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 살벌한 부부-35화 (35/63)
  • 3 5화

    잠시 후.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등을 돌린 채 씩씩거 리고 있었다.

    “내가 일부러 그랬냐? 어디서 사람을 변태 취급이야! 너야말로 취한 사람 옷은 왜 벗기려 들어?”

    “이게 기껏 생각해주니까!”

    생각은 무슨, 웃기고 있네 !”

    예준이 반박했고, 사실 수빈도 그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명백히 사고라는 것도 매우 잘 알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사과가 나오진 않았다.

    “그러니까 술 취한 척은 왜 해! 사람을 엿 먹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녀의 말에 예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

    뻐근한 턱을 어루만지던 그가 날카롭게 쏘아댔다.

    수빈도 그 부분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결혼 전에 술 취한 척 그를 떠본 건 자신이 먼저 했던 행동이었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유부녀면 유부녀답게 행동해. 멀쩡한 남편 바보 만들지 말고.”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예준의 태도에 수빈도 발끈했다.

    “걔 내 동기거든? 그냥 친한 친구라고!”

    “남녀 사이에 동기고 친구가 어디 있어.”

    “남녀 사이에 원수지간인 너랑 나도 있는데 친구 못 만들라는 법 있어?”

    “친구 같은 소리하네. 결혼했으면 그런 건 알아서 끊어.”

    쌀쌀맞기만 한 대꾸에 수빈이 기가 차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연애를 하든, 나중에 너랑 이혼하고 살림을 차리든 맘대로 하라며?”

    “새 살림 차리라는 것도 지금 살림 정리한 이후의 얘기야. 결혼 기간중에 연애를 할 거면 최소한 몰래하는 정도의 예의는 차렸어야지 .”

    “야……

    “아무리 못마땅해도 내가 네 남편으로 살 동안은 내 얼굴에 먹칠할 생각은 하지 마.”

    틀린 말은아니었지만, 듣다보니 어딘가 억울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 진짜! 내가 뭘 얼마나 대단한 실수를 했다고 이래 ! 그냥 걔 혼자 한 말 가지고……!”

    “너도 받아줬잖아!”

    오올! 박성호!’

    예준은 그 별거 아닌 추임새에 화가 났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匚上 하지만 수빈은 자신이 도대체 뭐라고 받아줬다는 건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렇게 한 치의 물러남도 없는 다툼 끝에 잔뜩 화가 난 채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재수 없어 ! 지예준! 그냥 길거리에 버리고 오는건데!”

    수빈은 억울한 마음에 베개를 퍽퍽 내려쳤다.

    예준 역시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 찬물 샤워를 해야했다.

    “제기랄.”

    별 것도 아닌 걸로 화를 냈다는 것도 열 받아 죽겠는데, 더 환장하겠는 건 자꾸만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던 감촉이 떠오른다는 거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던 그 감촉!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몇 번이나 되뇌어봐도, 달아오른 민망함은 쉬이 사그라지질 생각을 않는다.

    “……하아.”

    예준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분노 아닌 분노에 두 사람은 모두 잠을 설친 밤이었다.

    * * *

    다음 날. 수빈은 모처럼 쉬는 날이었는데,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어휴 이런 날은 꼭 잠도 안 와요.”

    뒤척이던 그녀는 더 이상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주방으로 나갔다.

    밥통은 텅 비어있었고, 냉장고엔 마른 반찬 몇 가지와 생수, 그리고 자신이 사다놓은 맥주 몇 캔이 전부였다.

    몇 개는 정남이 챙겨준 거였고, 몇 개는 신혼이 시작되자마자 부랴부랴 비상용으로 채워 넣었던 것이다.

    혹시나 시댁에서 예고 없이 들이닥치기라도 할까 구색만 갖춰놓았던 건데, 다행인지 아닌지 시댁 식구들이 갑자기 방문해오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냉장고를 비우려고 안쪽 깊숙한 곳을 살펴보는데, 무언가가 또 있었다.

    “이건 뭐야? 웬치즈?”

    제가 사다놓은 기억은 없으니 예준의 것이려니 했다.

    정리하는 김에 찬장도 열어보았다.

    그런데 있는 거 라고는 인스턴트 카레 몇 개와 참치 캔, 시리얼 바가 전부였다.

    “……뭐야・여태 이런것만 먹고산 거야?”

    한창 정신없던 시기가 지나고나니,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지다보니 육포가 걸려나온다.

    “오! 육포!”

    치즈와 육포 모두 예준이 어제 수빈을 위해 사다놓은 것이었지만, 진실을 알 리 없는 수빈은 역시나 예준의 것이라고만 여겼다.

    나중에 안주 떨어질 때 슬쩍

    얻어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집을 나섰다.

    근처의 마트에 가 간단히 장을 봐온 수빈은 아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단한 찌개나 밑반찬 정도는 했다.

    밥솥의 밥이 완성되고, 수빈은 밥공기 두 개를 챙겨들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기는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제 밥만 차리는 건 좀…… 치사하다.

    그런데 그때 도어록이 해지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당연히 방에서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준은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나갔다 온 모양이 었다.

    운동복 차림의 그가 주방에 모습을 나타냈다.

    예준의 얼굴을 마주하니 다시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져 수빈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씻고 나와서 밥 먹어.”

    그녀가 다 지어진 밥을 뒤섞으며 하는 말에 예준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내 것도 차렸어?”

    “먹을 걸로 치사하게 굴기 싫으니까.”

    시크하게 대꾸하는 수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준은 더 이상의 대꾸 없이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집 안에 갓 지은 밥 냄새와 고소한 된장찌개 냄새가 진동을 했다.

