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화
예준이 먹은 건 약간의 샐러드와 달걀, 그리고 바게트 빵 한 조각이 전부였다. 반면 수빈은 아침부터 가득 채운 접시 두 개를 깨끗이 비우고 디저트와 음료까지 꼭꼭 챙겨 먹는 중이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그의 시선이 수빈에게서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봐도,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저 조그만 몸속 어디로 저 음식이 다 들어가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저러다 체하는 거 아니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식사 속도가 빨랐다.
하와이에 도착해서 그녀가 입 밖으로 내뱉었던 '우와!’ 소리만 30번이 넘을 거다.
때문에 창밖에 펼쳐진 아침 풍경에 시선 한 번 정도는 줄 법한 그녀였건만, 그저 접시에 코를 박고 허겁지겁 먹느라 바빠 보인다.
배가 많이 고팠나?
아니. 배가 많이 고팠다기보다는 그저 빨리 먹고 자리를 뜨려는 것처럼 보였다.
급히 식사를 마친 수빈은 접시 위에 남아있던 케이크 한 조각을 마지막으로 입에 밀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몇 걸음 채 떼지도 못하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제 가슴을 텅텅 치며 물컵을 든다.
“저것 보卜. 저럴 줄 알았지.”
쯧쯧, 혀를 차고 있는데 고개를 돌리던 수빈과눈이 마주쳤다.
햄스터마냥 양 볼이 불룩한 그녀가 혀를 차던 자신을 한껏 노려보고는 다시 홱 하니
고개를 돌리고 멀어져갔다.
예준은 모르고 있었지 만, 수빈이 예준과 따로 밥을 먹었던 건 순전히 그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철저한 개인주의에 가까웠던 예준이 혼자 하는 식사가 훨씬 편했던데 비해, 수빈은 그러지 못했다.
혼자서 먹는 밥이 익숙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 호텔에 묵고 있는 대부분의 투숙객은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였다. 같이 와서 두 개의 룸 키를 받고, 따로 식사를 하는 부부도 아마 두 사람이 유일할 것이다.
주변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이곳에서 혼자 계속 밥을 먹는 일이 영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수빈이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예준이 그렇게 햄버거 가게를 나간 후, 덩그러니 남겨져있던 그녀도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일어서버렸다.
“먹은거 다 체하겠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수빈이 가슴을 툭툭 쓸어내리며 혼잣말했다.
아까도 분위기 봐서 슬쩍 합석 좀 하려고 했더 니만, 아니 나 다를까 저를 똥파리 취급하기에 선수 쳐서 일어섰던 것뿐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놈
첫 해외여행이자 유일한 신혼여행의 동반자가 예준이라는 사실이 못내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열심히 즐기다돌아가는 수밖에.
수빈은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곧장 바깥으로 나왔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셀카봉으로 열심히 사진도 찍고, 하와이의 풍경 곳곳을 부지런히 담아두었다.
“한국가면 보여줘야지.”
엄마도, 아빠도, 할머님, 할아버님도
시댁 식구들은 딱히 기대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수빈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길거리에 무수히 흩어져있는 전단지 하나를 집어 든 그녀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가 곧 종이 위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작은 여행사였다.
"H……Hello;
수빈이 문을 열며 조심스럽게 건넨 인사에 동양인 여직원 하나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곧 생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앗! 한국인이다!
“안녕하세요!”
처음 만나는 사람이지만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 중 가장 반가웠다.
화색을 띤 그녀가 상담원의 손짓에 따라 책상 앞에 앉았다. 화려한 무늬의 빨간색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있던 여직원의 가슴에 'Emma'라고 적혀있는 명찰이 보였다.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엠마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에 수빈이 가지고 온 전단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물었다.
“혹시 이 디 너 크루즈 상품, 당일 예약되나요?”
