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화
“뭘……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예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다.
“야,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까 그렇게 대놓고 싫어 죽겠다는 티 좀 내지 마. 나라고 좋아서 이러겠냐?”
그녀가 쏘아붙였다.
“이러다가 할머니 편찮으실 때 사실은 너랑 나랑 아버님, 셋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뭐 그런 거 걸리기라도 해보卜. 너희 집이나 우리 집이나 발칵 뒤집어질 건 생각 안 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른들 바보 아니야. 큰 사기를 치려면 적어도 노력은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죽어도 못하겠다는 사람 어디 갔냐?”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시작한 이상 대충하진 말아야 할 거 아니야. 이 계약 중간에 엎어지면 죽도 밥도 안 도H. 네 돈도 날아가고 내 돈도 날아가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냥 모든 게 다 끝나는 거라고.
수빈이 재차 강조했다.
“알았으니까, 하아……. 그 하루에 세 번 어쩌구 하는 거나 설명해봐,,
예준이 못 이긴 척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전에 한 번, 낮에는 각자 회사에 있을 테니까 전화로 한 번, 저녁엔 돌아와서 자기 전에 한 번.”
그녀가 말끝에 힘을 주어 말했다.
“기분 좋은 말로 인사를 건네는 거야. 여보, 당신, 자기 세 개 중에 하나는 무조건 써야 해. 우리가 공적인 자리에서도 어색해지지 않으려면 숱하게 연습을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직접 얼굴 마주보고 할 땐, 손을 잡고 하도록 하자.”
시선을 맞추는 연습과 함께. 그 시간만큼은 우리는 정말 완벽한 쇼윈도 부부가 되어야 하니까!
말없이 수빈의 얘기를 듣던 예준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수빈의 제안을 승낙했다.
“좋아.”
굳이 손까지 잡아야 하나 싶지 만, 수빈도 좋아서 하는 건 아닐 테니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네 말대로 우리 벌써 이틀째니까 오늘부터 연습해.”
“그냥 내일부터……
“아니.”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수빈이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당장 지금부터 해야 해. 미루면 안 되는 일이야.”
“벌칙 게임이라도 하는 기분인데?”
“피차일반이거든?”
둘은 동시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먼저 해?”
“당연히 네가 먼저 한다.”
“장난해? 정정당당히 승부를 보자.”
“좋아. 그럼 가위바위보?”
“펀치 게임 어때. 링 위에서 한판 떠도 좋고.”
“넌 날 그렇게 때리고 싶냐?”
정색하는 수빈의 물음에 예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럼 첫날이니까가위바위보로 하지.”
“가위! 바위!”
예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빈이 한손을
치켜들며 외쳤다.
운명의 순간.
“보!”
마지막 카운트와 함께 두 사람이 제가 결정한 패를 힘차게 내보였다.
그리고 수빈은 힘차게 패하고 말았다.
제기랄!
'남자는 주먹이지' 따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보를 낸 수빈이 가위를 낸 예준에게 패한 것이다. 가위를 낸 예준이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기뻐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 이제 해보시지.”
그가 소파 위에 거만하게 몸을 기대며 거들먹거렸다.
“분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수빈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예준을 똑바로 마주 보았匚卜
여보, 당신, 자기.
보기가 세 개나 있건만 무엇 하나 고르고 싶은 게 없다.
5분 전의 나를 매우 치고 싶었으나, 이제 와서 발 뺄 수도 없는 노릇.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애써 자책하던 그녀가 예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 줘.”
수빈의 말에 예준은 고개를 사뿐히 끄덕이며 의외로 쉽게 손을 내어주었다.
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고 난리란 말인가.
천천히 가까워지던 손끝이 닿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전기라도 감전된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간질간질한 감정이 싫었던 예준은 제가 먼저 수빈의 손을 덥석 잡았고.
“이리 와.”
제 앞으로 가까이 잡아당겼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불식간에 지척으로 서로를 마주본 채 손을 잡고 앉게 되었다.
낯간지 러운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정수리를 관통하더니 팡 하고 터지며, 온몸의 체온을 훅 올렸다.
고르지 못한 숨, 무겁고 더운 공기, 떨리는 손끝.
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예준을 바라보았다.
승자인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오, 오늘 고생 많았어.”
겨우 꺼낸 말에 예준이 계속해보라는 듯 길게 눈을 감았다 뜨며 턱짓을 했다.
“좋은 사위가 되어줘서 고마워.”
a ”
“자, 자……
에라, 모르겠다.
“……자기야!”
흐아아아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빈이 벌떡 일어나 몸서리를 쳤다.
“잘 자! 나 먼저 잔다!”
그 말을 끝으로 수빈은 부리나케 제 방으로 향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예준의 인사는 들을 생각도 않고 도망치듯 피하고 만 것이다.
한편 이렇다 할 반응도, 표정도 없던 예준의 시선은 여전히 수빈이 앉아있던 허공을 향해 있었다.
한참이나 굳은 듯 앉아있던 그가 옅게
눈꺼풀을 떨었다.
자기야, 라는 호칭은 생각보다 훨씬 간지럽고 낯설었다.
“……세상에. 이걸 매일 해야 한다니.” 전생에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픽. 웃음이라기엔 한숨 소리와도 같은 바람 소리.
예준은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섰다.
* * *
“비켜, 비켜, 비켜!”
