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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44화 (44/63)
  • 44 화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에 먼저 뛰어 들어간 건 예준이 아닌 수빈이었다.

    “할머님. 저 왔어요. 저 수빈이에요.”

    애자는 안정을 되찾은 듯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힘없이 누워있었다.

    “……방금 잠드셨다.”

    곁에 있던 훈탁이 말했다.

    “의사가 뭐라고 해요?”

    “일단 고비는 넘겼다고 하시는 구나.”

    훈탁은 잠시 침묵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비는 넘겼지만, 사실 연세도 있으시고, 기력도 약하신 상태라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한 게 아니라고.

    다가온 수빈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버님, 많이 놀라셨죠.”

    훈탁의 시선이 자신의 손 위에 닿았다가 수빈의 얼굴로 향했다.

    왜 안 놀랐을까.

    심지어 훈탁에게는 애자가 친어머니였다.

    “의사가 염려했던 것보다 잘 견디고 계셨잖아요. 그러니까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이겨내실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아버님.”

    “그래. 고맙다.”

    훈탁은 제 손을 꼭 부여잡은 며느리의 손등을 두어 번 두드리며 애써 웃었다.

    수빈은 훈탁에게 위로를 건넨 두I, 넋이 나가있는 계춘도 함께 위로했다.

    “할아버님. 할머님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너무 염려치 마세요.”

    “그래. 그래……우리 손자며느리.”

    말이 없던 부자는 수빈이 오고 나서야 참고 있던 한숨을 터트리며 정신을 챙겼다.

    “할멈이 너 보고 싶어서라도 정신 차리겠지.” 암.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눈가가 촉촉해진 계춘을 한참이나 위로하던 수빈이 천천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예준을 찾았다.

    복도에 보이질 않아 비상구로 나가니 어두컴컴한 계단 위 주저앉아있는 예준을 발견할수 있었다.

    수빈은 말없이 다가가 예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멍하니 있던 예준은 그녀의 손이 닿기 무섭게 팔을 뻗어 수빈을 끌어안았다. 쪼그려 앉아있던 수빈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예준에게 끌려갔다.

    수빈은 무척 놀랐지만, 차마 예준을 밀어낼 순 없었다.

    좀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는 법이 없던 그가 잘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할머니 괜찮으셔. 고비 잘 넘기셨대.”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 봐.” 수빈은 예준의 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위로를 건넸다.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지만, 가장 고군분투하고 있을 애자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했다.

    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마른세수를 한 뒤 애자에게 향했다.

    * * *

    돌아오는 길.

    “많이 생각해봤는데.”

    침묵 속, 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적당히 잘'에 대한 기준이 다른 거 같아.,,

    “더 잘해드리고 싶고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드릴 수 있는데, 이별이 무서워서 적당히 한다는 것 자체가 좀 말이 안 되는 느낌이거든.”

    예준은 아무 말 없이 수빈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우리 계약은 1 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잖아. 아니야?”

    반박할 수 없어, 질문으로 답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수빈이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가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아. 나는 원래 이런 애거든.”

    “적당히 하라고 구박하면, 나도 이제 너 물어뜯을 거야. 날 선택한 건 너니까.”

    내 맘대로, 최선을 다할 거라고.

    속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이별할 게 무서워 적당히 잘 하는 건, 수빈의 기준에서 잘'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후회되는 일이 어제 시댁에 가지 않고, 거리를 둔답시고 그냥 집으로 온 일이었다

    집에 와서 혼자 맛없는 저녁을 먹고 무거운 마음으로 잠든 일.

    오늘 애자가 잘못됐다면 엄청난 마음의 짐이 됐을 일이었다.

    “내가하고 싶은 말은 이러니까, 음 그러니까…… 말리지 말아달라는 뜻이야.”

    “누가 뭐래?”

    큰맘 먹고 한 선전포고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와 당황한 건 오히려 수빈이었다.

    “어?”

    “맘대로 하라고. 누가 말려, 너를.”

    말투는 투박했지만, 그녀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다.

    언제 돌아가셔도 후회하지 않도록 했으면 하고 바랐으면서, 적당히 잘 하라는 말엔 오류가 있었음을 예준도 인정했다.

    인생이 그렇게 계산한 것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단편적인 예만 봐도 그랬다.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데, 벌써 수빈에 대한 마음이 변하기 시작한 걸 보면 한 치 앞도 계산할 수 없는 게 인생이었다.

    “내가 이 집을 떠날 때, 속였다는 죄책감에 미안할지언정,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미련까지 얹고 싶지는 않아.”

    수빈은 덧붙였다.

    “너도 우리 부모님께 잘하고 있잖아. 나는 적당히 하라고 안할게. 최선을 다해서 잘 해줘.

    마지 막이 예고하고 찾아오는 건 아니 잖아” 우리 후회할 짓은 하지 말자고.

    예준은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은 안했지만, 그도 수긍하는 듯한 분위 기 였다.

    사실 예준의 사정은 조금 달랐匚卜. 그의 입장에서는 이제 어떤 핑계를 내세우든 더 이상 자력으로 수빈을 밀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예준의 동의를 얻었다고 생각한 수빈은 결심했다.

    그녀가 했던 말처럼.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건, 떠나는 사람에게도 남겨진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건 '우리의 마지막'이 되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내고 싶었다.

    이왕이면 웃으며, 이왕이면 기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그날 이후 수빈은 예전처럼 제집 드나들 듯 시댁을 찾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욱 마음이 동해서 하는 일이 었다.

    그것을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천만다행으로 애자는 금방 퇴원을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좋은 예후 같은 건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식구들은 모두 그녀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건 이제 어색하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물론 대화의 구십 프로 이상은 수빈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예전처럼 무거운 불편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똑똑.