언젠가 해외에 나오게 되면 크루즈 상품을 꼭 한 번 이용해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때문에 전단지에 적혀있는 크루즈 상품을 발견하자마자 두말 않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잠시만요. 확인해볼게요.”
“네.”
엠마가 예약 장부와 PC화면을 몇 번 번갈아 보더니, 다시 수빈에게 물었다.
“두 분이시죠?”
그에 수빈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혼자예요.”
“아, 그러시구나.”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그녀는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크루즈 같은 경우는 거의 가족 동반이나 커플들이 많이 이용하시거든요. 그래서 여쭤본 건데, 혼자 여유롭게 즐겨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품이죠.”
“그런가요?”
“그럼요,,
주고받는 대화가 유하게 흘러갔다.
“마침 자리가 있네요 바로 접수해 드릴게요. 다른 건 괜찮으세요?”
“음, 추천해주실 만한 게 있으실까요?”
“혹시 스노쿨링 괜찮으시면 하나우마베이도 좋아요.”
“와! 좋아요!”
전부터 꼭 한 번 해보고 싶던 거라 수빈은 쌍수 들고 환영했다.
“그럼 저녁에 크루즈 다녀오시고, 하나우마베이는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걸로 잡아드릴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예약을 마친 수빈은 기분 좋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골목을 거닐다 한 렌탈숍 옆에 있는 작은 스테이크 가게에서 점심에 먹을 음식을 테이크 아웃한 뒤 숙소로 돌아갔다.
발코니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사람들은 생기가 넘쳤고,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식사를 마친 수빈은 짧은 낮잠 후 크루즈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호텔 근처에서 리무진을 탄 후 항구로 향했다. 함께 리무진을 탄 일행 중 커플이 아닌 사람은 수빈 혼자뿐이 었다.
도란도란 닭살을 떨어대는 커플들 사이에 껴 앉아있는 게 조금 민망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항구까지가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알로하.”
훌라 치마를 두르고 화관을 쓴 하와이 원주민들이 반갑게 그들을 맞아주었다.
“알로하.”
수빈은 두근거리는 부푼 마음을 안고 승선했다.
아주 오래전 적혀있던 일기장의 버킷리스트 하나가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걸 혼자 즐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시간을 물 흐르듯 빠르게 흘렀고, 배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어둑해진 뒤였다.
“아! 재밌었다.”
리무진에서 내린 수빈이 기지개를 쭉 켜며 호텔로 향했다.
“엄 마랑 아빠 같이 오면 완전 좋아할 것 같은데.”
크루즈 상품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웠고, 낭만적이었다.
그 모든 걸 혼자만 보고 경험한다는 게 아쉬울 만큼.
로비에 있는 편의점에서 간단한 마실 거리를 사고 있는데, 옆으로 긴 인영이 드리워졌다.
“잘 돌아다닌다, 혼자?”
고개를 돌려보니 예준이 냉장고에서 막 물병 하나를 꺼내들고 있었다.
아침에 봤는데도 어쩐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 든 건 착각일까?
“나, 크루즈 타고 왔다? 완전 쌍이었어.”
수빈은 저도 모르게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그를 반가워하고 말았다.
그뿐인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떠서 마구
떠들어댔다.
아니나 다를까.
예준의 표정은 역시나 탐탁지 않았다.
“혼자?”
“그럼 혼자 다녀오지, 누구랑 다녀오냐? 안 그래도 다른 커플들 사이에 끼어있느라
곤욕이었어.”
한껏 부풀었던 그녀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마냥 쪼그라들었다.
“청승맞게, 왜 그런 데를 혼자 가고 그래?” 예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하와이까지 와서 뭐 하냐? 내 발로 내가 여행 좀 다니겠다는데,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잔소리는.”
수빈이 투덜대며 그를 지나쳐 나갔다.
카운터에서 마실 거리를 계산하고 있는데, 예준이 물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물었다.
“내일도 혼자 돌아다니게?”
