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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8화 (28/63)
  • 28 화

    한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匚匕 장장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고 돌아오니, 두 사람 모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 예준은 곧장 본가부터 가자고 제안했다.

    “내일 가면 안 돼? 나 너무 피곤한데.” 수빈의 앓는 소리에도 그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핸들을 돌리 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가야지.”

    그의 이상한 대꾸에 수빈의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 찌푸려졌다.

    피곤해 죽겠다는데도 굳이 가야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완전 과로사 시키겠다는 거 아니냐고.

    그녀가 가자미눈을 뜬 채 예준의 옆통수를 째려보았다.

    “피곤한 거 아니까, 오래 안 붙들 거 아니야. 저녁 같은 거 안 먹어도 되고.”

    “뭐?’,

    자꾸만 알 수 없는 말만 해대는 그의 의중이 모호했다.

    예준은 다시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우리 집은 오늘 가서 대충 인사만 하고, 내일 여유 있을 때 너희 집 가는 걸로 하자고.”

    건조한 말투였지 만 어쨌든 그의 본심을 오해한 것 같았다.

    수빈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배려해주는 거야?”

    “아니.”

    “그럼?”

    “나 편한 대로 하는 거야.”

    여전히 정면만 꼿꼿하게 바라보고 있는 예준의 옆모습을 수빈은 한참동안 응시했다.

    보통 며느리가 시가를 어려워하듯, 사위도 처가 어렵긴 마찬가지일 텐데.

    “넌 우리 집 안불편해?”

    “별로 ”

    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 집보단 편한 것같은데?”

    뉘앙스가 만만해서 편하다는 뜻도 아닌 것 같은데.

    수빈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분석하는 人卜이, 예준은 정남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저녁에 착아뵙겠다는 약속까지 잡아버렸다.

    진짜 이래도 될까 싶었다.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수빈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던 지라 딱히 더 말을 보태진 않았다.

    그렇게 시댁에 도착했을 때, 수빈은 예준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금세 이해하게 되었다.

    “이거는 어머님, 아버님 선물이고요. 이쪽은 도련님이랑 아가씨 거예요.”

    공들여 골라온 선물에 신이 난 건 시어머니인 소정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놓고 전화까지 해서 받아낸 명품가방이 니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것이다.

    아들 내외를 기다린 건지, 가방을 기다린 건지.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어쩐지 쓴웃음이 나왔다.

    “맘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수빈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말 한마디 보태는 게 다였다.

    훈탁은 기계마냥 딱딱한 '고맙다는 한마디가 전부였고, 선물은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예훈도 훈탁과 별 다를 것 없는 반응이었고.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방치된 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버렸다.

    하지만 진짜 가관이었던 건 상견례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막내 시누 예나의 반응이었다.

    “뭐야, 이 촌스런 디자인은?”

    포장지를 쫙쫙 찢어발긴 그녀가 조그만 오렌지 컬러의 핸드백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볼멘소리를 하더 니 이내 그것을 툭 하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언니. 이거 고등학생이 들고 다니기엔 너무 올드하지 않아요? 취향을 가늠하기 어려우면 차라리 돈으로 주는 것도 나브브지 않아요.”

    “……네?”

    그녀의 반응에 수빈은 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오냐오냐 키운 고명딸이라지만,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 저따위로 발언을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더 황당한 건 부모인 훈탁과 소정의 반응이었다.

    딸이 며느리 앞에서 싸가지에 물을 말아먹든, 밥을 말아먹든 자기네와는 상관없다는 듯 소정은 그저 제 가방을 둘러보기 바빴고, 그나마 훈탁이 짐짓 엄하게 지예나!,하고 부르며 눈치를 줬지만 예나는 되레 '내가 뭐 틀린 말 했냐.’며 받아쳤다.

    허……:

    뭐 이런 정신 나간 계집애가 다 있지?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턱 막혀버린 그때.

    싸늘해진 분위기 사이로 예준의 낮은 음성이 던져졌다.

