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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7화 (27/63)
  • 2 7화

    하나우마베이는 환경 보존에 대한 규정이 매우 엄격했기 때문어L 해변에 입장하기 앞서 간단한 주의 사항을 숙지해야했다.

    줄 지어 선 관광객들이 비디오 관람을 마친 두|, 차례로 나와 해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역시나 혼자 온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물론 그녀 역시 혼자가 아니었고.

    수빈은 몇 걸음 앞장서서 걷는 예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같이 가! 이 웬수야!”

    원래 타지에 오면 없던 애국심도 솟는다고 누군가가 그랬다.

    하지만 솟아나는 건 애국심 뿐만은 아닌 듯했다.

    얄미운 아군도 아군이라는 듯.

    적군일 때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동지애가 솟아나며, 새삼 그의 존재가 싫지 않았다.

    “꺄아! 바다다!”

    “바다처음 봐?”

    “하와이 바다는 처음 본다. 왜!”

    입만 열면 타박부터 건네는 예준이었지만, 수빈은 오늘 같은 기분이라면 얼마든지 그의 까칠함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촌년이라고놀리면「그래! 나

    촌년이다!’라고 외치며 웃을 수 있을 만큼.

    여유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나 너그럽게 만든다.

    수빈은 대여한 오리 발과 스노쿨링 장비를 장착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닷물에 첨벙 뛰어들었다가…….

    바닷물만 엄청 마시고 토하길 반복했다.

    개헤엄이라면 자신 있었는데, 파도도 별로 높지 않은 바다 수영 뭐 별거 있나 싶어 막무가내로 뛰어든 게 문제였다.

    결국 수빈은 10분 만에 기진맥진해서 모래사장에 대(大)자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국립공원이라고 물 샤워만 가능한 건 물론, 선크림도 못 바르게 하던데.

    이러다 살 홀랑 타버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뻗어버린 수빈은 작열하는 태양을 고스란히 쬐고 있는데, 얼굴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을 떠보니 예준이 팔짱을 끼고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멍청이,,

    “뭐?’,

    이게 왜 다짜고짜 시비인가 싶어서 한판 뜨려는데.

    “도저히 못 봐주겠다, 진짜.”

    “어어……!”

    예준이 수빈의 손목을 휘감아 번쩍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빠가 한 수 가르쳐줄 테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오리발을 어깨에 맨 그가 수경을 목에 걸친 채 손짓했다.

    “허!”

    웃겨, 진짜

    지가 헤엄 좀 치면 얼마나 친다고 온갖 똥폼이란 똥폼은 다 잡으면서 면전에서 면박을…….

    “어디 얼마나 잘 하나 두고 보자.”

    수빈은 이를 벅 벅 갈며 쫄랑쫄랑 예준의 뒤를 쫓았다.

    물에 반 정도 들어간 예준이 수빈의 수경과 호스를 다시 매만지며 말했다.

    “장비부터 똑바로 차야지, 이렇게 차니까 물이 다 들어오는 거 아냐, 이 똘추야.”

    “야! ”

    멍청이도 모자라 이번엔 똘추란다. 짜증이 확 나서 소리를 질렀더니 예준이 이때다 싶어 마우스피스를 그대로 벌어진 입에 쑤셔 넣었다.

    “물어. 입술에 힘 빡 주고.”

    입 막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수빈은 못이긴 척 그를 노려보며 피스를 세게 물었다.

    “꽉 물어야지.”

    “왁 우어어 꽈 물었어)”

    “입으로 들이마시고, 다시 입으로 뱉어.

    이렇게.”

    예준이 입으로 숨 쉬는 시범을 보이자 수빈이 우물쭈물 그 모습을 따라했다.

    “콧구멍은 왜 늘려 ! 이러면 물이 코로 들어간다니까?”

    성질 사나운 그의 미간이 또 다시 좁아졌다.

    “입으로만 숨 쉬라고. 입으로만.”

    피스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던 그가 수빈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자. 물속으로 들어가서 해봐.”

