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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9화 (29/63)

2 9화

그녀가 우물쭈물 꺼내놓은 단어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무겁고 어색해 몸서리가 쳐질 것만 같은 공기가 두 사람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누른지 정확히 3초 뒤.

“푸하하하!”

수빈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고, 예준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런 걸 왜 언급해야 하냐는 듯한 얼굴이다.

“아니, 그렇잖아.”

실컷 웃던 그녀가 손바닥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쿡 찍어내며 말했다.

“다큰 성인 남녀 둘이 동거를 하는데, 어떻게 스킨십에 대한조항이 일절 없냐고. 진짜 너무 웃기지 않냐?”

“전혀 안 웃긴데?”

아무리 원수 같고, 아무리 계약으로 묶인 사이라지만 그래도 혈기왕성한 남녀가 한집에 1 년이나 붙어살아야 한다는데, 스킨십에 관한 그 어떤 조항도 없다니.

신선함을 넘어 충격적인 반전 아닌가

그만큼 서로를 이성은커녕,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 실컷 배를 잡고 웃던 수빈이 별안간 웃음을 뚝 멈추었다.

“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게 그냥 막 웃을 일만은 아니네?”

뒤늦게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씁쓸함이 해일처럼 밀려와 입 안이 썼다.

철두철미한 지예준이 모르고 이런 조항을 빠트렸을 리도 없는데.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이건 자칫 본능과도 귀결되는 문제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아무리 쇼윈도라지만 엄연히 부부인데.

“남들 앞에서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잖아.”

“그럴 리 없어.”

“왜 그렇게 장담해?”

“남들 앞에서 그런 걸 왜 보여줘? 나는 우리 부모님은 물론 내 주변 사람들이 남들 앞에서 물고 빨고 비비적거리는 꼴은 본 적이 없는데.”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보려는 사람이나 보여주려는 사람이나 실례고 민폐 아니야?

예준은 그런 게 계약서에 왜 필요한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호언장담했다.

그 얘길 가만히 듣던 수빈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더니 기어이 자기 합리화에 이르렀다.

“하긴. 우리 사이에 무슨. 술이 떡이 도H서 한 침대에서 눈을 떠도 멀쩡했는데.”

잠깐. 이건 더 자존심 상하는데?

그녀의 표정이 바쁘게 바뀌어댔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예준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잘 논다.”

그의 타박에 입술을 비죽이던 수빈이 다시 볼펜 뚜껑을 따 입에 물었다.

이 렇게라도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마음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적어놔야겠……

“적긴 뭘 적어. 끝났어.”

종이에 막 펜을 들이대려던 순간이었는데. 한 발 빨리 다가온 예준의 손이 종이를

낚아채갔다.

“어어? 야! 남녀 사이 일은 모르는……

“하!”

그의 지나치게 큰 실소가 수빈의 말을 가로 막았다.

예준은 곧바로 입가에 걸친 미소를 흔적도 없이 지워내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꿈 깨.”

“어딜 감히.”

그러고는 흡사 궐 밖으로 나선 임금이 바닥에 납죽 엎드린 거지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라 수빈도 지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누구는 눈이 발바닥에 달린 줄 알아? 너 나 건드리기만 해봐!”

“미쳤냐?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널 건드리게?”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서로의 머리채를 휘어잡을 듯 사납게 이를 드러 냈다.

“아오!”

수빈은 분해서 발을 쿵쿵 굴렀다.

예준은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서는 밀린 일 처리를 하듯 그녀에게 집 구조를 알려주었다.

“너는 왼쪽 끝 방. 내 방은 오른쪽 끝 방. 아주 혹시라도 양가 어른들 오시면 침실은 내 방인 걸로 하고, 욕실은 너 혼자 쓰면 도H. 나는 방에 딸린 욕실 쓸 거 니까.”

대충대충 오가는 그의 손끝을 따라 수빈의 시선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집안일은 일주일에 두 번 아주머니가 오셔서 해주시겠지 만, 웬만하면 개인 빨래나 먹은 설거지 정도는 알아서 하는 걸로. 지저분한 거 쌓여있는 거 질색이 니까.”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알아서 할 거거든?” 수빈이 쏘아붙였다.

“또 하나. 각자 방은 절대 침범하지 않는 걸로. 술 먹고 방을 잘못 찾았다, 그딴 개수작 안 통하니까 숙지하고.”

