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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41화 (41/63)
  • 41 화

    예준이 도착했을 때 일산에 있는 케이크 가게는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어렵게 케이크를 구한 그는 조수석에 케이크 상자를 올려둔 채,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추었을 때.

    예준은 창틀에 한쪽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조수석을 응시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미간을 좁히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뭐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다.

    수빈이 단걸 못 먹어 손이 다떨린다는 얘기를 했을 때만 해도 콧방귀를 뮈었던 것

    같은데, 정신차려보니 떡 하니 놓인 저 핑크핑크한 케이크 상자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자신이 해놓고도 충분히 당황스러운 행동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예준은 혹시나 수빈이 잠들까 싶어 일단 서두르기로 했다.

    이 혼란스러운 민망함은, 잠시 미뤄두기로 한다.

    삑삐비빅

    도어록이 해제되고, 예준은 조용히 현관으로 발을 디뎠다.

    “뭐야.,,

    집 안은 조용했다.

    “벌써 자나?” 잠들었기만 해봐라. 내가 이걸 어떻게 구해왔는데…….

    전투적으로 돌진하던 그의 발걸음이 거실에 도달하자마자 우뚝 멈추어 섰다.

    소파에 앉아 잠이 든 수빈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모양이다. 예준은 조용히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가지런하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미동도 없는 걸 보니, 제법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이 수빈의 얼굴 위를 느리게 훑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예준의 시선이 수빈의 속눈썹을 시작으로 그녀의 이마와 코를 타고 내려왔다.

    작은 콧방울과 뽀얀 뺨. 적당히 도톰한 혈색 좋은 입술까지.

    그녀의 얼굴 곳곳에 예준의 시선이 닿았다.

    느렸지만, 아주 꼼꼼하게

    수빈을 가만히 바라보던 예준의 입술 끝이 묘하게 올라섰다.

    “신수빈,,,

    그가 작게 그녀를 불렀지만, 역시나 미동도 없었다.

    “신수빈, 눈떠봐. 케이크 사왔어.”

    예준이 손가락 끝으로 수빈의 작은 콧방울을 톡톡두드렸다.

    “안 일어나면 내가 다 먹어 없앤다?”

    그의 나긋한 속삭임에 수빈의 콧잔등이 찡긋거렸다.

    “케이크 사오라며. 내가 이거 구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자버리기 있냐?”

    예준이 계속해서 코끝을 간지럽게 건들자, 이번엔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러더니 마침내.

    깜박. 느리게 또 깜박.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섰다.

    맑은 눈망울 안에 예준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어?”

    수빈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언제 왔어?”

    “바二L " O 匚그 .

    “……케이크는?”

    눈뜨자마자 찾는 게 케이크라는 게 어쩐지 조금 허무하기도 했지만, 예준은 곧 무뚝뚝한 얼굴로 연분홍빛 상자를 내밀었다.

    “여기.”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케이크 상자에 수빈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허!”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격한 리액션을 선보였다.

    “헐, 대박!”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 수빈이 덥석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었다.

    “진짜 사왔어??? 어떻게???”

    이걸 사러 일산까지 다녀왔다고 하기가 좀 민망했던 예준은 구부렸던 상체를 세우며 대충 둘러댔다.

    “그냥 하나 남아있어서, 사왔어.”

    그런데 상자에 적힌 분점 주소를 본 수빈이 더 놀라서 소리 지르듯 외쳤다.

    “일산까지 다녀왔어???”

    끄응.

    대답은 못하고 괜히 딴청을 피우는 예준이었다.

    “고마워, 여보! 자기 진짜 최고야!”

    아드레날린이 솟구친 수빈이 벌떡 일어나 깡충깡충 뛰었다. 그녀는 소파 위에 케이크를 내려놓고는 예준의 손을 맞잡고 마구 기쁨을 표출했다.

    “잊었나본데, 너 아까 '여자당 미션 끝냈어.” “아, 그랬나? 그럼 이건 그냥 서비스라고 치자. 수고비야.”

    “누구 맘대로 그런걸 줘? 남발하지 마.”

    예준이 타박했지만, 수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혼잣말을 이었다.

    “역시 달콤한건 위대해.”

    천하의 원수 같던 놈에게 뽀뽀를 퍼부어주고 싶다는 마법까지 이루어지게 하니까!

    그녀가 잔뜩 흥분한 채 뛰어갔다.

    수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예준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이유 모를 부끄러움에 약간의 뿌듯함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샤워를 마친 예준이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갔을 때, 그녀는 케이크에 초 하나를 꽂아둔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안 먹고 있어?”

    무심히 식탁을 지나치며 던진 말에 수빈이 대답했다.

    “너 오면 같이 먹으려고.”

    “나는 단 거 안 좋아한다니까?”

    “그럼 이참에 좋아해보上 네가 그렇게 매사 까칠한 이유도 어쩌면 당이 부족해서…….”

    “혼날래?”

    예준의 까칠한 반응에 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거 보卜. 확실히 당이 부족해서 애가 예민한 거라니까.

    혀를 빼죽 내민 그녀가 성냥을 꺼내들었다.

    “초라도 같이 끄자.”

    “애냐. 그런 걸 하게.”

    넣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 초는 왜 들어가있는 건지 모르겠다.

    무심히 대꾸한 예준이 물 한 컵을 비우고 돌아서려하자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시간 오래 안 뺏을게. 한 조각만 얼른 먹고 치울 테니까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그 말에 예준이 수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슬쩍 시선을 피한 그녀가 잡고 있던 예준의 옷깃을 스르르 놓아주었다.

