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화
한편 회식 자리는 곧 등장할 예준의 이야기로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부지배인님 남편분 처음에 보고 연예인인줄 알았잖아요, 진짜.”
막내인 영하가 눈을 빛내며 하는 말에 여기저기서 동조가 이어졌다.
“내말이. 결혼하는 사람 부럽긴 처음이더라. 얘는 그 얼굴 매일 보고 지낼 거 아냐. 꽁꽁 숨겨놓을 만해.”
“그때 호텔에 한 번 찾아오셨었잖아요.
가시고 나서 난리 났었어요, 진짜. 누구냐고.” 수빈의 동기와 후배가 연이어 말했고, “그러게 말이다. 하도 난리 법석이기에
얼마나 잘났나 보자, 벼르고 있었더니만. 어우,
결혼식 날 실제로 보니까. 그냥 와아.”
거들던 이 과장이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치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하하. 과찬이세요.”
수빈은 이 상황이 민망해 몸 둘 바를 몰랐匚匕 지예준이 이걸 듣고 콧대가 하늘로 치솟을 걸 상상하니, 당장이라도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냥모르쇠 철판이라도 깔아버릴 걸, 괜히 불렀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 때쯤.
화제의 중심에 서있던 예준이 드라마의 주인공처 럼 화려하게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그는 등장과 동시에 호프집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을 가뿐히 강탈했다.
“안녕하십니까.”
깍듯하게 인사를 마친 예준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수빈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옆에 붙어 앉아있는 남자 직원 한명을.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성호입니다. 수빈이 직장동료예요.”
또 수빈이란다.
뭔데 성을 빼고 부르지? 신수빈 성이 신
씨라는 걸 모르나?
게다가이 목소리.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그놈 목소리가 확실했다.
성호의 인사에 예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예준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고는,
“지예준입니다.”
눈을 똑바로 맞춘 채 인사를 건넸다.
순간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악력에 성호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지?
방금 팔씨름 한판 하자는 신호 같았는데?
“하하. 손힘이 좋으시네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찡그렸던 게 민망해진 성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자주 듣는 말입니다.”
어쩐지 살벌한 냉소가 돌아왔다.
……뭐지?
눈싸움부터 하자는 얘긴가?
성호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제일 바깥쪽에 앉아있던 영하가 말했다.
“아! 이쪽에 앉으세요.”
그녀는 수빈과 자신의 사이를 넓히며 그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지만, 예준은 영하와
수빈을 차례로 지나쳐 굳이 안쪽에 앉은 성호와 수빈의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았다.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남편이 떡하니 나타났는데도, 꿈쩍도 않는 외간 남자의 궁둥이가 맘에 들지 않았을 뿌
아무것도 모르는 수빈은 그의 차림새를 곁눈질하다가 복화술 하듯 말했다.
“왜 이렇게 빼입고 왔어? 집에서 입고 있던 대로 대충 나올 것이지, 멋은 왜 이렇게 부렸대?”
놀릴 거리를 발견해 웃고 있는 입이 사악하게 늘어졌다.
그에 예준이 여유만만하게 속삭였다.
“그럼 팬티 바람으로 올 걸 그랬나?”
“뭐?’,
“나 팬티만 입고 있었어.”
“거짓말. 그동안 다 갖춰 입고 있었으면서.”
“너랑 있으니까 갖춰 입었던 거야. 어쩔 수
없이.”
당황한 수빈이 정색하며 입을 떡 벌렸다.
“아쉬우면 말해. 앞으로 편하게 대해줄 테니까”
예준이 한쪽 눈썹을 개구지게 치켰다 내렸다.
“원하면 이참에 아예 태초로 돌아가 줄 수도 있어.”
수빈은 빨개진 얼굴로 꿀 먹은 벙이리가 됐고, 예준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어우! 그렇게 좋냐?”
“집에서 매일 보면서, 여기서까지 귓속말 같은 거 해야겠어? 닭살이야, 진짜!”
……아니라고, 그런 거.
이 자식이 방금 내 눈을 멀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단 말이야.
진실을 알 리 없는 동료들의 타박에 그저 억울한 수빈이 었다.
어색함도 잠시
곧 유쾌함을 빙자한 살벌한 신혼부부 신고식이 이루어졌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축하주라는 허울 좋은 포장을 덧씌운 폭탄주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성격 같아서는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당신들한테 이딴 저질 술이나 얻어 마셔야 하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직장 사람들이었다.
자신은 안 보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지 만 수빈은 그러지 못할 테니, 참는 수밖에 없었다.
“아! 이제 진짜 더는 못 마셔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도 이런 분위기가 딱히 싫지는 않았던 듯, 깔깔 웃어댔다.
주면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는 수빈에 비해 예준은 최선을 다해 몸을 사렸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둘 다 같이 떡이 되어버린 모습을 상상하니 진저리가 쳐질 만큼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호의 도발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재미없게 왜 주는 대로 다 마시고 있냐? 못 마시겠으면 흑기사 불러. 남편도 있것[다, 뭐가 문제야?”
……저 새끼가
예준이 성호를 싸늘하게 쳐 다보는데, 수빈은 벌게진 눈으로 예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질반질한 입술이 우물거렸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예준이 마구 그녀를 쏘아봤지만
“자기야.”
기어이 저놈의,자기야,가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그에 예준은 그만 표정 관리를 못하고 미간을 좁혀버렸다.