    물속으로 머리를 담근 수빈은 예준이 가르쳐준 호흡법을 열심히 연습했다. 처음엔 마음처럼 잘 되질 않아, 이제껏 마신 물의 양만큼이 나 욕을 먹었다.

    “아이, 진짜! 이 꼴통아!”

    “물속에 들어가면 긴장돼서 잘 안 된단 말이야!”

    “긴장은 물고기가 해야지, 네가 왜 해! 몸통 크기를 보H 누가 무섭겠냐?!”

    “그 말이 아니잖……!"

    “다시 해봐.”

    예준이 인정사정없이 피스를 물리고 스파르타 수업을 이어갔다.

    다 때려치우고, 머리채부터 잡아버릴까 고민하던 수빈이었지만,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물에서 자유롭게 호흡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오오 된다! 지예준! 이거 봐봐!”

    흥분한 수빈이 벌떡 일어섰지만, 예준은 칭찬 한마디 없이 다시 그녀를 물에 담그고 오리 발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몸에 힘 빼고, 자꾸 종아리를 올려 차려고 하지 말고 허벅지로 부드럽게 헤엄치라고.”

    “이, 이렇게?”

    “옳지. 이건 좀 하네.”

    그게 예준이 건넨 유일한 칭찬 한마디였다. 신이 난 수빈이 열심히 헤엄을 치며 본격적으로 스노쿨링을 하기 시작했다.

    오 H

    호흡이 자유로워지니, 보지 못했던 물속 풍경이 눈에 고스란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니모다! 니모!

    형형색색의 물고기들고匕 투명한 바닷속, 새하얀 산호초들이 그녀를 반겼다.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구명조끼 때문에 잠수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 다고 벗어던지자니 더럭 겁이 나, 결국 깊이 들어가는 건 포기해야 했다.

    반면 예준은 수경 하나만 낀 채 자유롭게 물속을 드나들었다.

    물 만난 물개가 따로 없었다.

    수면에 비친 햇살이 그의 완벽한 몸매를 더욱 입체감 있게 비추었고, 수빈은 어느덧 물고기가 아닌 예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도 없는 물고기 몇 마리가 그의 주위를 배회하며 동지라도 만난 듯 헤엄을 치고 있었고, 그가 손을 뻗자 노란 물고기 하나가 예준의 기다란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멀어졌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수빈은 방수팩에 넣어둔 휴대폰 카메라를 켜 조심스럽게 예준의 모습을 담았다.

    한국 가면 엄마 보여줘야지.

    엄마, 엄마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잘난 사위 좀 보卜 완전 돌고래가 따로 없지? 전생에 인어 였나 봐.

    원한다면 인화해서 액자에 넣어줘야겠다.

    가족이니까, 5만원만 받아야지.

    그렇게 실컷 물놀이를 하고 나오니, 허기가 졌다.

    “배고프다. 컵라면 먹고 싶어.”

    “컵라면은 무슨. 새우트럭이나 가자.”

    “새우트럭?”

    수빈이 눈을 빛내자, 예준이 차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삐삑.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 니 잘 빠진 오픈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렌트 해왔어?”

    “어.,,

    “대박.”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태워주나?”

    “싫으면 셔틀 타고 따라오던가.”

    “아이고, 싫을 리가요. 쇤네는 그저 오픈카는 처음이라.”

    손바닥을 비비며 어깨춤을 추던 수빈이 가이드에게 달려가 사정을 얘기를 한 뒤 냉큼 예준이 렌트해온 차에 올라탔다.

    “뚜껑 없는 차! 나 이거 너무 타보고 싶었어!" 그녀가 신나서 손을 흔들어대는 사이,

    예준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 켰다.

    배고팠던 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급격히 말수가 줄더니 나 지금 예민하니까, 말 걸지 말라.,라는 아우라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하나우마베이를 떠나 해안도로를 쭉 내달리기 시작했다.

    수빈은 피부로 느껴지는 속도감에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꺄아! 기분 최고야!”

    그녀가 두 손을 하늘 위로 뻗고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가슴이 벅찼다.

    예준은 수빈이 마음껏 소리를 지르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아니, 사실은 배가 너무 고파서 뜯어 말릴 힘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달려 새우트럭을 만날 수 있었다.

