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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3화 (23/63)
  • 2 3화

    그리고 다음 날.

    이번엔 수빈이 예준의 아버지인 훈탁을 만날 차례였다.

    흠잡을 것 없이 잘 해낸 예준에 비해 그녀는 긴장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건호를 만나던 시절,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호되게 당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준이 이유도 없이 자신을 선택한 건 아니겠지만, 조건이 비슷했던 것도 아닌 터라 괜히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긴장 풀어.”

    예준의 말에 애써 괜찮은척해 봤으나, 막상 으리으리한 저택을 마주하니 간이 더 쪼그라드는 느낌 이 었다.

    돈이 뭐라고 참, 사람을 이렇게 작아지게 만드는지.

    짧게 한숨을 쉰 수빈이 예준을 따라 집 안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신수빈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어서 와요.”

    기업인 특유의 포스 넘치는 분위기로 훈탁이 인사를 건넸다.

    혹시나 문 여사가 제게 그러했듯이 홀대라도 당하면 어쩌나 우려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음식은 훌륭했고, 훈탁은 결혼 생활하는 동안 잘 부탁한다는 짧고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는 말이 없었다.

    아무리 혈육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예준과 훈탁은 부자지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꼭 필요한 말 빼고는 대화조차 제대로 오가질 않았다.

    덕분에 그 맛있는 음식들이 어떻게 넘어갔는지도 모르게 식사가 끝나버렸다.

    정말이지.

    딱 밥만 먹고 일어난셈이었다.

    “이건 약소하지만, 어머니께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수빈은 보자기에 곱게 싸인 한과와 정 남이 직접 담근 담금주를 건넸고, 훈탁은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건네며 곁에 있던 사람에게 물건을 건 네주었다.

    딱히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하나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가시방석이었던 자리였다. 좀 산다는 사람들 집 분위기는 원래 다 이런 건가 싶었다.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확실히 복작복작한 자신의 집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본가에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그 속에 섞여있던 예준은 평소와 어 딘가 다르게 더욱 냉랭하고 건조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계속 살아왔겠지?

    훈탁과 예준 사이에서 느껴지던 그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지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수빈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숨이 막힌 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곧 예준의 조부모를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애자와 계춘이 구면이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빈은 아까보다 훨씬 마음이 가벼워진 걸 느꼈다.

    “어이구, 우리 손주 며느리 왔네!”

    그새 얼굴이 더 수척해진 애자가 반갑게 수빈을 맞아주었다. 결혼 얘기가 오가고 난 두I, 인사를 온다는 소식에 적잖이 기다렸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몸은좀 어떠세요?”

    “네 얼굴만 봐도 다 낫는 것 같구나.”

    쪼글쪼글한 가죽밖에 남지 않은 손에 연결된 링거 줄이 수빈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조금 더 서두를 걸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들만큼.

    계춘과 애자는 정남이 보낸 한과를 수빈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먹었다.

    치료를 받는 중이고 기력이 쇄한 탓에 하나를 온전히 다 넘기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들였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얼른 몸 추스르세요, 할머님.”

    인사를 건네는 수빈의 손을 애자와 계춘은 아쉬운 듯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그래야지. 암.”

    고개를 끄덕이며 수빈의 얼굴을 쓰다듬던 애자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 결혼해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딸 낳고 잘 사는 것까지는 보고 죽어야지. 애비, 애미가 선남선녀니 누굴 닮든 얼마나 예쁠꼬.”

    예상을 못했던 발언은 아니라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 만, 이루어줄 수 없는 소원이었던지라 수빈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또 올게요.”

    어려울 법도 했을 텐데.

    포옹까지 하며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수빈의 모습을 예준은 말없이 응시했다.

    예나 지금이나 환경은 참 많이 변했지만, 타고난 그녀의 천성은 좀처럼 영향을 받지 않는듯했다.

    그리고 그건 예준이 수빈을 오랜 시간 지켜봐오며 그녀를 적임자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했다.

    * ■* •*

    오지 않을 것 같던 대망의 상견례 날이 오고야 말았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해 걸음걸이가 어색한 방훈을 예준의 여동생인 예나가 잠시 빤히 쳐다보긴 했지만, 쌍둥이 오빠인 예훈이 그녀의 팔꿈치를 가볍게 툭 치며 눈치를 주자, 그녀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 다.”

    훈탁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그 옆엔 예준의 엄마이자 훈탁의 아내인 소정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어려보이는 동안에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사돈.”

    붉게 칠한 입꼬리를 사분히 말아 올린 그녀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고, 정남과 방훈도 화답했다.

    “저희야말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상투적인 인사를 시작으로 곧장 예약된 식사가 서비스되기 시작했다.

