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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43화 (43/63)
  • 43 화

    소정과의 짧은 대화 후 휴대폰을 들여 다보던 수빈은 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여보, 나야. 오늘도 야근해요?”

    [……식구들이랑 같이 있어기

    간만에 듣는 여보라는 호칭이 낯설었는지 예준이 물었다.

    수빈은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아. 어머님이랑 같이 있어요.”

    잠시 침묵하던 예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거의 다 왔어』

    “아,정말? 오늘 일찍 끝났네?” 어김없이 야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이른 예준의 귀가에 수빈의 목소리가

    한톤 밝아졌다.

    [응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

    “알았어. 집에서 봐요.”

    수빈이 통화를 마친 두I, 소정에게 말했다.

    “어머님 예준 씨 지금 집에 거의 다 왔대요.”

    “그래? 그럼 저녁은 둘이 같이 먹으면 되겠구나.”

    “그래도 돼요?”

    “간만에 보는 거 아니니? 둘이 보내는 시간도 좀 있어야지.”

    소정은 다른 식구들은 걱정 말라며, 흔쾌히 수빈을 돌려보냈다.

    수빈은 마음이 급해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일단 갈비찜을 먼저 들이밀어 보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으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좀 나눠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정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잘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 만, 일단 목적은 예준의

    오해를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상처가 조금은 덜어질 수 있을 테니까.

    부리나케 집에 돌아오니 먼저 도착한 예준이 막 샤워를 마치고 거실에 나와있었다.

    “짠 이게 뭐 게!”

    인사도 잎은 수빈이 달려가 예준의 옆에 털썩 앉고는 손에 든 종이가방을 흔들어댔다.

    “뭔데?”

    “갈비찜!”

    “장모님이 주신 거야?”

    “아니. 어머님이랑 요리 교실 다녀왔거든. 어머니랑 같이 다니면 좋을 거 같아서 등록했어.”

    수빈은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소정과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는 말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외식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바람도 쐴 겸,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면 다들 좋아하실 거 같아서. 어때? 잘 했지?”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그녀의 얼굴이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예준은 그런 수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너무 열심히 할 필요 없어.”

    “응?’,

    “아침 차리는 일을 없앤 건, 네가 너무 무리하는 게 부담스러워서야.”

    무리라고 표현했지 만, 그 안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물론 수빈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일이 꺼려지기도 했지만, 예전에 생각했듯이 이제껏 가족들이 해오지 못했던 일을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게 싫었다.

    “괜찮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 부담스럽지 않…….”

    “내가부담스러워.”

    수빈의 말을 자른 예준이 고저 없는 음성을 뱉었다.

    “어머니와도 너무 가까워질 필요 없어. 그러니까 적당히 해.”

    그게 뭐든.”

    아. 이게 아닌데.

    쌀쌀맞은 그의 대꾸에 수빈은 어쩐지 김이 샜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저녁 안 먹었으면 얼른 먹어.”

    “너는?”

    “난 대충 먹고 들어왔어.”

    “혼자 먹기 싫으면 앞에 앉아는 있어줄게.” 수빈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왜지? 이제껏 잘 지내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메마른 그의 대꾸에 말없이 예준을 바라보던 수빈이 조용히 물었다.

    “지예준.”

    예준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자, 수빈이 물었다.

    “너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수빈의 말에 예준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니. 그런거 없어.”

    “그런데 왜 그래?”

    “내가 뭘?”

    “왜 자꾸 쌀쌀맞게 구냐고.”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혼자만 애쓰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알아주길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왠지 이유 없이 미움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하지만 예준은 되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

    “……뭐?”

    “내가 언제는 너한테 살갑게 굴었었어?”

    그의 말에 수빈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져버렸다.

    “익숙해진다는 게 참 무섭긴 해. 네 말처럼.

    예준이 냉정히 말을 이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아 말해주는데.”

