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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36화 (36/63)
  • 36 화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 예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있는 모양새가 영 삐딱한 게 불만이 한가득인 모습이다.

    “나 다녀올게. 저녁 전에 올 테니까, 밥이라도 같이……

    “싫어・ 혼자 먹는 게 편해.”

    예준의 날선 반응에 수빈도 뻔뻔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나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

    “나는 혼자 먹 어 ?”

    “언제부터 우리가 밥을 같이 먹는

    사이였는데?”

    “같이 사는데 일부러 따로 먹을 필요도 없잖아.”

    “일부러 시간 맞춰 같이 먹을 필요도 없지.” 아오. 말한 마디를 안지네.

    불퉁한 그의 대꾸에 수빈이 입술을 비죽이다 픽 웃었다.

    “엉덩이 좀만졌다고 삐졌어?”

    그녀의 말에 예준은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엉덩이 좀?”

    “부부 사이에 뭐어때.”

    하. 이것 봐라?

    예준이 벌떡 일어서더니 전투적으로 다가왔다.

    놀란 수빈이 움찔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했다.

    타악

    순식간에 지척으로 가까워진 그가 수빈의 얼굴과 어깨 사이를 지나 손으로 벽을 짚었다.

    힉!

    순간이었지만, 수빈은 정말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너무 놀라 숨소리도 내지 못한 그녀가 커다래진 토끼눈으로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예준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뭐,뭐를.”

    “부부 사이에 뭐 어때?”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깐 채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사납게 올라선 그의 눈매가 너는 내가 우습냐고 따져 묻는 것처 럼 보였다.

    게다가 마주보고 있는 얼굴 사이의 간격이 채 한 뼘도 되지 않아 보여, 자칫 방심했다가는 정말로 목덜미라도 물어뜯길 것 같은 분위기였다.

    수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아, 아니 그게. 난 그냥 웃자고……

    “난 재미없는 놈이라 농담, 진담 구분 못해.” 몸을 뒤로 빼봤지만 뒤로는 단단한 벽이, 앞으로는 호랑이 같은 지예준이 다가오고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었다.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수빈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만 다가오고, 거기서 말해!”

    놀란 수빈이 다급히 양손바닥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꿈쩍도 않던 예준은 오히려 보란 듯이 고개를 비틀며 간격을 더 좁혀왔다.

    “왜? 부부 사이에 엉덩이도 만지고 가슴에 코도 박는데, 다른 거라고 못할 거 없지.”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잘못했……!”

    “한 번만 더 이렇게 나오면.”

    귓가에 속살대는 그의 낮은 음성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어 내렸다.

    “그땐 제대로 보여주는 수가 있어.”

    “진짜 부부 관계가 어떤건지.”

    무섭게 경고한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서서히 멀어졌다.

    끽 하고 넘어갈 것처럼 바짝 움츠러들어있던 수빈은 그 길로 부리 나케 현관을 빠져 나갔다.

    “……하아, 하아!”

    숨도 쉬지 못하고 뛰어나온 그녀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예준이 있는 집을 노려보았다.

    “저게 진짜 미쳤나 봐!”

    가슴에서 북이 둥둥 울리듯이 심장이 난리를 쳐 댔다.

    어제 그러고 나서 괜히 어색해질 거 같아 장난 한 번 쳤던 건데, 하마터면 심장마비로 요단강 특급열차를 탈 뻔 했다.

    “어휴. 무서운 놈. 성질머리 하고는!”

    그새 좀 친해졌다고, 잠시 그의 무서움을 망각하고 살았나 싶다.

    다신 장난치지 말아야지.

    고개를 홱홱 젓던 그녀가 몸서리를 치며 시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준은 그녀가 방방 뛰는 장면을 고스란히 베란다에서 구경 중이었다.

    괘씸하긴 한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여간웃긴 녀석이라니까.”

    예상했던 것처럼 수빈과 같이 사니 심심할 틈은 전혀 없었다.

