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화
예준은 요 며칠 자신이 작정하고 들여다본 모든 문제점을 가감 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과연 편하셨을까?”
본인이 주관하고, 본인이 유지하며, 끝까지 고집부린 일이었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계춘이 원한 건 이게 아니었을 거라고.
물론 수빈이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치고는 조금 우회한 게 있었으나,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그녀였다는 사실이 예준 조차 낯설고 당황스럽긴 했다.
“할머니를 위한 자리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누굴 위한 자리도 아니었던 거지.”
속내를 감추기 위해 먼저 꺼내놓은 대답이긴 하지 만, 그렇다고 없는 사실도 아니었다.
그에 수빈도 동의하는지 더 이상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없었다.
“취지를 제대로 살리자는 뜻이니까, 적어도 너는 내 말을 좀 들어줘.”
예준의 말에 수빈이 조용히 수긍했다.
[그래 얘기해봐』
수빈은 그가 단순한 이유로 벌인 일은 아니 었다는 생각에 그의 말을 한 번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긴 통화를 이어갔다. 원래대로라면 퇴근 후 집에서 이야기할 생각이었지만, 예준이 야근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전화로 해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수빈은 말했다.
[그런 거면,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
“말할 기회는 줬고?”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던 예준이 받아쳤다.
끙.
할 말이 없어진 수빈은 들어보지도 않고 그를 타박한 게 조금은 미안해졌다.
[아무튼 네 뜻은 잘 알았어. 오늘 야근이지? 늦게 오겠네기
“어.”
[좋아, 그럼』
주먹을 불끈 쥔 그녀가 통화 내내 골똘히 고민하던 문제를 명쾌히 결론 내리며 씩씩하게 외쳤다.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
“맡기긴 뭘 맡겨. 너 또 괜히 사고 칠 생각
말고……
[끊는다! 수고해, 여보!]
점심 미션을 끝으로 수빈은 자연스럽게 통화를 마무리 지어버렸다.
이미 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준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아. 괜한 얘기를 꺼낸 건 아닐까.
적군만 못한 아군을 끌어들인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부디 착각이길 바라본다.
야근을 마친 예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늦은 퇴근을 했다.
차에 올라타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 수빈에게서 사진 한 장과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 당신 의견 적극 반영해서, 원만히 해결했음. 아무래도 나 좀 천재인 듯・ 마음 편히, 운전 조심해서 와人人
메시지에 뭔가 쓸데없는 특수부호가 들어간 것만 같은 기분에 예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맨 처음에 또렷이 적힌 당신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온다.
“어떻게 한 번을 빼먹는 법이 없냐.”
이로써 그녀는 오늘의 미션도 완벽히 완수해낸 셈이다.
얼굴 한 번 안 붉히고 적시에 칼같이 이루어지는 수빈의 하루 세 번 '여자당 미션'.
이 정도 프로페셔 널함은 가히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 만, 어쨌든 애교 가득한 그녀의 문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준이 첨부파일을 클릭하자, 액정 가득 사진이 떴다.
그 안엔 예훈과 예나를 모두 포함한 본가 식구들 사이에서 해맑게 브이 표시를 하고 있는 수빈이 있었다.
저 멀리 노 집사도 웃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그리고 여덟.
화면을 꽉 채운 사람들은 모두 여덟이나 되는데, 유독 예준의 시선을 사로잡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수빈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비싯, 웃음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준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헉. 움찔한 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못생긴 게.”
듣는 이는 아무도 없건만.
“얼마나 못생겼는지 자꾸 눈이 가는 얼굴이야.,,
나는 왜 자꾸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인가.
“흠흠.”
두어 번 마른 기침을 하던 그가 다시 액정을 켜고 사진을 들여 다봤다.
예준의 시선이 제일 먼저 착은 곳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애자였다. 부쩍 더 마르긴 했지만,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계춘은 젊은 시절 카리스마가 무색할 정도로 잇몸이 드러 나도록 웃고 있는 게, 보고 있는 자신이 괜히 더 민망하기까지 했다.
무뚝뚝한 얼굴은 여전했지만, 섞여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훈탁과 그의 옆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소정이 있다.
그녀야 뭐, 더 이상 매일같이 아침을 차리지 않아도 좋으니 그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것일 테고
사진 찍는 게 영 어색했는지, 간신히 입꼬리만 올리고 있는 예훈과……,이 와중에도 예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는 예나도 보인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노 집사를 거쳐, 예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a ”
역시나 수빈이었다.
피식
힘겹게 거두었던 웃음이 실없이 도로 터져 나오고 만다.
“뭐가좋다고 이렇게 웃고 있어?”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그녀의 생각이 성공적으로 전달된 모양이 다.
마음 편히 오라던 그녀의 메시지가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집에 가면 신이 나서 본인의 활약을 늘어놓겠지?
그 모습이 궁금해 서둘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준은 입가에 남은 미소 한 조각을 그대로 매단 채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웃을 일도 잘 없는, 이 각박한 세상에.” 여전히.
“신수빈, 너는 개그맨 뺨치도록 웃긴 녀석이니까.”
늘어놓을 필요 없는 변명을 중얼거리며.