    “그거 내가 고른 건데?”

    더욱 놀라운 건 예나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툭 내뱉은 예준의 말 한마디에 180도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아, 진짜? 오빠가 고른 거였어? 진작 말을 하지.”

    그녀가 패대기쳤던 핸드백을 다시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디자인이 고급스럽더라니.”

    기가 막혔다.

    올드하다며? 돈으로 달라며??

    물론 예나의 핸드백은 수빈이 직접 고심해서 고른 거였匚卜. 황당하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도 예나는 아랑곳 않고 가방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더니 곧 가방을 품에 꼭 껴안은 채 방으로 휑하니 사라져버 렸다.

    초장부터 기 싸움 제대로 걸어오는 풋내 나는 시누이의 도발에 수빈은 머리가 어질해졌다.

    “막내라 애지중지 키웠더니, 좀제멋대로 구나. 어른인 네가 이해해라. 아직 철이 없어

    그러니.”

    이어진 훈탁의 말에 폭발하려던 이성이 간신히 제 자리를 잡아 돌아갔다.

    인내심을 발휘한 수빈이 애써 웃었다.

    “하하. 걱정 마세요, 아버님.”

    ……제가 이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무슨 수가 있어도 아가씨 싹퉁 바가지는 고쳐놓고 나갈게요.

    곱게 휜 눈꼬리와는 달리 수빈의 눈에서는 불길이 일었다.

    시계를 쳐다본 예준이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럼 쉬세요.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의 인사에 소정과 훈탁이 일어섰다.

    그러고는 현관으로 향하는 아들 내외에게 로봇보다 딱딱하고 차가운 인사를 건넸다.

    “멀리안나간다.”

    “조심히 가렴.”

    심지어 소정의 시선은 여전히 제 품에 안긴 명품 가방에만 꽂혀있었다.

    수빈이 고개를 돌려 예준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도 별 동요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아주 오랫동안 몸에 익은 것처럼.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얼굴인데, 왜 지켜보는 자신이 마음이 불편한 걸까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훈탁과 소정에게 꾸벅 인사를 한 수빈은 그대로 예준과 함께 현관을 빠져 나왔다.

    차에 올라탄 수빈의 시선이 룸미러로 향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압적이었던 시가의 저택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턱 막혀있던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봐서 알겠지만 우리 집 식구들 그렇게 살가운 사람들 아니야.”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예준이 감흥 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특히 너 같은 애들은 더 감당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지.”

    “나 같은 애들이 어떤 애들인데?”

    수빈이 되물은 말에 예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양지에서 사랑 받고 자란 애들.”

    양지에서, 사랑 받고 자란 애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 묘하게 가슴 한쪽을 뻐근하게 찔러왔다.

    말이 없는 수빈을 대신해 예준은 제 가족들의 실체를 하나하나 아주 적 나라하게 까발려주었다.

    유일하게 이 결혼의 비밀을 알고 있는 훈탁은 그냥 계춘의 꼭두각시 노릇이 나 하고 있을 테니, 너한테 어떤 기대도 없을 거라고.

    그래서 오히려 상대하기 편할 거라나, 뭐라나.

    듣고 보니 그도 그랬다.

    유일하게 결혼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가 저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건 예준의 말마따나 그만큼 아무런 기대도 없다는 뜻일 테니까. 어쩌면 훈탁에게 자신은 그 집에서 일하는 수많은 고용인들과 별다를 게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함에 작게 탄식하는 수빈에게 예준이 이어서 말했다.

    “어머니도 별반다를건 없어.”

    제게 갖는 기대나 애정이 수집해놓은 명품만도 못할 테니,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에 일일이 의미 부여하지 말란다.

    그리고 동생 중 오빠인 예훈은 은둔형 외톨이에 덕후라 사실상 말 한마디 섞기 힘들겠지만, 그나마 우리 집에서 정상은 얘 하나 일 거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뒤따랐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문제의

    시누차례였다.