    예준의 식구들은 대체로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일부러 말을 아낀다는 느낌보다는 이 결혼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정남과 방훈도 말을 아껴야하는 입장인 건 마찬가지였다. 예준의 어릴 적 가정사와 빚에 얽힌 뒷이야기를 전해 듣고 온 터였기 때문이다. 분위기라도 유하면 예준의 칭찬이라도 건네보겠는데, 그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예단이나그 외 형식적인 건 생략해도 좋으니, 너무 부담 갖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훈탁이 조용히 꺼낸 얘기에 정남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 쪽에서도 약소하나마

    준비할 건 준비해드릴 테니 염려치 마세요.” 하지만 훈탁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두 사람이 좋아서 하는 결혼이 니,

    어른들까지 허례허식 차릴 필요 없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 니다. 약소하게 하고 싶다는 게 애들 뜻이기도 하고요.”

    공손했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묻어나는 말에 정남과 방훈도 더는 무리해서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신혼집은 예준이 혼자 살고 있던 집에서 바로 시작하면 될 거라고 했고, 때문에 따로 혼수를 채워 넣을 필요도 없었다.

    꼭 필요한 이야기가 오가고 나니,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었다.

    가끔 정 남과 소정 이 수빈과 예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방훈과 훈탁은 음식이

    입에 맞는지에 관해 묻고 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예준의 동생들인 쌍둥이 남매 중 오빠인 예훈은 말 한마디 없이 밥 먹느라 버H빠, 그의 목소리가 어떤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동생인 예나도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아보였다. 하지만 이따금씩 수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기류가 두 여자 사이를 맴돌기도 했다.

    여자의 촉이라는 게 있다. 그것으로 미루어보건데, 절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이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힐끗힐끗 저를 바라보는 예나에게 수빈은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식사를 마친 두I, 훈탁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걸로 상견례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곱게 키우신 따님일 텐데, 부족한 저희 아들놈 짝으로 보내주셔서 감사드립 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지요.

    소중한 인연 맺게 되어 영광입니다.”

    양가 대표 어른들의 훈훈한 덕 담을 끝으로 첫 만남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워 낙에 촉박하게 날을 잡은 터라 주말에 식을 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요즘에는 평일 저녁에도 하는 추세라고 하여, 여행사와 같은 계열사인 K호텔에서 금요일 저녁에 식을 올리게 되었다.

    정 남은 가게 문까지 닫아가며 수빈의 결혼 준비를 직접 도왔다.

    고심해서 폐백 음식을 준비하고, 바쁜 예준 대신 수빈과 드레스숍에도 함께 가주었다.

    예준이 시간을 내보겠다고 했지만, 정남은 딸의 결혼만큼은 제 손으로 직접 돕고 싶다고 했다.

    드레스숍에서 드레스를 입고, 커튼이 열리기 직전.

    수빈은 순백의 신부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애써 웃었다.

    그래. 웃자. 웃어야지.

    나만큼 기대하고 있을 엄마한테 우는 얼굴을 보일 순 없으니까.

    나는 이 커튼이 열리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는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 며 자세를 바로 잡고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커튼이 열리고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정남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울어?”

    “울긴 뭘 울어.”

    “우는 거 아니지? 벌써부터 그러지 마. 나 결혼 엎는 수가 있어.”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

    화들짝 놀란 정 남이 얼른 눈가를 훔치 며 타박을 건넸다.

    수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금 웃었다.

    어릴 적부터 이 순간을 참 많이 그려왔었다.

    커튼이 열리고, 순백의 신부가 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신랑이 조금은 억지스럽고 과장된 리액션을 보이며 다시 한 번 내게 반한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하지만 커튼이 열렸을 때, 수빈은 이 결혼이 무늬만 그럴듯한 가짜 결혼이라는 걸 다시 상기할 수 있었匚匕 그곳에 꿈에 그리던 신랑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괜찮다고, 스스로를 애써 위로했다.

    사랑하는 엄마가 있었으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 * *

    시간은 붙들 새도 없이 쏜살같이 흘렀匚匕 어느덧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아무리 위장 결혼이라지만, 긴장되고 정신이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의 하객만 불렀는데도 손끝을 덜덜 떨던 수빈에 비해 외려 초연한 건 예준이었다.

    떨리지 않냐, 는 물음에 누군지도 모르는 하객들이 대부분이라 별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수하지 말고 잘 해.”

    예준이 곧장 무뚝뚝한 한마디를 던졌고, 수빈도 만만치 않게 까칠한 대꾸를 돌려주었다.

    “너나잘해.”

    나눈 대화는 그게 다였다.

    그 마저도 보는 눈이 많아 웃는 얼굴로 복화술을 해야 했다.

    이 숨 막히는 연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떨지 말고, 쫄지 말고, 1 년만 죽었다고 생각하자.

    오늘이 오기까지 수빈이 잠자리에서 몇 번이나 되뇌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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