“그래. 혼자 돌아다닐 거다. 왜.”
“어디 가려고.”
“하나우마베이.”
아……, 이게 아닌데.
보나마나 면박이나 줄 텐데, 자꾸만 고분고분 대답이 나온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하고 확 쏴주는 건데.
예준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고 있을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나 간다.”
그래서 수빈은 예준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퉁명스런 인사만 던지고 곧장 걸음을 돌렸다.
룸으로 돌아온 그녀는 맥주 한 캔을 깔끔히 비운 뒤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티비를 켜봤지만, 맨 못 알아듣는 말 뿐이다.
다큐 방송을 자장가 삼아 수고한 몸에게 그만 휴식을 선사하기로 했다. 노곤해진 몸 때문인지 눈꺼풀이 절로 감겼다.
“아. 좋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꽃 같은 20대, 아등바등 살아내느라 바빴을 땐 꿈도 못 꿀 여유였다.
“딱 한 달만 살다갔으면 좋겠다.”
발코니 너머로 펼쳐진 푸르른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두 번째 밤이 그렇게 멀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수빈은 어제와 같은 곳에서 셔틀을 타고 하나우마베이로 향했다.
“와! 너무 예뻐 !”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속이 다 보일 만큼 투명하고 맑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원피스며 머리카락이 마구 휘 날렸다. 수빈은 한 손으로 치 맛자락을 꼭 붙든 채 포토존으로 열심히 걸어갔다.
사람들이 줄 서서 사진을 찍고 있던 곳이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수빈은 차례를 기 다리 다가 그녀보다 앞에 있던 커플의 사진을 먼저 찍어준 후, 자신의
카메라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미리 가벼운 인사를 건넨 그녀가 마구 뛰어가 절벽 끝에서 양손으로 손가락 하트를 그려 보이는 순간.
“어어。
불어오는 바람이 모자를 낚아채버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떠나 막 허공으로 날아갈 채비를 하던 모자가 다행히 누군가의 손에 턱 하고 잡혔다.
수빈의 시선이 모자 끝을 잡고 있는 길고 익숙한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서서히 움직였匚匕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녀가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물었다.
모자를 낚아챈 장본인은 다름 아닌
예준이었다.
어느새 나타난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 새까만 그의 머리칼이 사나운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휘 날렸다.
아무 말 없이 다가온 예준은 수빈의 머리에 모자를 툭 얹어 씌우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섰다.
“죄다 셀카면 뭐 어쩌자는 건데?”
“어?”
“한국 가서 어머님, 아버님이 보시면 뭐라고 하시 겠냐고.”
아예 안 찍을 거 아니면, 증거 정도는 제대로 남겨놔야 하는 거 아닌가?
예준이 작게 툴툴댔다.
“마누라가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데, 무슨 수로 좋은 사위가 돼?”
갑자기 나타난 그의 등장에 수빈의 카메라를 들고 있던 신혼부부는 사진을 찍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아.,,
뒤늦게 수빈이 상황을 수습하려는데, 고개를 돌린 예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편입니다.”
……남편.
그가 던진 이질적인 단어에 수빈이 잠시 멍하니 예준을 바라봤다가 다시 커플들을 향해 웃어보였다.
“맞아요, 남편.”
무뢰한같이 보이시겠지만, 이래 봬도 남편이랍니다. 하하.
“아아.”
망설이 던 신혼부부는 그제야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자, 그럼 찍습니다. 하나, 둘……
“잠시만.”
손을 든 예준이 잠깐 멈춰 달라고 양해를 구하더니 수빈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협조안할래?”
“뭐가?”
“증명사진 찍냐고, 지금.”
“이리 와.”
그에게 붙들린 어깨가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어?”
“웃어,,
예준이 작게 속삭임과 동시에 그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꺅!”
갑작스런 간지럼에 수빈이 어깨를 움츠리며 웃음을 터트렸고.
찰칵.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