예준의 눈빛이 흔들린 걸 기가 막히게 캐치한 수빈이 냉큼 말을 이었다.
“나 흑기사 해 줘.”
설마 이렇게 여러 사람 있는 데서 자길 물 먹일까 싶었다.
그래서 아주 당당하게 흑기사를 소환했건만.
“거절하면 두 잔이다, 신수빈!”
누군가가 외친 외침에 예준이 안타깝다는 듯 답했다.
“그러게 왜 한 잔을 두 잔으로 늘리는 과오를 저지르지?”
수빈은 눈이 커다래졌다.
천하의 지예준.
쓸데없이 소신 하나는 굳건한 쓰레기였다.
“진짜 안 마셔줄 거 야?”
“내가 지금 누굴 도울 처지가 아니라.”
“알잖아. 나술 약한 거.”
어느 동네 누가 술이 약해요?
시크한 그의 반응에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지만, 곧 모두가 빵 터지고 말았다.
“아! 형부, 대박!”
“예준 씨 센스가 아주 국대급이네! 분위기 살리는 법을 아주 잘 알아!”
의도치 않게 사방에서 극찬이 이어졌다.
“아하하! 우리 웬수……. 아, 아니 우리 신랑이 이렇게나 재밌어요, 아주. 오호호호!”
……너 집에 가서 보자.
결국 수빈은 폭탄주 두 잔을 연이어 마셔야 했다.
그러다가.
“ o ”
수빈이 돌연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자기야.”
나지막이 예준을 부른 수빈이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입을 틀어 막았다.
“나……, 토할 거 같아.”
그에 예준이 흠칫했다.
아직 한 잔이 남았지만, 잎고 싶었던 괴로운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겁한 예준이 수빈의 입으로 들어가려던 술잔을 거의 빼앗듯 낚아챘다.
그러고는 잔에 담긴 황금빛 독극물을 심란하게 내려다보았다.
“하아.”
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먹을 때 먹더라도, 선은 긋고 마셔야지
“사실제가 술이 정말 안받는
체질이라……
“쓰러지면 제가 업어다드릴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호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예준의 눈이 번득였다.
등 내주기만 해. 내 앞에서 뒤돌아서 쪼그려 앉는 순간 엉덩이를 걷어차 버릴 거다.
예준은 마음속에 참을 인(忍)을 새겨 넣으며 마지못해 술을 들이켰다.
그의 입에서 알싸한 향과 함께 옅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뭐 소맥이 아니라그냥소주……, 아니, 예상했던 대로 독극물이 확실하다.
그렇게 5분이 흘렀다.
예준이 연거푸 폭탄주를 마셔댔고, 보다 못한 수빈이 그의 잔을 낚아챘다.
“내가 흑장미 해줄게.”
흑장미 같은 소리 하네. 눈이나 뜨고 말해라.
“괜찮아. 내가 마실게.”
예준은 자신의 잔을 향해 뻗어오는 그녀의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아 내리며 저지했다.
“왜? 자기 많이 마셨잖아. 내가 도와줄……
“안돼.,,
“그만 마셔.”
예준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 시크한 한마디에 여자들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야. '안 돼'가 저렇게 섹시한 단어였냐.”
“저도이번에 알았어요, 선배님.”
여사원들이 예준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며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그러든지 말든지 예준은 단숨에 술을 들이키며,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술자리를 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심하던 예준은 일단 쓰러지고 보기로 했다.
신수빈한테 연기 같은 걸로 밀릴 수는 없지. 물방울이 맺힌 붉은 입술이 희미하게 올라서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탁 풀린 눈동자를 마주한 수빈의 얼굴이 알 수 없는 불길함에 굳었고.
“괘, 괜찮아?”
그녀의 물음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예준이 대답했다.
“안 괜찮아.”
손등으로 입술을 슥 훔치며 웃던 그는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졌다.
“어어!”
놀란 수빈의 동료들이 예준의 어깨를 급히 잡아챘다.
“꺅! 지, 지예…… 아, 아니 ! 자기야!”
지예준! 하고 외칠 뻔한 말을 급하게 수습한 수빈이 외쳤다.
놀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얘, 얘가술이 이렇게 약했나? 아니면 섞어 마시면 훅 가는 스타일이었어? 진짜로??
결국 예준의 의도한 대로 술자리는 그렇게 파하고 말았다.
수빈이 예준의 커다란 몸을 한쪽 어깨에 짊어진 채 낑낑거리며 밖으로 나왔고.
“수빈이 쓰러지겠어요. 저한테 좀 오세요.” 성호와 이 과장이 가까이 다가와 거들려고 했지만 예준이 이를 거부했다.
“만지지 마.”
“에?”
그의 팔을툭 쳐낸 예준이 반쯤 풀린 나른한 눈으로 말했다.
“내 몸만질수 있는 건, 아내뿐이니까요.”
“물론 아내를 만질 수 있는 사람도 남편인 저뿐입니다.”
분명 술김에 취해서 하는 말일 텐데도 묘한 위화감이 드는 말투였다.
“매너도 좋지만 유부녀한테는 함부로 호의 베풀지 마세요.”
예준은 쐐기를 박으며 말문이 막혀버린 성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그에게만 들리게끔 나지막이 속삭였다.
“예를 들자면.”
“엉덩이 온기를 나눠준다든지 하는 저급한 매너 같은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