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화
“망할 내 팔자야. 오늘도 배 터지게 욕만
먹게 생겼네.”
덜덜 떨며 전복죽을 덜던 그녀가 한탄했다.
외모는 누가 봐도 곱디고운 부잣집
안주인인데, 입담은 또 걸걸하다는 게 소정의 반전이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밥상엔 아침부터 때 아닌 시베리아 칼바람이 불었다.
“너도 참. 어떻게 이 귀한 재료를 가져다가 이렇게 밖에 못써먹니 그래.”
“어떻게 끓여야 비린내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 게냐?”
시모와 시부의 연이은 타박에 이어 훈탁과 예준도 말없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쌍둥이 중 오빠인 예훈은 몇 숟갈 꾸역꾸역 밀어 넣는듯하더니, 학교에 늦었다며 일어서버렸고, 동생인 예나는 심지어 입에 넣었던 전복죽을 도로 뱉기까지 했다.
“엄마. 불만 있으면 말로 해. 요리를 하지 말고,,
“이 계집애가!”
“내가 틀린 말 했어? 먹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되바라진 고딩 시누이는 오늘도 가감 없는 싸가지를 뽐내며 얼굴을 허옇게 떡칠하고 학교에 갔다.
어찌됐든 오늘도 아침은 실패다. 4일 연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첫날은 고등어 탕, 엊그제는 해물탕, 어제는 낙지덮밥이었다. 소정이 왜 해물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 되니 뜯어말릴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출근 시간 때문에 설거지는 가사 도우미에게 부탁하고 집을 나서야했다.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본 장면은 훈탁이 소정에게 “당신 부탁이 니까 해산물 요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건네는 장면이었고, 그녀는 있는 힘껏 훈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나마 새 식구인 자신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아, 딱히 마음이 상할 일은 없었지만 의외로 온갖 구박과 타박을 받는 소정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은 수빈이었다.
“어머니가고생이 많으셔.”
그녀가 넌지시 던진 말에 예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 앞으로 너도 같이 고생해야 될 텐데.”
“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잖아. 어머니랑 열심히 맞들어봐.”
얄미운 아군은 오늘도 태연히 운전을 하며 자신을 놀리기 바쁜 모양새였다.
부아가 치민 수빈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대답했다.
“나는 1 년만 버티면 되지만, 어머님은 아니시잖아. 여태 해오셨고, 앞으로도 평생 하셔야 할텐데.”
수빈은 屮년만'이라는 단어에 유독 강조를 하며, 네가 그렇게 얄밉게 놀려댈 수 있는 것도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 켰다.
그에 예준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운전만 했다.
잠시 후.
근처에 있는 역 앞에 차를 세운 예준이 말했다.
“나 오늘 늦어.”
“흥! 나도오늘늦거든?”
“그럼 수고.”
무미건조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수빈이 차에서 내렸다.
예준의 회사는 수빈이 다니는 호텔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던지 라, 그는 늘 아침마다 수빈을 역 앞에 내려준 뒤 돌아가곤 했다.
훈탁이 출근용 차를 한 대 뽑아주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차가 생기면 뭐하냐고.
면허가 없는데.
* * *
하루가 길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수빈은 오자마자 냉장고를 뒤져 캔 맥주부터 깠다.
늦는다는 예준에게 나도 늦는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사실 선약 같은 건 없었다.
누가 더 목소리 크나 아침마다 씨름을 하는 건 그저 일상일 뿐.
수빈은 소파에 앉아 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전복죽이 실패한 이유를 분석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겉보기에 소정의 요리는 뭐 하나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항상 맛은 없었다.
미스터리란 말이지.
[전복 혹시 해동했다가 다시 얼린 거 썼니기 가만히 얘기를 듣던 정남이 물었다.
“아니. 얼려둔 거긴 한데, 아마 생물이었을 걸?,,
[그래? 그럼 얼기 전에 문제가 있었나, 뭐가 문제지? 내장에 문제가 있었나? 음, 소금물로 박박씻었어기
“소금물로 씻어야 돼? 엄마 어젠 그런 말 안 했잖아. 그냥 솔로 슥슥 문질렀는데.”
모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내일은무슨 음식 할 거니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또 해산물 요리하시기 전에 네가 넌지시 먼저 말씀드려보는 건 어때? 기분 나쁘시지 않게 우회해서.]
“안 그래도 그럴까 생각중이야. 쉽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엄마?”
陪」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시 이렇게 하는 건 어떠니기
“어떻게?”
[내가 준 집된장 있지기
(4 Q »
■o.
[해산물 말고 다른 걸 해보는 거야.
된장국이랑 불고기 같은 무난한 거.]
“나 불고기소스 만들 줄 모르는데?”
[엄마가 있잖아.]
정남의 한마디에 꺼져가던 불씨가 살아난 듯 희망이 보였다.
어찌나 든든한지.
수빈은 정남과의 통화를 마무리한 뒤 비장한 표정으로 소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저예요.”
[으, 그래.(어, 그래.)]
발음이 명확치 않은 걸 보니, 아마도 얼굴에 팩을 얹고 있는 듯했다.
눈치 빠른 수빈이 이때다 싶어 얼른 용건을 건넸다.