“허! 너나 조심해, 그런 건!”

지지 않고 말끝마다 받아치는 수빈의 타박에 예준이 썩소를 지 었다.

“나는 누구처 럼 개 될 때까지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라.”

“아이고! 쇤네가 몰라뵀습니다요. 선비 나리!”

잊을 만하면 나오는 수빈의 노예 버전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예준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살을 한 번 찌푸리고는 그대로 인사도 없이 제 방으로 사라져버렸다.

수빈도 그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노려보고는 제 방으로 발길을 돌려버 렸다.

저놈을 어떻게 말려 죽일까, 하던 고민도 잠시.

방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공들여 꾸민 듯 근사했다.

“오I아,,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와버렸지 만, 예준이 없어 다행이었다.

나름 수빈의 로망이었던 욕실과 파우더 룸도 잘 구비되어 있었다.

“오오! 욕조다! 욕조도 있다!”

우윳빛의 욕조를 본 수빈이 물개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이 런 곳을 혼자 쓸 수 있다니 . 완전 횡재다! 내일 엄마한테 가서 자랑해야지

수빈은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이불과 베개의 감촉은 앓는 소리가 저절로 터질 만큼 훌륭했다.

불을 끄고 누우니 문득 예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그래

예준의 말대로라면 오늘부터 1일인 거다.

달콤함이 라고는 하나도 없는 껍데기뿐인 신혼이지만, 이왕 시작한 거 떠날 땐 후회 없이 떠나자는 다짐을 하며.

신혼의 첫날밤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 * *

다음 날, 예준은 수빈과 함께 약속한 대로 처가를 찾았다.

“엄마, 아빠. 저희 왔어요.”

아니나 다를까.

정남은 상다리가 부러져라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사위와 딸을 맞이했다.

“아이고! 우리 지 서방! 어서 오게!”

푸근한 얼굴로 웃던 그녀가 예준을 거리낌 없이 품에 안고는 그의 너른 등을 다정히

쓸어내려주었다.

정남의 격한 환대에 예준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엄마, 나는 안보여?”

투정 어린 수빈의 말에 정남은 질 세라 얼른 딸아이를 덥석 끌어안고 뺨을 맞대었다.

“내 새끼가 안 보이긴 왜 안보여.”

뒤늦게 모습을 나타낸 방훈도 며칠 만에 보는 딸에게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예준이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관망했고, 정 남은 두 사람을 곧 집 안으로 안내했다.

“어머님, 피곤하실 텐데 뭘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

예준의 말에 정남은 손사래를 쳐댔다.

“아유! 하나도 안 힘들어! 우리 사위랑 딸 먹일 건데, 그저 기쁘기만 하지 !”

시댁에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예준이 밥을 뜨기가 무섭게 정남은 생선살을 발라 그의 수저 위에 얹어주고, 잡채며 고기 같은 것들을 자꾸만 그의 앞자리에 밀어놓기 바빴다.

이런 식사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예준이었지만, 확실히 처음 왔을 때보다는 적응을 한 듯 보였다.

그는 정 남이 주는 음식을 곧잘 받아먹는 걸로도 모자라 밥 두 공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어머님 음식 솜씨 때문에 처가만 오면 매번 과식해서 큰일이에요.”

“그래? 다행이다. 우리 사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알았지? 내가 다 해줄게.”

예준이 건넨 말에 정남의 얼굴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우리 장 씨가 한 손맛 하지? 그래서 내가 살빼기가 쉽지가 않아.”

방훈도 뿌듯했던 듯 남산만 한 자신의 배를 퉁퉁 두드리며 거들었다.

수빈은 국을 떠먹으며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살가운 말이라고는 영 거리가 먼 그가 좋은 사위 노릇 좀 해보겠다고 용쓰는 걸 보는 게 퍽 볼만했기 때문이다.

……역시 쟤는 연기를 했어야 해.

식사를 마친 후, 예준은 정남이 들려던 상을 대신 들어주었다.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어머님. 무거운 건, 들지 마세요.”

“아니야, 아니야. 내가 할게.”

정남의 말에 수빈이 거들었다.

“엄마. 그냥 얘가 하게 내버려둬. 과일은

어디 있어? 내가 깎을게.”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정남이 눈을 세모꼴로 뜨며 꼬집었다.

