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예준은 밤새 뒤척이느라 제대로 못잔 잠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들만하니, 야속한 알람이 어서 빨리 출근하라며 그를 깨웠다.
“아……
피곤해.
마른세수를 하던 예준은 침대에 늘어져있던 몸을 꾸역꾸역 일으켜 세웠다.
방문을 나선 그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일어 나자마자 물을 마시는 습관 때문이 었다. 그런데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헉! 깜짝이야,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소리 없이 기함했다.
“뭐……해?”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수빈은 앞치마를 매고 식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어제 다 죽어가던 그녀가 맞나 싶다.
게다가 전래 동화에서나 튀어나왔을 법한 이 우렁각시 같은 다소곳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어났어?”
새색시 같은 차림새와는 달리 수빈은 무뚝뚝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말이다.
예준은 물끄러 미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몸은 괜찮아?”
“어 괜찮아.”
대답을 하는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식탁 위에 고정되어있었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도저히 낯부끄러워 예준과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뚜벅뚜벅 걸어온 예준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어디 봐봐.”
당황한 수빈이 얼른 고개를 뒤로 빼며 예준의 손을 쳐냈다.
“아! 보긴 뭘 보卜! 아까 확인했잖……!”
“아까 언제?”
아차 싶었다.
당황한 수빈이 말을 더듬으며 얼버무렸다.
“아, 아니. 너 새벽에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열 재주고…… 그랬잖아.”
그의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꼭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이마가 화끈거렸다.
“아, 아무튼 나 멀쩡해. 그러 니까 이 러고 있지.”
수빈의 말에 예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녀는 김밥을 말고 있었다. 일반 김 밥보다는 속이 좀 간단하고 얇은.
“뭐하는 건데?”
“보면 몰라? 김밥 만들잖아.”
괜히 귓불이 뜨거워진 수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김밥?”
예준이 수빈의 곁으로 상체를 내리며 식탁 위를 한 손으로 짚었다.
“시장에서 안 먹어봤어? 할머니들이 조그맣게 돌돌 말아서 겨자랑 찍어먹으라고 파는 거.”
“안 먹어봤어.”
“마약김밥이라고 하는거야.”
“마약김밥?”
“그래.”
“독약김밥아니고?”
“이게!”
농담처럼 던진 말에 수빈이 눈을 홉뜨고 그를 노려봤다.
발끈하는 그녀의 모습이 파이팅 넘쳐 보이는 걸보니, 정말로다 나은 모양.
예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곧 자리를 떠 냉장고로 향했다. 냉수 한 잔을 들이켠 그가 다시 주방을 나가려는데, 수빈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갑자기 이게 먹고 싶어서 쌌는데, 싸다보니까 너무 많이 싼 거 있지? 좀 먹고 가.”
그녀의 어색한 변명에 예준의 눈과 입이 길게 늘어졌다.
“은혜 갚은 까치야?”
“아! 아니라고! 내가 먹고 싶어서 싼
거라고!”
새빨개진 얼굴로 외치는 소리를 보니 뱃심이 장난이 아니다.
이정도면 완전히 회복한 게 분명하다.
“알았어. 내키지는 않지만 특별히 먹어보도록 할게.”
수빈을 놀리며 한껏 거드름을 피우던 그가 말을 이었다.
예준은 개인 접시와 젓가락 하나를 챙겨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빈이 말아놓은 김밥을 반으로 잘라 예준의 접시에 덜어주고, 겨자소스를 챙겨주었다.
“얻어먹는 건 넌데, 왜 온각호사는 네가 다 부리는데!”
그녀의 타박에 예준이 콜록거리며 대꾸했다.
“알았으니까그만 욕해. 먹다 체하겠다.”
“기껏 아침 챙겨줬더니 체하긴 왜 체해?” 구시렁대던 수빈이 물김치를 덜어 물과 함께 내어주었다.
“체하기만 해. 어? 기껏 아침 챙겨줬더니 체하기만 해보라고.”
가자미눈으로 예준을 흘겨보던 그녀가 김밥을 조금 더 작게 잘라주었다.
욕을 하든, 챙겨주든 하나만 하면 좋을 거 같은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준이 말했다.
“너 꼭 젊었을 때 우리 할머니 보는 거 같아.” “칭찬이지?”
“장담은 못하겠는데, 그런것 같아.”
“좋은 말로 할때, 밥이나 먹어.”
김밥 끄트머리를 들고 있던 수빈이 예준의 입 속에 그것을 쑥 밀어 넣으며 그의 입을 막았다.
평소와는 달라 많이 낯설고 어색했지 만, 어딘가 묘한 온기가 흐르는 아침이었다.
“오늘은 본가 안 가도 도H. 너 아프다고 내가 어젯밤에 어머니한테 전화드렸어.”
밥을 다 먹고, 개수대에 그릇을 내려놓던 예준이 말했다.
“나 다 나았는데?”
“쉬라면 쉬어, 그냥.”
“조만간 너 아침 차리는 거 확줄여달라고 말할 거야. 아니 말나온 김에 오늘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예준의 말에 수빈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 나 정말 괜찮은데!”
“내가안 괜찮아.”
“야! ”
“다녀올게.”
수빈이 불렀지만, 예준은 그대로 뒤를 돌았다.
미련 없이 주방을 빠져나갔던 그가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참. 잊을 뻔했네.”
“뭘?”
“고마워, 여보 김밥 잘 먹었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로봇 같고 어색한 한마디였을 뿐인데, 수빈은 어쩐지 멍해져 버렸다.