    예나는 아까 봐서 충분히 알 거야. 참고로 걔가 심통 부리지 않는 상대도 유일하게 나 하나고.”

    역시나 본 대로지만, 기대도 안 해서 별로 충격도 아니었다.

    수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큰 오빠 무서운 줄은 아나 보지 ?”

    “큰 오빠 잘생긴 걸아는 거지.”

    “외모되게 따지는 애거든.”

    ……그냥 너 성질머리 더러운 걸 빨리 깨달은게 아닐까?

    철면피 같은 그의 대꾸에 수빈이 조용히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그렇게 예준은 시누와의 관계는 알아서 잘 해결해보라는 말과 함께, 정 기어오른다

    싶으면 조용히 손봐주는 것 정도는 모른 체해주겠다는 말도 함께 넘겨주었다.

    만만치 않은 시댁 식구들 캐릭터에 수빈은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예준은 아랑곳 않고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집에 가면 바로 각서 쓸 테니까, 가는 동안 생각해놔.”

    이건 또 뭔 소린가.

    피곤해 죽겠는데 아닌 밤중에 무슨 각서?

    “계약서 말하는 거야? 그거라면 결혼 전에 이미 썼잖아.”

    그녀의 말처럼 빚과 관련한 부분은 이미 결혼 전에 문서화해서 공증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예준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계약서 말고, 각서. 말 그대로 법적 효력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한집 살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은 미리 긋자는 거야.”

    ……참 따지는 거 많다.

    “꼭 오늘 써야하는거야?”

    불만이 가득한 수빈의 물음에 예준이 짧게 일갈했다.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누가 사업가 아들 아니랄까 봐 비즈니스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한

    예준이었다.

    그는 말한 대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식탁에 수빈을 마주 앉히고는 종이와 펜부터 들이밀었다.

    계약 기간 동안 이것만은 지켜줬으면 좋것[다, 싶은 거 있으면 적어.대충 알아볼 수만 있게 적어도 도H. 어차피 내가 다시 문서화해올 테니까.”

    그의 말에 수빈은 한숨을 푸욱 쉬며 펜을 집어 들었다.

    사실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적극적으로 피했던 것에 비해 막상 시작하고 나니 요구

    사항이랄 게 딱히 없었다.

    - 좋은 사위가 되어줄 것.

    -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의 사생활은 존중해줄 것.

    수빈이 적은 내용은 그게 다였다.

    그리고 의외로 까다로울 거라고 생각했던 예준의 조건 역시 단순 명료했다.

    - 서로의 공적인 영역에 피해를 끼치지 말 것.

    - 사생활 존중.

    - 본 결혼이 위장 결혼임을 가족 포함 제3자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

    그마저도 이미 공증을 받은 계약서에 비슷하게 언급되었던 내용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비밀유지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들이었다.

    “……이게 다야?”

    의심어린 눈초리로 쏘아보는 수빈에게

    예준이 덤덤히 대꾸했다.

    “어. 우리 집에 좋은 며느리는 필요 없거든.”

    “하지만굳이 하나 덧붙이자면, 할머 니한테는 지금까지 해온 정도로만 노력해주면 고맙겠어 .”

    정말로 그게 다였다.

    수빈은 뭔가 찝찝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네 손으로 적어놓고 뭐가 불만인데?”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좀 웃겨서.”

    “뭐가’‘

    예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은 말에 수빈이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어쩐지 이 단어를 꺼내는 것만으로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위기도 완전 이상해지겠지?

    하지만 예준이 각서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그녀가 예상했던 건 따로 있었다.

    사실 그녀 입장에서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던지라, 수빈은 망설임 끝에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은?”

    “뭐?’,

    잘 들리지 않았는지, 예준이 한쪽 눈가를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그에 수빈이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말아 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십.”

    “안 들려.크게 좀 얘기해.”

    재차 돌아온 예준의 말에 수빈이 에라, 모르것!다,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우, 스킨십 ! 스킨십 !”

    “터치에 관한 규정은 어디까지 정해놔야 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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