“너는 신랑한테 얘가 뭐니, 얘가. 결혼했으니 호칭도 바꿔야지, 시댁 가서도 그럴래?”

정남의 일침에 내내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하던 방훈도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눈도 잘 안 마주치고 말이야. 신혼여행 가서 무슨 일 있었니?”

“아, 아니! 일은 무슨 일!”

아차, 싶었다.

아직까지는 그저 친정이 내 집 같고 편하니 평소의 행실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과하게 반응하는 수빈을 빤히 쳐다보던 정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친구였어도, 신혼이면 한참 좋을 땐데. 왜 이렇게 어색해, 둘이? 진짜 싸우기라도 했어?”

그녀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의도치 않게 정곡을 찔려버린 예준과 수빈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아니라니까? 从匕 싸우긴 뭘 싸워. 우리가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그, 그치 여, 여……

차마 여보 소리는 입에 붙지를 않아 당황한 수빈이 버벅댔다.

예준도 당황스럽기는 했는지 대답 대신 바닥에 놓여있던 상을 들더니 재빨리 부엌으로 사라져버렸다.

“얘네 진짜 좀 수상하네.”

정 남이 툭툭 던지는 혼잣말에도 수빈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과일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른 채 급히 선물만 전달하고는 내일부터 시작될 출근을 핑계로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아.”

시댁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이유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수빈이었다.

“우리가 벌인 일에 비해서, 너무 안일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수빈이 하는 말에 예준도 동의했는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묻는 말에 대답 못해서 여러 번 애 먹었었어.”

“뭘 물어보셨는데.”

“그냥 뭐. 엄마가 딸한테 물어볼 수 있는 아주기본적인 거.”

“우리가 평범한 부부였다면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그런 질문들.”

결혼 전날도 정 남은 수빈과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봤었다.

예준과는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또는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 그리고 우리 사위는 너의 어떤 점이 좋아 결혼까지 결심한 건지 하는 지극히 평범한 궁금증들.

엄마와 딸 사이에서 오갈 화젯거리로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예준과 연애다운 연애는 해본 적이 없던 지라 들려줄 수 있는 얘기가 많이 없었다. 그저 웃음으로 때웠던 게 반 이상이었다.

행복하냐는 정 남의 질문에도 수빈은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 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제 와서야 하는 얘긴데 너 그놈의 독신이다 뭐다 했을 때 얼마나 마음 아팠나 몰라. 그래도 엄마 말이 맞지? 이렇게 좋은 신랑도 만나고.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 말에 수빈은 방방 뛰어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엄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지 ! 죽긴 왜 죽어 !’

내가 누구 때문에 한 결혼인데.

'누가 지금 죽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리 손자 태어나는 건 보고 죽을 거니까 걱정 말아라.’

수빈은 또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잘 살아야 도H. 우리 딸.,

그녀의 마지막 말에.

,잘 살게. 걱정 마.,

간신히 했던 답은 지극히 현실적인 결심을 담고 있었을 뿐이 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 특단의 조치를 취하자!”

집으로 돌아온 수빈은 예준을 앉혀놓고 전투적인 자세로 외쳤다.

“무슨 특단의 조치.”

“이렇게 가다가는 눈치 빠른 우리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할머 님이랑 할아버 님도 금세 눈치채실 지도 몰라.”

수빈은 덧붙여 말했다.

“이 결혼의 목적이 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어 .”

궁극적인 목표는 물론 예준의 독립과 수빈의 자유를 위한 일이었지만, 두 사람이 누굴 위해 이런 간큰 일을 벌인 건지 잊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수빈은 그녀의 부모님을 우I해. 그리고 예준은 대놓고 티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의 결단을 좌지우지한 데 있어 애자도 큰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

내키지는 않는 것과는 별개로 그도 어쩔 수 없었는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되물었다.

그에 수빈이 눈을 빛내며 테이블을 탕, 하고 내리쳤다.

“남들 눈에 우리가 진짜 부부처럼 보일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해.”

“그러니까 그 훈련이 뭐냐고.”

“일명'여자당' 훈련이라는 건데.”

“여자당……T

“하루에 세 번씩은 해야 돼.”

손가락 세 개를 허공에 펼쳐 보인 수빈이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여보, 자기, 당신이라는 호칭이 입에 자연스럽게 붙도록 연습을 하자는 거지. 언제 어디서든 필요할 때 거침없이 나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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