트를 해. 너네한테 삥이나뜯기라고, 우리 아버님이 뼈 빠지게 일하셔서 아가씨 용돈 주는 줄 알아?”

    “아르바이트하고 있잖아요. 예나가 우리 일당 주는 대신 우리는 예나 학교 편하게 다니게 친구도 되어주고, 누가 괴롭히면 혼내주고 그러는데 뭔 상관?”

    순식간에 예나와 수빈의 주위를 둘러싼 여고생들이 으름장을 놨지만, 수빈은 물러서지 않았다.

    “너희들이 괴롭히고 있다는 건 모르고? 이것도 폭력인 건 아니?”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수빈이 일갈했지만, 역시나 그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푸핫! 폭력은 무슨.”

    “만약에 그렇다 쳐도, 어차피 우리 다 미성년자라 기껏 해봐야 며칠 정학이나 먹고 끝이거든요?”

    “그래? 내가 보기엔 최소 퇴학감인데.” 수빈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공갈에 특수협박이야. 개떼같이 몰려다니 면서 사고 친 거는 가중처벌

    감이고.”

    “다니던 학교가 지겨우면 이참에 다른 학교생활 한번 해볼래? 소년원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궁금하면 내가 보내주고.”

    분위기가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야. 쫄지 마. 저년 저거 이빨 까는 거야.” 어른한테 이년 저년 말하는꼬락서니 하고는.

    콱 쥐어박고 싶은 걸 간신히 눌러 참은 수빈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빨인지 아닌지는 내 친구가 판단해줄 거야.”

    “내 친구가 경찰인데, 근처 지구대 근무하거든.”

    “뭐, 뭐야. 이 아줌마가 어디서 자꾸 되도

    않는……

    “얼마나 빨리 오나 내기할래?”

    조용히 웃던 수빈이 파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 당황스러운 모습에 놀란 여고생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너희들이 그렇게 우습게보던 어른들이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직접 겪어봐.”

    썩소와 함께 경고를 날린 수빈이 놀란 그녀들을 뒤로 한 채 예나의 팔을 낚아챘다.

    “아가씨. 이것들 까불면 바로 말해요.

    알았죠?”

    눈을 까뒤집은 수빈이 때마침 걸려온 영상통화를 켜서 여고생들에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화면 속엔 보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풍기는 여경이 싸늘히 정면을 응시하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수빈아. 방금 네가 신고한 애들이 얘네니?

    교복 보니까 XX여고네기

    “..아!”

    놀란 여고생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 딱 말해.”

    승기를 잡은 수빈이 이때다 싶어 밀어붙였다.

    “지금 바로 이리로 오라고 할까? 아니면 정신 차리고 착하게 살래?”

    대답도 못한 아이들이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앞다퉈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씨 털 끝 하나 건드리기만 해봐, 너네!”

    멀어지는 무리를 향해 수빈이 신신당부했다.

    예나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었는지 눈이 화등잔만 해진 채 수빈을 바라보았다.

    한편, 수빈은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야 친구인 승옥과 통화를 이어갔다.

    “고마워, 승옥아. 잘 지냈지? 우리 찌인하게 한잔 해야지!”

    [야. 찌인이고 뭐고, 한동안 잠잠하더 니 어디서 고딩들이랑 얽혔어기

    “그냥 좀 그렇게 됐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보고 싶다.”

    [알았어 언제든 연락해』

    “그래. 조만간 다시 전화할게.”

    그렇게 통화가 끊겼다.

    그런데 그때까지 위풍당당하기만 하던 수빈이 휴대폰을 귀에서 떼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아아아아아……I"

    잔뜩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벌렁벌렁 뛰어대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고딩들한테 맞는 줄 알고……

    엄청 쫄았네.”

    연신 숨을 몰아쉬더니,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어깨를 부르르 떤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을 토했다.

    “뭐야. 있는 센 척, 없는 센 척 다하더니.”

    “어우! 아까 걔네 덩치를 봐요 한 대 맞으면 그냥 앰뷸런스 각이었잖아.”

    반박할 말이 딱히 없어, 스르륵 시선을 피했다.

    바짝 졸아서 반항 한 번 못하고 휘둘린 자신이었으니까.

    수빈은 무릎을 접고 앉아 그런 예나를 말없이 올려보다가 곧 킥킥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예나가 민망한 마음에 툴툴댔지만, 어이없게도 자신 역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이상한 상황이 었다.

    어둑한 골목아래.

    두 여자의 웃음소리가희미하게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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