    “도련님,,

    수빈이 예훈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참뒤에 문이 열리더니 벌어진 문틈 사이로 예훈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 냈다.

    “……무슨일이세요?”

    자신을 날강도 보듯 잔뜩 경계심이 묻은 목소리와 표정의 예훈이었지만, 수빈은 밝게 웃으며 가지고 온 걸 내밀었다.

    “어머님이 가져다드리라고해서요. 드시면서 공부하세요.”

    수빈의 말에 예훈은 그녀가 들고 있던 과일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꾸벅이며 그것을 받았다.

    “아, 감사합니다.”

    “네.쉬엄쉬엄하세……

    예훈의 인사에 웃으며 화답하던 수빈의 시선이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뒤로 향했을

    때였다.

    “어?”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어어!”

    “왜 그러세요?”

    “세상에!”

    “……형수님?”

    놀란 예훈이 어깨를 움찔 떨며 묻는 말에 수빈이 손을 뻗어 그의 침대를 가리켰다.

    “저거 사〈의 귀환》! 맞죠!”

    그녀가 가리킨 건 예훈의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만화책이었다.

    “저거 종이책 절판된 지 오래 돼서 진짜 구하기 힘든 거잖아요! 심지어 87권? 웹툰은 이제 겨우 50화까지 나왔는데 !”

    “……아.”

    수빈의 반응에 예훈은 한참이 나 넋을 놓고 있다가 곧 의외라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신기했다.

    “형수님도 저거 보세요?”

    예훈의 물음에 수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저 켄타 엄청 좋아해요! 집에 피규어도 있는 걸요?”

    물론 술 먹고 지나가다 뽑기로 뽑은 싸구려

    C급 피규어지만

    그녀의 격한 반응에 예훈이 작게 혼잣말을 했다.

    “아……. 켄타 피규어 저도 모으는데……

    “정말요? 웬일이야! 내 주위에 사(의 귀환〉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성덕이야! 완전 대박!”

    동감이었다.

    망설이던 예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카랑 라젠타도 있거든요. 켄타가 제일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 번 보실래요?”

    “그래도 돼요?”

    두 손을 간절히 모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상기된 듯 붉어졌다.

    “들어오세요. 저기 책꽂이 앞에 있……

    “와아! 실례할게요, 도련님 !”

    “어억!”

    예훈이 문 앞을 비켜서기가 무섭게 수빈은 두 팔을 힘차게 위로 뻗으며 방 안으로 돌진했다.

    뭔가 동지를 만났다는 생각에 반가워 덥석 들이기는 했는데, 순간 아차 싶어진 예훈은 뒤늦게 식겁해서 얼른 노트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수빈의 시선이 책꽂이 앞에서 장검을 들고 위풍당당이 서있던 켄타 피규어보다 노트북 화면에 뜬 그림에 먼저 꽂혔기 때문이다.

    “이건 무슨……

    “아! 안돼!”

    넋이 나간 듯 묻는 그녀의 말에 예훈이 서둘러 노트북을 덮었다.

    그러고는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이었다.

    “엄마랑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저 공부하는 줄 아실 텐데, 그림 그리고 있던 거 아시면…….”

    ,,잠깐,,

    그녀의 얼굴이 엄청나게 심각해졌다.

    “이걸 도련님이 그렸다고요?”

    “……네.”

    “진짜요? 정말로?”

    “제가그린 거 맞아요.”

    “……말도 안 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예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수빈이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했다.

    “이게 사람 손으로 그린 거라니…… 그녀는 경이롭다 못해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예훈을 바라보았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존재할줄이야. 심지어 그게 우리 도련님……

    수빈은 이미 덮여버린 노트북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혼잣말을 이었다.

    “저는 진짜 손재주 없어서 그림 잘 그리는 사람 보면 너무 신기하고, 부럽거든요.”

    끝없이 감탄하던 수빈이 몸을 홱 돌리더니 예훈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요, 도련님 !”

    그녀의 왕방울만한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저 나중에 싸인 한 장만 좀 해주시 면 안 될까요?”

    “네?”

    “도련님 작가되기 전에 미리 받아놔야할 거 같아서요. 데뷔하시 면 제가 팬클럽 창단할게요.”

    수빈의 격하고 격한 반응에 예훈도 민망했던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웹툰 작가가 꿈이긴 했지만, 가족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측근에게 이런 식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게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그랬다.

    예나는 맨날오덕이라며 막말하기 일쑤고,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대를 이을 놈이 낙서나 끼적인다며 골칫덩이에 별종 취급을 해댔다.

    집안 식구들 중 누구도 자신이 그림 그리는 일을 반기는 사람이 없었는데…….

    예훈은 이제껏 봤던 중에 가장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K의 귀환)보시고 싶으시 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책 빌려드릴게요.”

    “진짜요?”

    “네.”

    예훈의 말에 수빈은 로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방방 뛰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했다.

    “꺄아! 고마워요, 도련님!”

    원래 수집용으로 종이책을 모으는 사람들은 함부로 타인의 손을 타지 않게 한다는 걸 아는데, 선뜻 빌려줄 생각까지 하다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 제가 너무 소란스러웠죠?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말씀하시고요. 작업 파이팅하세요!”

    그녀는 황급히 인사를 건네며 예훈의 방을 빠져나왔다.

    수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제자리에서 몇 번이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곳을 벗어났다.

    범접할 수 없는 레벨의 성덕이 최측근이라는 사실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뿌듯했던 건 단연, 예훈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접점이 생겼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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