부엌으로 우당탕탕 뛰 어들어온 수빈이
예준의 등짝을 툭 밀치며 냉장고로 돌진했다.
그녀의 정신 사나운 등장 덕분에 예준이 들고 있던 컵 안의 물이 반이 나 줄어버렸다.
“야……. 너, 진짜.”
넘쳐흐른 물 때문에 젖은 바지를 내려다보는 예준의 눈매가 사나웠다.
“미안, 미안, 미안!”
바쁜 그녀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분주하게 움직 였다.
“나 늦어서 먼저 간다? 늦지 말고 와!”
냉장고에 있던 반찬통을 종이가방에 던져 넣은 그녀가 질끈 묶은 머리를 휘날리며 주방을 빠져 나갔다.
본격적인 유부녀의 삶이 시작되었다.
처음과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병원에 있던 애자가 병원에서의 투병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복귀했다는 것. 가족 간 상의와 본인의 고심 끝에 내린 중대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수빈은 시어머니인 소정을 도와 본가의 필수 방침인 아침 식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삼대가 모두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건 계춘이 정한 방침이었다.
애자가 투병 생활을 시작하며 잠시
보류됐었지만, 그녀가 본가로 돌아오게 되면서 다시 시작된 것이다.
훈탁이 처음수빈에게 아침 식사 준비를 도우라는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예민하게 굴었던 건 의외로 수빈이 아닌 예준이었다.
'아버지. 이 사람 직장 다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수빈은 외려 문제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생이 언제까지 허락될지 모를 애자와 그의 남편인 계춘이 특별히 애정하고 있는 방침이라고 들었던 게 생각나서였다.
은인이기도 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일이라면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수빈이었다.
물론 일요일을 제외한 6일 동안 매일 아침을 준비한다는 게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건 알지만, 몸이 힘든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작 그 정도 각오로 가짜 아내 노릇을 하려던 건 아니니까
수빈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시댁을 향해 열심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준보다 먼저 시댁에 도착한 수빈이 앞치마를 둘러매며 소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그래. 전복은 가져왔니?”
“네.제가어제 다 손질해놨어요.”
“그래. 고생했다. 아! 내장은 분리해왔니?” 그녀가 불린 쌀을 냄비에 쏟으며 물었다.
“네. 분리해왔어요.”
수빈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어제 정남에게 전화를 걸어 전복 손질하는 법을 완벽히 전수 받아 준비해온 전복이었다.
아침 메뉴는 전복죽이었匚h 환자인 애자에게도 부담 없는 음식이었다.
소정은 수빈이 건넨 전복을 다른 냄비에 넣어 다시 수빈에게 건넸다.
“이것 좀 부탁해. 참기름 넣고 달달 볶다가
물 부어 끊이면 돼.”
“네, 어머님.”
수빈은 그녀가 건넨 냄비를 인덕션에 올리고 열심히 볶기 시작했다.
그 사이 소정은 불린 쌀에 내장을 넣어 섞기 시작했다.
“물김치 뜨고, 수저 좀 놔줄래?”
죽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수빈은 소정의 명에 따라 김치냉장고로 향했다.
첫날은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허둥지둥했었는데, 고작 4일이었지만 확실히 손이 빨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물김치 하나 한 번에 찾아 꺼낸 게 뭐 대수라고 괜히 뿌듯하기까지 하다.
수빈은 물김치를 덜어 식탁에 올리며 여전히 바쁜 소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늘도 그녀는 공들여 만진 머리에 몸매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타이트한 롱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 위로 동여맨 앞치마의 레이스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흩날렸다.
확실히 요리를 하는 사람의 복장이라기보다는 부잣집 여사님 같은
차림새였다.
취향이 어쩜 저리 확고한지. 장담컨대 소정의 전생은 공주였던 게 분명하다.
처음엔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봤을 화려한 외모로 매일 아침 차리는 일을 20년 가까이 해왔다니.
하물며 그녀의 외모며 애티튜드가 집안일과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더욱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맨 명품에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하지 만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가 아침을 준비해온 시간과 정성이.
“자, 간 한 번 봐봐.”
안타깝게도 실력에는 비례하지 않았다는 것. 수빈은 소정이 내민 전복죽 한 수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어때? 괜찮니?”
“..O ”
단단히 마음먹고 받아먹었는데도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신비한 맛이었다.
“왜? 짜? 혹시 비린내 나니? 아우, 그럼 안 되는데.”
당황한 소정이 다시 한 수저를 떠 맛을 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다시 한 수저를 크게 떠 입에 넣고는.
u O ”
■日.
수빈과 똑같은 얼굴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전복제대로 손질한 거 맞아?”
날선 그녀의 물음에 놀란 수빈이 고개를 주억 거렸다.
“네.솔로 씻고 흐르는 물에여 러 번
씻었어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움찔해버렸지만, 돌이켜봐도 손질에는 문제가 없었다.
소정은 초조한 듯 새빨갛게 칠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었다.
“……어떡하지? 즉석밥 얼른 뜯어서 볶음밥이 라도 할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없는데요, 어머님 곧 할아버님 내려오실 것 같은데.”
울상이 된 소정에게 뭔가 희망이 될 만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현실이 너무 시궁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 다됐냐?”
계춘이 호랑이 같은 얼굴로 등장했다.
……고부는 사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