“어머님, 바쁘시면 짧게 말씀드리고 끊을게요. 혹시 내일 메뉴 아직 안 정하셨으면 배추된장국에, 불고기 어떨까 해서요.
친정엄마가 만들어주신 불고기소스가 있는데, 저희 둘이 먹기엔 너무 많거든요.”
[덴장극에 블그기? 으, 그래. 그그 갠찮겠네. 느 알아서 흐렴.(된장국에 불고기? 오, 그래. 그거 괜찮겠네. 너 알아서 하렴.)]
나이스
“네,어머니. 그럼 재료는 제가 준비해갈게요 쉬세요.”
수빈은 얼른 인사를 건네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침 준비를 시작한 지 5일차가 되는 내일 아침, 드디어 해산물에서 벗어난 아침을 차릴 수 있게 되 었다.
그녀는 다시 정 남에게 전화를 걸어 불고기소스 레시피와 배추된장국 끓이는 방법을 전수받은 뒤 곧장 외투 하나를 걸친 채 마트로 향했다.
“배랑 양파? 다진 마늘은 있고. 어디 보자. 또 뭐가 필요한가.”
수빈은 정 남이 알려준 쇼핑 목록을 꼼꼼히 확인하며 인터넷으로 좋은 식재료 고르는 방법을 검색했다.
마트만 한 바퀴 돌고 집에 왔을 뿐인데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소스는 미리 만들어 숙성을 시켜야했기 때문에 아닌 밤중에 한바탕 일을 치르게 되어버린 수빈이었다.
핸드믹서로 재료를 가는 사이 간장이 사방으로 튀어 옷이 더러워졌다.
“아.,,
그녀는 간장물이 든 티셔츠를 내려다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이런 걸 어떻게 매일 몇 십년동안 해왔는지 모르겠다.
역시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수빈은 어렵게 만들어낸 소스를 병에 담기 시작했다.
그때, 퇴근한 예준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예준은 들어오자마자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뭐 하냐, 이 야밤에?”
“왔어?,,
얼굴에 간장을 묻힌 수빈이 소스 뚜껑과 씨름을 하며 예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일 아침할 거 미리 손질 좀 해놓느라고.”
“오늘 늦는다며.”
“약속 취소됐어.”
피식
“원래 없었던 건 아니고?”
예준이 팔짱을 끼고 선 채 놀리듯 하는 말에, 뜨끔한 수빈은 일부러 못들은 척했다.
“내일은 제대로 된 밥 먹을 수 있는 거야?”
“시비 걸지 말고, 씻기나 하시지? 정 못마땅하면 네가 밥한 번 해보든가. 얻어먹는 주제에 말이 많아.”
수빈이 받아치자 예준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 방금 그 말, 우리 할아버지한테도 한 번 해봐.”
“미쳤냐? 너 할아버님한테 이르면 죽어!” 그녀가 화들짝 놀라 주먹을 불끈 쥐며 예준을 겁박했다.
그러고는 부랴부랴 냉장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준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힘들어, 밥하는 거?”
그가 혼잣말하듯 툭 던진 말에 수빈이 냉장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왜? 힘들다고 하면 네가 대신 해주게?”
“네 일은 네가 해야지.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다정한 목소리로 가차 없이 선을 그어버 리는 예준의 대꾸에 수빈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럼 그렇지. 기대도안했다.
수빈은 농담을 거두고 덤덤히 제 속내를 건넸다.
“할만 해, 아직까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쬐금 힘들지만.”
가감 없이 튀어나온 그녀의 솔직함에 예준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소리 없이 웃었다.
“초반부터 너무 달리지 마. 1 년도 안되서 도망가버리면 곤란하니까.”
그에 수빈이 냉장고 문을 닫으며 예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예준의 양손을 가만히 맞잡더 니 천천히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여보,,
저녁 인사는 해야 했으니까.
“나 그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 아니거든요?
걱정 말고,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 쉬세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은 고이 접어둔 채, 수빈은 오늘의 마지막 미션을 훌륭히 해냈다.
그러고는 어서 너도 하지 않고 뭐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예준을 바라보았다.
그에 예준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 마셨다가 내쉬며 유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도 고생 많았어. 수고했어, 오늘도.”
말이 끝난 지 정확히 3초 후.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한 얼굴로 서로의 손을 홱 하고 떨구어 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친 수빈과 예준은 복도의 끝과 끝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각각 걸음을 돌렸다.
며칠이 지나도 어색하고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잘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나마 오늘은 인사 말고도 제법 많은 말이 오갔다.
좋은 말은 거의……, 아니 하나도 없었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심지어 저녁 한 번 같이 먹질 않았으니 말 다했지
욕실로 들어간 수빈은 칫솔을 꺼내 양치질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거울 속에 방금 전 예준의 얼굴이 떠오르는듯하다.
'당신도 고생 많았어. 수고했어, 오늘도.' 세상 다정한 그의 말투와 눈빛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터진다.
처음 그 제안을 꺼냈을 때, 세상 다 끝난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역시 지예준은 못하는 게 없는 건 물론, 습득도 빠른 인간이었다.
그렇게 또 하루.
겉 다르고 속 다른 부부의 비 밀스러운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