    손톱만큼도 지루할 틈 없이 어쩜 이렇게 매순간이 버라이어티한지.

    예준은 수빈이 작은 점이 되어 멀어지고,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아니, 이게 누구야?”

    본가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던 애자와 계춘은 예고에 없던 손자며느리의 방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짠! 서프라이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양손바닥을 허공에 깜찍하게 펼쳐든 그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놀라셨죠?”

    그녀의 말마따나 놀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놀란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계춘과 애자를 곁에서 보필해온 노 집사도 멀찌감치 서있다가 그녀의 등장에 자못 놀라운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세요, 노 집사님.”

    수빈은 뒤늦게나마 멀리 서있던 노 집사에게도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작게 고개를 꾸벅였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어째 또 왔어, 쉬지 않고?”

    계춘의 말에 애자도 말을 보탰다.

    “그러게. 힘들텐데 뭐하러 왔니.”

    하지만 말과는 달리 두 노부부의 얼굴엔 미처 숨길 수 없는 함박웃음이 꽃처럼 활싹 피어올랐다.

    “에이, 할머님, 할아버님 보고 싶어서 왔죠. 매일 뵙다가 못 뵈니까 너무 이상한 거 있죠?”

    “어이구, 말이라도 고맙구나.”

    그녀가 애교 있게 웃으며 애자의 휠체어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손을 들어 애자의 얼굴에 달라붙어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행동조차 스스럼없었다.

    “괜찮고말고.”

    애교 많고 기특한 손자며느리를 애자는 흐뭇한 얼굴로 한참이나 내려 다봤다.

    “다른 분들은요?”

    온 김에 인사 먼저 하고 올까 싶어 물은 말에 계춘이 답했다.

    “날 좋으니 다들 약속 잡고 놀러 나갔지.” 시아버지인 훈탁은 평일과 주말을 딱히

    가리지 않는 회사 일로, 시어머니인 소정은 사교 모임에, 예나는 친구 만나러, 예훈은 뭘 사러간다고 나갔는데 어디 간지는 모르겠다고.

    “아……

    이 넓은 저택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노부부 둘이 다 라는 얘기다.

    “그럼 저희도 놀러가요. 날도 좋은데.” 수빈이 벌떡 일어나 계춘 대신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몸도 불편한 할마시 데리고 어딜 간다고 그래?”

    애자가 손을 내저었지만, 수빈은 문제될 거 없다는 투였다.

    “근처에 공원이라도 가요 나중에 제가 면허 따면 멀리 모시고 나갈게요.”

    “아휴, 그냥 있지. 어딜 간다고.”

    손사래를 치고는 있지 만, 그녀도 손자며느리의 제안이 싫지는 않은 듯 했다.

    휠체어를 밀던 수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걸 내가하고 있네?

    음. 뭔가 많이 뒤바뀐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자, 출발합니다!”

    기분 좋게 웃던 그녀는 계춘과 애자, 그리고 노 집사와 함께 근처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아이구! 천천히 가!”

    “앗! 죄송합니다.”

    신나서 속도를 높이던 그녀가 깜짝 놀라 휠체어를 세우고는 멋쩍게 웃었다.

    계춘이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집에서 천천히 걸어 10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공원엔 주말을 맞아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노 집사님은 여기서 좀 쉬고 계세요 제가 할머 님이랑 할아버님 모시고 공원 한 바퀴 돌고 올게요.”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집사님 시야 안에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문제될 것 없다는 듯 씩씩한 수빈의 외침에 노 집사가 조금 웃었다.

    “아, 맞다! 그리고 이거.”

    그녀는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황급히 가방을 열고 곧 병에 담긴 과일주스를 꺼내 노 집사에게 건넸다.

    “목마르시죠? 저희 집 근처에 주스 잘 하는 집이 있거든요. 거기서 사온 토마토주스예요. 천천히 드시고 계세요.”