    “우린 둘 다 그냥 1 년짜리 계약직이야. 네가 네 입으로 말했듯 이해관계로 얽힌 비즈니스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리고 예준은 말했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네가 왜 이 결혼을 망설였는지 잊지 말라고.

    그의 말에 수빈은 결혼 전에 자신이 예준에게 타박하듯 던진 말을 떠올렸다.

    너는 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냐! 1 년 뒤엔 어떻게 할 거냐고! 그때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아?!’

    그 기억이 선명해지자, 수빈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예준이 그대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아직도 내가 거리를 두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1 년 뒤엔 어쩔 거냐고 소리치던 건 너잖아.” 할 말이 없었다.

    “선을 못 지키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대책 없고, 줏대 없고 감정에 휩쓸리는 건 변하질 않는다며 타박하는 냉정한 그의 대꾸에 수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말대로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그리고 지예준이 어떤 놈이었는지.

    굳어버린 수빈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본 예준이 미세하게 눈가를 구겼다.

    “네 말이 맞아.”

    수빈이 무안한 듯 억지웃음을 지었다.

    “내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나 보卜 진짜 연애결혼이라도 한 양, 어울리지도 않는 새댁 코스프레를 했네.”

    “피곤하겠다. 일찍 자.”

    수빈은 어쩐지 예준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어 도망이라도 치듯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근데 너.”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짜 못됐어.”

    꾹꾹 참다가 폭탄 투척하듯 기어이 한마디를 하고서야 수빈은 발을 쾅쾅 구르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갈비찜을 반찬통에 덜었다.

    흘린 게 반이라 급히 행주질을 하고 반찬을 냉장고에 넣은 수빈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어후! 민망해! 손이 다 떨리네.”

    침대 위로 올라가 달아오르는 뺨을 스스로 착착두드렸다.

    “말본새가 얄미워서 한마디 했지만, 그래도…… 지예준 탓은 아니야.”

    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걸.

    “틀린 말한 거 하나도 없잖아.”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이르고 자책하길 반복하며 현실을 자각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대책 없고, 줏대 없고, 감정에 휩쓸리는 건 변하질 않는구나.’

    학창 시절엔 그보다 더한 말도 들었는데, 저 말이 왜 이렇게 가슴을 후벼 파는지 모르겠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애초에 자신의 성격을 고려하지 못했던 계약이었는데, 덥석 덤벼든 게 문제였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됐어 내일부터는 정신 차려서 적당히 하면

    돼.”

    그러면도 H.아니, 그래야 돼.

    너무 가까워져버리면, 그만큼 헤어짐이 너무 힘들 테니까.

    문득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현실이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으로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서둘러 추슬러도 부족한 마당에…….

    “……아.”

    왜 울고 난리야, 바보같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켜 결국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수빈은 이불 속에서 '내일부터 적당히.'라는 말을 주문처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되뇌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굳게 닫힌 수빈의 방문 앞에 서있던 예준은 몇 번이나 노크하려던 손을 끝내 거두었다.

    언제든 밀어낼 수 있다고 믿었고 당연히 지금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던 게, 어쩌면 지 나친 착각이 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다.

    '근데 너, 진짜못됐어.’

    상처받은 듯한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가슴을 따갑게 긁어내렸다.

    * * *

    예준과 다툼 아닌 다툼이 있었던 그날 이후.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해오던 게 있으니, 하루아침에 행동에 변화를 보이기가 쉽지가 않았던 터다.

    뭐든 적당한 게 가장 어렵다더니.

    퇴근 후 버스에 오른 수빈은 어떻게 해야 예준이 말한'적당히 잘하는 방법을 실천할수 있을지 고민했다.

    창밖을 보고 있는데 손에 뒨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 와서 저녁 먹고 갈래?

    시어머니인 소정의 문자였다.

    습관처럼 알겠다고 회신을 하려다가,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빈은 액정 위에 뜬 글자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거의 매일같이 함께 하던 저녁 식사.