    “너는 혼자 먹는 게 편하겠지만, 나는 도통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그동안 잘만 먹더니, 갑자기 왜.”

    건조한 그의 대꾸에 조금 머뭇거리 던 수빈은 작게 대답을 이었다.

    “잘 먹은 적 없었어 한번도.”

    멀어지려던 예준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나는 집에서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늘 여럿이서 먹던 게 습관이 도H서……

    혼자 밥을 먹는 일이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는다고

    예준은 그녀의 말에 지나간 기억들이 마치 기다리 기 라도 했다는 듯 떠올랐다.

    하와이에서 조식을 먹었을 때도 누가 쯫아오기 라도 하는 것처럼 밥을 먹고 제 가슴을 텅텅 치던 그녀의 모습과 얼마 전

    식탁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반도 못 먹은 달걀 프라이. 그리고 그날 혼자 샌드위치로 끼 니를 때우고 들어와 탈이 났던 모습들이 차례로 뇌리를 스쳤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물으려다가 직간접적으로 숱하게 제 입장을 어필했던 그녀의 모습이 또 한 번 떠올라 묻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결국 예준은 질문 대신 다른 말을 택했다.

    “싫어하는 사람이랑 마주보고 밥 먹는 거 안 불편해?”

    툭 불거져 나온 그 말에 수빈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다.

    어쩐지 가슴이 아프다.

    싫다는 사람 붙들고 같이 먹어달라고 조르는 건 제 쪽인데, 어째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수빈은 잠시 생각을 곱씹다가 예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좀 얄미울 때도 있지만, 마주 앉아서 밥 먹는 게 어려울 만큼 싫지는 않아.”

    그러고는 곧장 항변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하자.”

    “내가 널 싫어하는게 아니라, 네가 날 싫어하는 거것,I. 넌 입만 열면 나 싫다고 그랬었잖아.”

    예준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린 시절 수빈의 호의는 늘 두려움을 동반한 낯설음을 느끼게 했고, 그 불편함을 호감이라고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껍데기가 뒤바뀌어도 그녀는 늘 양지의 꽃처럼 밝았지만, 자신의 내면은 여전히 풀 한 포기 싹틔울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음지였다.

    모든 게 바뀌어도 근본은 바뀔 수 없다는 걸, 매번 수빈을 통해 깨달았는데.

    ……당연히 그녀가 좋을 리 없었다.

    말이 없는 예준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빈은 체념하듯 돌아서 식탁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케이크 한조각을 접시에 덜어낸 두I, 포크로 조금 잘라내 다시 예준에게 다가왔다.

    “한 번 먹어봐.”

    끈질긴 그녀의 태도에 예준이 눈살을 찌푸렸지 만, 수빈도 물러서지 않고 조곤조곤 그를 회유했다.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밖에 안 먹은 사람은 없다는 마성의 케이크란 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일단 맛보면.” 확신에 찬 표정으로 수빈이 빙긋 웃었다.

    “좋아할수밖에 없을걸?”

    예준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그러니까……,케이크가 아닌 수빈을.

    그녀는 더 이상 피하지 않는 예준을 가만히 살피다가 자연스럽게 벌어져있는 그의 입술 사이로 케이크 조각을 쏙 밀어 넣었다.

    우는 아이에게 달콤한 사탕 하나를

    물려주듯.

    “어때?”

    조심히 그의 반응을 살피던 수빈이 묻자 예준은 마지못해 입을 움직였다.

    “맛있지?”

    그녀가 묻기 무섭게 대답이 돌아왔다.

    “맛없어。

    “으이구! 싫으면 관둬. 내가 다 먹지 뭐.” 수빈은 답답하다는 듯 발을 한 번 콩 구르고는 식 탁으로 돌아갔다.

    예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에 묻은 크림을 손끝으로 가볍게 훔쳤다.

    솔직히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단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많이 달지도 않았고 식감도 훌륭했으니까.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여기 케이크가 왜 그렇게 불티나게 팔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 맛이었다.

    달콤한 건 위대하다는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입 안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케이크의 풍미는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일단 맛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을걸?’

    눈을 반짝이 던 수빈의 마지막 말에 예준의 시선이 다시 수빈에게로 향했다.

    ’……좋아할수밖에 없을걸?’

    목적어가 빠진 그녀의 말이 묘한 뉘앙스로 탈바꿈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이질적인 느낌에 예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묘한 기분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저으며 편두를 짚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했나?

    정신이 몽롱하니, 이성이 흐려지려나 보다.

    자리로 돌아간 수빈은 한 조각이 사라진 케이크 위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 우리가 돈과 이해로 얽힌

    사이라는 것 정도는.”

    그래서 어느 한쪽의 외로움을 상대방이 채워줘야 할 의무는 없다는 사실도 잘 안다고.

    불이 붙은 초를 잠시 응시하던 그녀는 곧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짧은 기도를 마친 그녀가 씩씩하게 불을 끈 뒤, 접시에 덜어낸 케이크를 떠먹기 시작했다.

    “뭐라고 기도했어?”

    예준이 묻는 말에 수빈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좋은 남자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뭐?’,

    “혹시나 내가 너랑 정리하고 나중에라도 결혼이 하고 싶어지거든, 꼭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남자랑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날 위해서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고.

    “뭐든 취향이 맞아야 좀 덜 외로울 테니까.” 그녀의 말에 예준이 피식 실소를 했다.

    “그래. 사람은 원래 끼리끼리 만나는 법이지.”

    어딜 가서 누굴 만나더라도 잘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가 봐도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여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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