    “아이고, 뭘 이런걸다 사오셨어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노 집사가 고맙다며 주스를 받아들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네. 그럼 전 작은 사모님 믿고, 쉬고 있겠습니다”

    수빈은 걱정 말라며 꼭 쥔 주먹을 붕붕 흔들어보이고는 애자와 계춘에게로 뛰어갔다.

    노 집사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았다.

    싱그러움을 머금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그녀의 주름진 뺨을 어루만졌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에 짧은 진동이 느껴져 확인해보니, 예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천천히 귀에다

    가져다댔다.

    [안녕하세요, 집사님.저예준입니다』

    늘 그렇듯 깍듯한 인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네, 큰 도련님.”

    [저 혹시, 저희 집사람이랑 같이 계신가요?]

    “네. 지금 할아버님 내외 모시고공원에 나와 있는데……,”

    [그렇군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노 집사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다른 건 아니고, 본가에 왔는데 다들 안 계셔서요」

    “아이구. 작은 사모님 모시러 오셨구나.”

    [네, 뭐]

    멋쩍게 웃던 예준이 다시 물었다.

    [지금 계신 곳이 어디신가요?]

    그의 물음에 노 집사의 입가에 실금 같은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평상복 차림의 예준이 공원으로 찾아와 노 집사의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처럼 맞은 휴일일 텐데, 집에서 편히 쉬시지 않고요.”

    “집에만 있으려니 좀 찌뿌듯해서요.

    바람이나 쐴 겸 나왔습니다.”

    예준의 대꾸에 노 집사가 흐뭇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괜히 민망했는지 예준은 그녀의 손에 들린 주스병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주스병이 참 예쁘네요.”

    “그렇지요? 작은 사모님께서 사다주신 이 사람 간식이랍니다.”

    “집사람이요?”

    예준의 되묻는 말에 노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발치에 있는 수빈과 계춘, 그리고

    애자를 바라보았다.

    “근처에 맛있는 주스집이 있다고 사다주셨어요. 와주기만 해도 반가운데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예준의 시선도 멀리에 있는 수빈을 향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종알종알 열심히도 떠들어댄다.

    “얼굴도 예쁘지만, 타고난 심성이 참 밝으신 분입 니다. 보면 볼수록 어찌나 고운지요.”

    노 집사는 마치 제 손자며느리 라도 바라보는 듯한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예준에게도 낯익은 풍경은 아니었다.

    애자는 그렇다 쳐도 계춘이 저렇게 격 없이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 계춘은 늘 엄하고, 냉정하고, 언제 화낼지 모르는 도깨비 같은 얼굴의 소유자였다.

    “할아버지도 저렇게 웃으실 줄 아는 분이셨네요. 지금이야 그렇다 쳐도 젊었을 땐 할머니 속깨나 썩이셨다고 들었는데.”

    예준이 넌지시 흘린 농담에 노 집사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할머님도 보통은 아니셨지만 말이에요.” 소곤소곤 귓속말하던 노 집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저런 둘도 없는 사랑꾼이 되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두 분 다 나이는 못 속이나 봅니다.”

    주거니 받거니 한 가벼운 우스갯소리에 예준과 노 집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수빈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도깨비 같은 계춘과 호랑이 같은 애자 사이에서 재간을 떨고 있다.

    “저런 분이 새 식구로들어와참 다행이에요.”

    그에 예준이 조용히 혼잣말하듯 대꾸했다.

    그러게요.”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옅은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제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탁월했던 것 같네요.”

    타고난 천성이 밝아 어딜 가든 자신이 속한 곳의 분위기를 바꾸는 사람이 있는데, 수빈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어둠을 조용히 밝히는 촛불 같은 은은함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숨을 불어 넣는 태양처럼 .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예준은 생각했다.

    그리고 노 집사는 그런 예준의 모습을 말없이 관망했다.

    주변의 변화엔 늘 기민한 도련님이 왜 자신의 변화는 눈치채지 못하는 지, 그저 웃음이 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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