    - 죄송해요, 어머님. 다음에 갈게요.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게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 첫 번째 관문이 바로 만남의 횟수를 줄이는 거였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평소와 다른 수빈의 답장에 곧장 회신이 왔다.

    - 어디 아프니?

    - 아픈 건 아니고요. 조금 피곤해서요.

    - 그럼 와서 반찬만 좀 가져갈래? 목포 고모님이 해산물을 잔뜩보내주셔서, 노 집사님이 아주 맛있게 요 리해주셨거든.

    소정은 수빈에게 보내는 문자의 텍스트가 나날이 길어졌다.

    그만큼 친밀감이 높아졌다는 뜻일 텐데, 반가울 일이 그렇질 못하니 입 안이 썼다.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액정만 응시하고 있자니, 문자 하나가 연이어 도착했다.

    - 아니다. 집에 가서 쉬렴. 반찬은 김 기사님 통해서 보내던지 할게. 어머님이 너랑 예준이 꼭 챙겨 먹이라고 당부하셨거든.

    애자의 얘기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수빈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액정을 꾹꾹 눌러 답장했다.

    - 감사해요, 어머님. 다음에 뵐게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이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예준의 식구들 속에 깊이 동화되어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인간관계를 계산해가며 맺어온 적은 태어나 한 번도 없었는데.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했던 행동이 1 년 후 짊어져야 할 죄책감의 크기를 눈덩이만큼 불린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날 새벽.

    훈탁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에 혼비백산한 예준과 수빈이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별도 달도 잠든 고요하고 스산한 시간.

    차 문을 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몇 번이나 미끄러진 예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 예준의 손을 낚아챈 수빈이 침착하게 그를 설득했다.

    “진정하고 내말 잘들어.”

    수빈을 바라보는 예준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 지금 운전대 잡으면 오늘 너랑 나랑 둘 다 죽어.”

    면허가 없다는 게 너무나도 안타까워지는 순간이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애자가 발작을 일으켜 급히 병원으로 호송된 상황이었다.

    “택시 타고 가.”

    그 말을 끝으로 수빈은 예준의 손에서 차 키를 빼앗은 뒤 무작정 주택가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간신히 차에 기대 서있던 예준은 멀어지는 수빈의 뒤를 가까스로 뒤쫓기 시작했다.

    “아저从I. XX대학병원으로 가주세요.

    빨리요.”

    뒷좌석 문을 연 수빈이 예준을 거의 밀어 넣듯 태우고는 재빨리 문을 닫고 목적지를 말했다.

    예준은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허벅지 위에 올라가있던 손바닥 안으로 땀이 흥건히 베어 났다.

    그때, 그의 손등 위로 수빈의 손이 포개어졌다.

    “괜찮아.”

    집 나가려던 이성이 간신히 돌아오고 나니, 문득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준은 뒤늦게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수빈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녀 역시 길게 숨을 들이 마쉬었다가 내뱉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허벅지 위에 올린 제 손 위로 얹어진 그녀의 왼손, 그 위로 그녀의 오른손이 또 한 번 포개졌다.

    억지로 떨림을 멈추려는 듯.

    새하얀 손등에 힘이 잔뜩 들어가 핏줄이 솟아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준이 입을 열었다.

    “네가이러면……

    덜덜 떨리는 입술 끝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하나도 위로가 안되잖아.”

    “어?”

    “나보다 더 떨면 어쩌자는 건데.”

    수빈이 혼자 너무 애쓰는 것 같아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을 갈무리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예준의 들릴 듯 말 듯한 말에 수빈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을 깜박였다.

    “가,갑자기 너무 뛰어와서 그래,”

    그녀도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나 떠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떨지 마.”

    우리 너무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고.

    수빈은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애타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아직은 안되는데.

    할머니 벌써 가시면 안 되는데.

    ……못해드린 게 너무 많은데.

    두 사람은 애타는 마음을 뒤로한 채 손을 포개고 그 지옥 같은 시간을 함께 견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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