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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42화 (42/63)

42 화

'너는 충분히……

그가 뒷말을 속으로 삼키는 바람에 묘한 침묵이 날아들었다.

예준의 반응에 수빈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케이크를 먹다 말고 포크까지 내려놓은 채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충분히 뭐. 충분히 돼지 같다고?”

“어. 충분히 돼지……

응? 이게 아닌데?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자폭해버린 수빈의 대꾸에 예준이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굽!

“이게, 진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를 보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쿡 찍어낸 예준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농담이고,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 라고.” 거기서 멈췄으면 훈훈했을 텐데.

“멍청아.”

괜한 민망함에 욕지거리가 뒤따랐다.

칭찬을 해본 적이 있어야지.

낯부끄러움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한편 생각지도 못했던 예준의 대답에 잠시 넋이 나간 듯 그를 바라보던 수빈이 뒤늦게 발끈해서 외쳤다.

“더, 덕담할 거면 덕담만 해!,멍청아는 왜 붙는데?”

“미안. 너만 보면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아서.” 얼굴을 가린 예준이 바람 빠진 풍선마냥 피식피식 웃었다.

입술을 삐죽대던 그녀는 게 눈 감추듯 케이크 한 조각을 먹어치우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 조각을 더 접시에 덜었다.

“한 조각만 먹는다며,,

예준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건 네가 내 앞에 앉아있어 줬을 때 얘기야.”

뻔뻔하게 받아친 그녀는 곧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케이크를 먹었다.

발끈할 때는 언제고, 얼굴이 아주 황홀해 죽겠다는 표정이 다.

덜어낸 케이크가 거의 다 사라질 때쯤.

“익숙해진다는 게 참무서워. 그렇지?”

열심히 케이크를 먹던 수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버스끊기면 택시비 아까워서 막한시간 넘게 걸어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 비싼 케이크를 아무렇지도 않게 홀케이크로 먹는 날이 오다니.”

이 케이크는 회사 동료 생일 때 처음 먹어본 케이크였다.

수제 디저트 가게인데다가 재료도 좋은 것만 써서 그런지 가격이 정말 후덜덜 할 지경이었지만, 가끔 스스로에게 선심이라도 쓰듯 조각케이크를 사 먹고는 했었다.

“나 원래는 이거 월급날만 먹었다? 그것도 딱 한 조각. 보너스 들어오는 싹수 달에만.”

이 케이크가 그녀에게 특별한 이유는 팍팍하고 메마른 세상을 견디게 해준 달콤함이기 때문이다.

“너는 이해 안 되지? 고작 케이크 하나가 뭐라고 벌벌 떨고, 택시비가 아까워서 미련하게 걸어 다니나 할 만큼? 근데 내가

그랬어. 널 만나기 전에 몇 년이나 그렇게

지냈어.”

그녀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고, 그런 팍팍함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만 같았는데.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인생의 간극에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내가 왜 몰라. 나도 어렸을 때는 너보다

훨씬 힘들게 지냈는데.”

예준의 말에 수빈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소풍비 사건 벌써 까먹었어?”

“이씨! 그 얘긴 왜 또 해! 언제까지

우려 먹을래? 사골이냐?”

수빈의 타박에 예준이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먹고 자 야근했더 니 피곤해. 먼저 잔다.”

“잘 자, 여보.”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수빈이

말했다.

멈칫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생크림 이 잔뜩 묻은 포크를 흔들며 웃었다.

“케이크 고마워.”

예준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사람처럼 한참을 서서 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말처럼 익숙해진다는 게 이렇게나 무섭다. 너와 함께 지내온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훨씬 더 긴데도 벌써 이렇게 위화감이 없어지다니.

너를 보며 박탈감을 느낄 때마다 그렇게 괴로워했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어쩌면 나는 너를 증오하거나 미워했던 게 아니라……, 동경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케이크를 다 먹을 때까지 수빈의 곁을 지킬 자신이 없어진 예준은 서둘러 자리를 떠버렸다.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고,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문득 두려워져서였다.

“어? 너는 미션 안해? 저녁 거 아직 안 했잖아!”

멀어지는 예준의 뒤로 수빈이 소리쳤지만, 예준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텅 빈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마음의 빗장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할 시기였다.

* * *

다음날.

예준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수빈이 서둘러 그의 팔을 잡았다.

“미션은?,,

……미션.

그녀의 말에 예준은 수빈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이제 그만해도 될거 같아, 그런건.”

“왜?’,

“어른들 앞에서 실수 안 할 수 있을 정도는 된 거 같아서.”

생각이 많아 내내 밤잠을 설쳤던 어젯밤이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우리 사이를 조금 더 친밀하게 하기 위한……

“됐어. 충분해.”

무심히 수빈을 지나치던 예준이 말했다.

“아니.”

“이미 고I해, 너무.”

예준은 멍하니 서있는 수빈을 뒤로한 채 그대로 집을 빠져나왔다.

한동안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던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쟤가갑자기 왜 저러지?”

내가 어젯밤에 뭐 실수라도 했나?

수빈은 자신의 행동에 그가 기분 나빠할 일이 있었는지를 천천히 곱씹으며 출근 준비를 했다.

집을 나와 호텔까지 가는 내내

고민해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될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동안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너무 잘 지 내왔었다.

좀 티격태격하긴 했어도 말이다.