이걸 예준이 먼저 챙기는 날이 오다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되레 수빈이 쭈뼛대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야말로 고마워, 어제 돌봐줘서……
이왕 하는 거 한 번 하면, 시공간이 사라질 정도로 제대로 해내는 그녀인데 말이 다.
예준이 그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뭐 잊은거 없어?”
“뭘?”
“호칭이 빠졌잖아, 호칭이.”
굳이 콕 집어 지적하는 예준의 물음에 수빈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고마워……,여보.”
간신히 완수한 아침 미션에 예준은 제 볼일 마쳤다는 듯 주방을 빠져 나갔다.
돌아서는 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서려있었다.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를 마친 그는 수빈이 뭐라고 토를 달기 전에 바삐 집을 나섰다.
더 미룰 것도 없었다.
예준은 출근길에 곧장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인 훈탁을 건너뛰어, 할아버지인 계춘에게 다이렉트로.
짧은 신호음 뒤로, 계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일로 네가 전화를 다 했냐기 그의 응답에 예준은 인사를 먼저 건넸다.
“식사하셨어요?”
[했지.]
“드릴 말씀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본론은 신속히, 사족은 거두절미하고, 예의를 갖춰 간단명료하게.
예준이 애자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과 대화하는 방법 이었다.
“아침 식사에 관한문제인데요, 할아버지.” 그는 요 며칠 고민하며 내린 결론에 대해 차분히 계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채 끝맺기도 전에 말허리가 잘려 버리고 말았다.
[뭐야?! 이놈아!]
오랫동안 고수해오던 아침 풍경을 바꾸자는 얘기에 계춘이 노발대발 난리가 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로 우렁차게 터져 나오는 그의 통박에 예준은 잠시 전화기를 귀에서 떨어트렸다가 다시 가져다 댔다.
“일단 제 말씀 좀 끝까지 들어보세요.”
[듣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녀석아! 네 할미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나마 너희들 얼굴 비추는 건 아침뿐인데……!]
“수빈이 어제 많이 아팠어요, 할아버지.”
[……뭐기
듣기 싫다는 말만 반복하던 계춘이 일순
말을 멈추었다.
[갑자기 수빈이가 오H! 어제 헤어질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몸살감기요.”
[아이고, 어쩌다가! 많이 앓았냐? 응?
병원은! 병원은 데리고 갔고기
이토록 격한 반응이라니.
수빈과 결혼한 뒤로 매번 보는 반응이면서도 예준은 좀처럼 적응하기가 힘든 부분이었다.
작게 실소하던 예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화만 내지 마시고, 일단 끝까지
들어주세요.”
차분하게 계춘을 회유하던 예준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수빈이 어제 그렇게 호되게 앓았던 결정적인 이유가 아침을 차렸던 일 때문은
아니었다. 고된 일이긴 하지만, 충분한 자의로 하는 일이었고.
물론 계춘이 어떤 생각으로 그걸 이제껏 고수해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관망할 수만은 없었다. 적당한 타협과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너 진짜, 기어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수빈의 목소리가 잔뜩 흥분에 젖어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앞으로 드시면 얼마나 드신다고!]
얼마나 다다다 쏘아대는지, 입을 열 기회를 안준다.
예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보면 또 영락없이 계춘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건 자신과 매한가지인데, 이쯤 되니 사실은그녀가본가의 혈육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
“사람 말좀 끝까지 들어볼래?”
편두를 짚던 예준이 말을 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어머니 음식
솜씨……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어쨌든 이거 서로 너무 괴로운 일이야. 취지는 알겠지만, 방법이 틀렸으니 개선이 필요하다는 거고.”
[하루 이틀 해온 일도 아니라며.]
“어머니도 그동안 많이 힘들어하셨어 요리는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그쪽엔 영 취미도 재능도 없는데 할아버지는 엄청 까다롭게만 구셨으니까.”
예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수빈이 조용히 다시 되물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왜 굳이 이제 와서 개선하려는 거야기
따지려는 게 아니다.
그저 예준의 이런 태도가 그녀로서도 낯설고, 의문스러웠을뿐.
그런데 건너편의 예준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여보세요? 지예준? 전화 끊었어 기
그녀의 채근에 겨우 다시 통화를 이었을 뿐이다.
“……아니.”
[그런데 왜 말이 없어기
[여보세요? 지예준? 얘 또 말이 없네.
전화기가 이상한가기
재잘대는 그녀의 혼잣말을 들으며 예준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얘기를 가만히
목구멍 뒤로 삼켰다.
너 때문에.
내가이제 오卜서 이러는 이유.
그건 너 때문이라고.
귀찮든 불합리한 일이든 가족 모두가 굳이 나서지 않던 일이었다.
분명히 한 공간에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껍데기만 존재할 뿐, 속은 텅 비고 겉돌기만 했다. 의무적으로 아침상을 차리고, 당연하듯 타박이 뒤따르고, 꾸역꾸역 음식물을 삼키는 일
그것은 그냥 행위에 불과할 뿐, 그곳에 공존은 없었다.
아마도 계춘과 애자를 제외한 모두가 그랬을 테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딱히 이런 의미 없는 일을 왜 계속하고 있는 건지, 이 시간이 갖는 본질이 무엇인지, 불편하다면 그 이유가 뭔지.
모두는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이다.
마치 수행이라도 하듯.
그렇게 본가의 식구들은 오랜 시간동안 이어져온 불편하고 어색한 아침 식사를 묵묵히 견뎌온 것이다.
“신수빈,,
그런데 지금까지 잘 방치해오던 이 모든 것들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너로 인해,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