* * *
한참을 가고 있는데 수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실실 웃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 예준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건조한 말투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어디야? 퇴근했어기
“가고 있어.”
[내가 보낸 메시지랑 사진 봤어? 나 오늘 본가에서 저녁 먹고 왔는데』
“봤어.”
툭 내뱉은 그의 대꾸에 수빈의 목소리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오호라, 봤어기
“。n
[봤는데 읽고 씹었다는 얘기지, 지금기 그녀가 볼멘소리를 한다.
[너 내가 오늘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뤘는지 알아? 무려 아침 풍경을 바꿨……!]
“아침 차리는 거 본인이 좋아서 한 일인데, 사고는 왜 쳤냐고 소리 지르던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
고저 없는 목소리로 푹 찌르고 들어오는 예준의 공격에 할 말을 잃고 있던 수빈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튼 그 얘기는 집에서 하도록 하고!] 수화기 너머 노골적으로 새어 들어오는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수빈이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었다.
[용건이 있어 전화했어.]
“뭔데.”
[너희 회사에서 집까지 오는 길에 러블리 베리'라는 케이크 가게가 있거든?]
그녀의 말에 예준의 시선이 천천히 길가로 향했다.
그래 알지. 우리 회사 여직원들도 목메는 그 케이크가게
없어서 못 판다는 그 유명한 디저트 가게라면 매우 잘 알아.
왜냐하면.
“그 케이크가게는 왜?”
방금 지나쳐 버렸으니까.
[있잖아아.]
예준의 되물음에 수빈의 목소리가 급 부드러움을 장착했다.
[나 거기서 딸기 케이크 하나만 사다주면 안 돼? 저번에 갔을 때 다 팔려서 못 먹었는데, 안 먹은 지 꽤 돼서 손 떨려.]
“케이크가 뭐라고 손까지 떨려?”
코웃음을 치던 예준이 타박했다. 때마침 들어온 유턴 신호에 곧장 차를 돌리 며.
아무것도 모르는 수빈은 더욱 열을 올렸다.
[네가 몰라서 그래. 안 먹어봤으면 말을 마.]
“케이크 따위가 뭐라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리던 예준의 말에 울컥한수빈이 외쳤다.
[케이크 따위라니? 그 케이크가 나한테는 너보다 훨씬 더 설레고 떨리는 존재거든? 퍽퍽한 식빵 같은 누구랑은 달리 얼마나 부드럽고 달콤한데 !]
“……너지금욕했냐?”
[아니 ? 안 했는데기
“시, 뭐라고 한 거 같은데?”
[아아. 너보고 식빵 같다고 했던 거? 그게 왜 욕이야? 그냥 식.빵.'이라고 했을 뿐인데, 식빵」
……이게 진짜.
기껏 차 돌려줬더니만, 확 다시 그냥 가버릴까 보다.
예준의 이마에 핏줄이 빠직 솟아올랐다.
“케이크 별로 안 먹고 싶은가본데?”
[앗! 사다줄 거야기
그녀의 말투가 또 다시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워졌다 .
[이왕이면 홀케이크로 사다줘. 두고두고 먹게』
“너 하는 거 봐서.”
[어? 야! 잠깐!]
“끊어. 운전에 방해돼.”
예준은 그 말을 끝으로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의 차는 어느덧 '러블리 베리'앞에 가지런히 정차되어있었다.
딸랑.
유명한 집이라고 하니, 혹시나 다 팔렸을까 싶어 예준의 발길이 분주해진다.
“어서 오세요.”
가게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상 좋은 남자가 친절하게 예준을 맞았다.
“딸기 케이크 있나요?”
그의 물음에 주인장이 대답했다.
“홀케이크는 떨어졌고, 컵케이크뿐이에요.”
워낙불티나게 팔려 하나 남은 컵케이크가 어딘가 싶겠지만.
'이왕이면 홀케이크로 사다줘. 두고두고
먹게.’
메아리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잠시 갈등이 일었다.
고민하던 예준은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분점은 없습니까?”
그의 물음에 주인장이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있긴 하다만……여기서 좀 먼데 괜찮으시겠어요? 일산까지 가셔야 하는데.” 분점이 일산에 있다는 말에 예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산? ……됐다. 그만두자.
“후우,,
짙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케이크 산다고 이 시간에 일산까지 다녀오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가뜩이나 야근해서
피곤해 죽겠구만.
고개를 젓던 예준이 말을 이었다.
“그럼 그 분점에 홀케이크 있는지 한 번만 확인해주시 겠어요?”
제길. 이 구역 미친놈이 나다, 그래.
예준은 이성과 입이 따로 논다는 사실에 괴로워 몸서리를 쳤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주인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손님 마침 분점에 딱 하나가 남았다고 하네요. 킵 해두라고 할까요?”
“네.지금 바로 갈 테니, 포장 좀 미리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준이 서둘러 케이크 가게를 빠져나와 차에 올라탔다.
부우웅!
그의 차가 총알처럼 튀어나가 일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진입 했다.
“뭐, 식빵? 달콤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기가 차다는 듯 웃던 그가 매섭게 전방을 주시하며 속도를 올렸다.
“장난하냐? 나보다 스윗한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러지.
“케이크가져가서 보자.”
알고 보면 내가 또 그렇게 스윗할 수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