“어제 야근까지 했는데, 케이크 사오라고 해서 화났나?”

……안사오면 그만인데?

“아니면 내가 싫다는 케이크를 억지로

먹여서?”

……그것도 아닌 거 같고

“혹시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남자 만나게 해달라고, 대놓고 비교해서 그런가?”

아니.

다정함과 넘치는 사랑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위인은 아니었으니, 그런 거에 기분 나빠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지?

1년 동안 잘 지내기만 해도 부족할 판에 갑자기 왜 또 벽을 세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匚卜.

해외 출장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웠던 예준이 돌아와서도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탓에 좀처럼 그를 마주칠 수 없었다.

그동안 수빈은 회사에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했고, 쉬는 날은 친정을 가거나 시댁에 가 식구들과 저 녁을 먹고는 했다.

수빈은 소정과 요리 교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주 6일, 매일 아침 식사를 차리는 일을 가사도우미에게 넘긴 대신 일주일에 한 번은 소정과수빈이 저녁을 차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을 차리던 거에 비해 육체적 부담은 확연히 덜어졌지만, 대신 한 번을 하더라도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모두를 위해 바뀐 타협안이니,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안됐다. 특히 계춘과 소정을 위해서 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소정도 막상 클래스를 받아보니 꽤나 흥미로웠던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학원을 나섰다.

“예준이는 요즘에도 매일 야근이니?”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귀가하던 중 소정이 물었다.

“네. 요즘일이좀 많나 봐요.”

수빈의 대답에 창밖만 응시하던 소정이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어머님?”

“날도 더워지는데 예준이랑 둘이 보약이라도 한채 지어먹으렴.”

눈이 동그래진 채 선뜻 받지 못하는 수빈의 손에 수표를 손수 쥐 어주던 소정이 말했다.

“어른이 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 넣어둬.”

시크하게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 손에 쥐여진 수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빈이 조용히 미소를 덧그렸다.

“감사해요, 어머1d. 저도 저지만…… 예준 씨 많이 생각해주셔서요.”

수빈의 말에 소정은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작게 말을 이었다.

“어미가 자식 생각하는 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염치가 없어 표현을 못할 뿐이지.”

그녀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말에 수빈은 조금 놀랐다.

사실 방금 전 소정에게 예준 생각을 많이 해줘 고맙다고 했던 말은 백 프로 진심이 아니었다. 좀처럼 멀어 보이기만 하는모자 사이에 조금이라도 어색함을 줄여보고자 건넨 얘기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한 대답을 들어보니, 정말로 예준이 생각하는 만큼 소정이 그에게 관심이

없고 모진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소정이 넌지시 질문을 해왔다.

“예준이가 나한테 서운하다는 얘기 안 하니?”

조금 머뭇거리던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긴. 그 애가 그럴 성정은 아니지.” 소정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집에 들어와서 쥐죽은 듯 지내던 애라 부족한 게 많을 거다. 그나마 눌러 앉히 려 면 있는 듯 없는 듯 대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나를 참 많이 원망했을 거야.”

소정은 훈탁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훈탁은 첫 번째 부인과 아이가 생기지 않자 이혼했고, 그 후 소정과 재혼을 했지만 역시 아이는 좀처럼 들어서질 않았다. 그러던 중 애자가 예준의 존재를 알고 먼저 입양을 제안했었다.

첩 아닌 첩살이로 시작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독하게 버티고 앉아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으니 때가 되었다고 여겨 덥석 예준을 데리고 왔던 소정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그 누구도 아이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나마 애자가 예준에게 애정을 쏟아주었지만, 자신이 나서서 유난 떨며 아이를 양육하기엔 눈치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예나와 예훈을 임신하게 됐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던 때에 임신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예준과 이 집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대외적으로 일이 있을 땐 소정은 늘 예훈을 집안의 장남으로 소개했다.

'튀는 행동하지 마. 알았어?’

뭐든 뛰어났던 예준에게 소정이 매정하게 당부했다.

'너랑 내가 이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 니까,

소정은 예준이 특출나길 원치 않았다.

그저 부족한 것 없는 환경에서 평범하고 무탈하게 자라길 바랐다.

여기 있으면 적어도 모진 학대를 당하거나 배를 곪는 일은 없을 테니까

모성애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가 어렵사리 얻은 새 인생이었다. 자신의 인생도, 그리고 새롭게 얻은 가족도, 보금자리도 소정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준이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커서 그저 하루 빨리 제 인생을 착아가길 바랐다.

“지금 와서 애써 그 애에게 이해를 구하려는 생각은 없어. 걔 하나만 보고 쏟아부은 인생도

아니었으니,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서 수빈은 소정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너한테 부탁하는 게 염치없지만, 그래도 네 남편이 니까 아내인 네가 그 애를 좀 신경써줬으면 한다.”

부족한 어른들이 주지 못했던 그 사랑. 이제는 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채우길 바란다고.

“걱정 마세요, 어머니.”

이제야 알게 된 그녀의 사정에 수빈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모자에게는 참으로 모진 삶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정에게도 예준에 대한 애정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할 수 없었던 걸, 이기적이라고 욕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녀 나름으로는 책임을 다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준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가 더욱 안쓰러워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빈은 바랐다.

언젠가 때가 되면, 두 사람이 조금 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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