    도시 락에 담긴 칠리 새우를 가져온 예준이 수빈에게 하나 내밀었다.

    “대박.”

    오동통한 새우을 입에 밀어 넣은 그녀가 눈을 크게 뜨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우리 매장 칠리 새우도 한 맛있음 하는데, 이건 진짜 맛있어. 배가 너무 고팠나?”

    그 말을 끝으로 수빈은 숨도 쉬지 않고 새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맛있어, 라는 말을 50번 정도는 내뱉어가며 .

    “가자, 이제. 피곤해.”

    예준이 차에 시동을 걸며 말했고, 수빈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있긴 뭐가 있어, 없어. 안 가. 싫어.”

    귀신같은 놈.

    눈치 빠른 녀석이 자신이 할 말을 예리하게 알아채고는 말을 잘랐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빈이 아니었다.

    “근처에 파인애플 농장 있대.”

    “근데.”

    “나 거기 파인애플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애냐? 한국에서 먹어 맛, 다 거기서

    거기니까.”

    하! 얘가 뭘 모르네.

    “사람들이 흑돼지를 왜 제주도에서 먹는 줄 알아? 제주도에서 먹어야 맛있으니까 제주도에서 먹는 거야! 서울에서 파는 데가 없어서 못 먹는 줄 알아?”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 알았어? 내가 사줄게, 가자.”

    “안 가.”

    “가!”

    “안 간다고 했다?”

    “가자고!”

    “내 려.”

    “야! 너 진짜 치사하게……!”

    차주의 갑질에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별수 없었다.

    핸들 쥔 사람이 안 가겠다는데, 조수석에서 뭘 어쩌것[나. 게다가 여기서 버림받으면 진짜

    국제 미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입이 한 뼘이나 튀어나온 그녀는 예준을 실컷 노려보다가 팔짱을 낀 채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먹고 싶어…… 파인애플 아이스…… 크림.” 그녀가 눈도 뜨지 못한 채 옹알거 렸다.

    “으음. 맛있다……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꿈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꿈까지 꿨다.

    달콤하고 시원한 게 꼭 실제로 먹는 것처럼 실감나는 꿈이라고 느낄 때 쯤.

    “셋 셀 때까지 안 일어나면 버려버린다.”

    “응?,,

    다짜고짜 날아든 예준의 목소리에 수빈이 눈을 번쩍 떴다.

    “앗, 차가워 !”

    코끝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닿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예준이 그녀의 코 바로 앞에 아이스크림을 들이댄 채 금방이라도 그것을 던져버릴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수빈은 벌떡 일어나 아이스크림을 낚아챘匚卜.

    “헐 ! 파인애플 아이스크림 !”

    이게 꿈이냐, 생시냐.

    그녀는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대박……. 완전 맛있어.”

    “대박, 완전 맛있기는. 아이스크림이 다

    거기서 거기지.”

    예준이 꿍얼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잘 먹을게. 지예준.”

    수빈이 아이스크림을 할짝할짝 핥아먹으며 웃자, 그의 눈썹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여간. 츤츤거리기는. 히힛. 맛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식사에 디저트까지. 완벽한 맛집 투어를 마친 두I, 호텔로 향했다.

    남은 일정은 두 사람 각자 휴식에 집중했다.

    서핑도 좋고 투어도 좋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치열한 전쟁이 시작될 테니 체력을 비축해둘 필요가 있었다.

    하와이에서 예준과 함께 보낸 시간은 단 하루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단언컨대 하와이에서 가장 잎지 못할 추억은 아마 그와 함께 했던 일정일 것이다.

    붙잡을 수만 있다면 붙잡고 싶었던 아쉬운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버리고.

    어느덧 마지막 밤이 기울고 있었다.

    “아. 돌아가기 싫어.”

    늘어지는 발걸음을 애써 재촉하며 수빈은 가타부타 말도 없고 하와이에 미련도 없어 보이는 예준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랗게 펼쳐진 꿈의 하와이가 창문 너머로 점점 멀어져갔다.

    수빈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하와이.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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