    혼자 살면서 직접 밥을 지어먹었던 기억은 없던 지라 참 생소한 기분이었다.

    식탁에 앉으니 수빈이 뽀얀 쌀밥이 동그랗게 담긴 밥공기를 내밀었다.

    그걸 보는데…….

    제기랄.

    왜 그녀의 봉긋한 살결이 떠오르는 것인가.

    진짜 미쳐가는 건가?

    예준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밥공기를 노려봐?”

    수빈의 물음에 예준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네 가슴 생각나서 노려봤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잘 먹겠습니다.”

    합장을 한 뒤 씩씩하게 외친 수빈이 밥 한술을 뜨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뭐해?”

    ,,왜.,,

    “나 좀 이따 할머님 뵈러 본가 갈 건데, 시간 되면 너도 같이 갈래?”

    “둘이 가면 더 좋아하실 거 같은데.”

    그에 예준은 말없이 수빈을 바라보았다.

    제법 오랫동안이나.

    “왜…… 그렇게 쳐다봐?”

    수빈이 머쓱하게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녀가 시선을 피했지만, 예준은 여전히 수빈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결혼하고 제대로 쉬는 거 처음이잖아.”

    “근데?,,

    “매일 뵙는데, 굳이 오늘 또 뵈러 가겠다고?”

    “그러면 안돼?”

    수빈은 뭐가 문제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할머님한테 잘해드리라며.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지금껏 해온 정도로만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의무감 때문에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야. 그동안 충분히 잘 해왔고, 오늘 하루 쉰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싫은 게 아니었다.

    이 결혼 자체가 업무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수빈이 필요 이상으로 의무감을 갖는 건, 예준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빈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섰다.

    “내가 할머님 뵈러 가는 게 싫은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야.”

    싫을 리가.

    그저 식구들이 다 하지 못한 도리를 수빈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불편했고,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럼 문제될 거 없것回. 나도 내가 좋아서 가는거거든.”

    수빈이 재차 강조하자, 예준은 네 맘대로 하라는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는 아무 대꾸 없이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늘 먹던 맛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주말 아침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맛은 어때?”

    내심 신경이 쓰였던 터라, 수빈이 조심스럽게 물은 말에.

    “조미료 맛 팍팍 나.”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수빈 역시 주눅 들지 않았다.

    “맛있다는 말 되게 돌려서 한다?”

    “조미료로 간한 거 맞나 보네.”

    “조미료 좀 넣으면 어때. 맛있으면 그만이지. 그거 좀 넣는다고 안 죽거든?”

    피식

    나도 맛없다고 한 적 없는데? 싫다고도 안 했고

    옅은 실소로 대꾸를 대신한 채 예준은 계속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예준이 다 비운 그릇을 들고 일어서자, 수빈이 말했다.

    “놔둬. 내가 설거지할게.”

    “본가간다며.”

    “하고가면 돼.”

    “밥은 네가 했으니까,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하는 게 맞아.”

    예준의 대꾸에 수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별 것도 아닌데, 참 빚지기 싫어한다.

    저렇게 살면 안 피곤한가?

    “그럼 네가 해라.”

    입술을 삐죽이던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물병을 들어 물을 한 컵 따르며 예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무장갑 끼고 하지? 앞치마도 좀 매고. 물

    튈 텐데.”

    대꾸가 없다.

    금세 물 한 잔을 비워낸 수빈은 그냥 일어서려다 다시 컵에 물을 채워 예준에게 다가갔다.

    “물 마셨어?”

    “아니.”

    설거지에 집중하는 탓에 대꾸만 툭 튀어나왔다.

    수빈은 물컵을 들어 예준의 입술 앞에 가져다대주었다.

    “마셔.”

    “됐어.”

    “목 안 말라?”

    “안 마르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예준이 무뚝뚝하게 대꾸했지 만, 수빈은 여전히 그의 곁을 맴돌 뿐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하라고 말하려는데 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좀 다퉜다고 여자당 건너뛰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할말이 그거였냐?

    그놈의 '여자당'.

    괜히 시작했나 싶기도 하지만, 온전한 위장 결혼을 위해 뱉었던 말을 도로 무를 순 없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맞지.

    예준은 설거지를 하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설거지 중이니까, 손잡는 건 좀 봐줄래?”

    까칠해진 속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예준은 애써 부드럽게 물었다.

    “좋아.”

    수빈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로 겨우 미소를 지은 예준이

    입을 열었다.

    밥.잘, 먹, 었,어여涅. 고, 마, 워.”

    국어책을 읽든 딱딱한 인사였다.

    보는 눈이 없으니, 철판 깔고 혀에 버터를 처바르는 짓까지는 도저히 나오질 않는다.

    똑바로 안 하냐고 시비라도 걸까 싶었는데, 어쩐 일인지 수빈은 너그럽게 넘어가주었다.

    “별말씀을. 이제 내 차례지?”

    만족한 듯 웃던 수빈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설거지해줘서 고마워, 자기야.”

    그러고는 불시에 손끝으로 톡톡, 예준의 엉덩 이를 두드렸다.

    불시에 닥쳐든 당황스러운 감각에 예준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트릴 뻔했다.

    “야!!!”

    뻣뻣하게 굳어있던 그가 뒤늦게 소리쳤지만, 수빈은 혀를 한 번 쏙 내밀었다 넣고는 부리나케 주방을 빠져나갔다.

    “너도 어제 내 가슴에 얼굴 파묻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쌤쌤인 거다? 서로 부끄럽기 없기야!”

    주방 벽에 반쯤 고개를 내민 채 깔깔 웃던 수빈이 욕실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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