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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2화 (22/63)
  • 22 화

    문 여사의 음성엔 노기가 단단히 서려있었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내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나본데, 어림도 없는 소리!”

    너 사람 잘못 봤어 .

    덜덜 떨려오는 주먹을 꽉 쥐고, 터져 나올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잰 걸음을 걷던 그녀의 걸음이 자꾸만 삐끗거렸다.

    “네깟 년이 만나봤자, 그 나물에 그 밥이지. 뭐 얼마나 대단한 놈 만난다고 감히 우리 건호를!”

    모양 빠지게 뛸 수는 없어, 걸음을

    빨리하는데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막 문을 빠져나간 수빈을 본 문 여사가 후다닥 경보하듯 걸어가 출입구를 나섰다.

    “야.!”

    그리고 그 순간, 검은색 세단의 조수석으로 막 타려던 수빈을 보았다. 문 여사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차를 잘 모르는 그녀가 봐도 아주 고급스러운 외제차. 그리고 그보다 더 우아한 분위기의 남자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 며 수빈의 옆에 나란히 서있는 광경 .

    그녀의 외침에 예준과 수빈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고, 곧 문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수빈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한없이 휘둘리는 문 여사의 성정을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눈앞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너무 뻔했다.

    저런 여자가 시어머니로 버티고 있는 집구석에 기어들어갈 뻔했다니.

    순간이나마 예준과 위장 결혼을 하는 편이 백배 천배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다.”

    작게 혼잣말하던 수빈이 예준을 바라보았고, 그 역시 수빈을 바라보았다.

    현실적 행복을 위한 서로의 이해관계가 완벽히 들어 맞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일단타지 내가 좀 바쁜데.”

    멀 리서보면 사랑이 라도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예준이 수빈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말했다.

    수빈은 그가 직접 열어준 조수석에 천천히 올라탔고, 예준은 긴 다리로 우아하게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의 차가 로비를 돌아 호텔을 빠져나갔고, 문 여사는 충격적인 걸 대면한 사람마냥 넋을 놓고 차의 뒤꽁무니만 바라보았다.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

    예준은 문 여사와 어떤 말도 섞지 않았고, 그녀에게 수빈과의 관계를 억지스럽게 어필하기 위한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이 마주쳤고, 수빈을 태운 뒤 그녀의 앞을 유유히 지나 호텔을 빠져나왔을 뿐이다.

    때로는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더욱 빛을 발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예준이 문 여사에게 시선을 던진 시간.

    단 1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가 온몸으로 뿜어내던 독보적인 카리스마는 여러모로 문 여사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 * *

    예준의 차에 오른 수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냉수 싸대기라도 한 대 맞은 건가 싶어 살펴보니, 딱히 젖은 곳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창가를 바라보며 피식 피식 김빠진 웃음소리를 낸다.

    “工工 ”

    K.

    수빈을 살피는 예준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푸핫!”

    머 리를 얻어맞았나?

    목적지를 종전에 두고도 갈 길이 구만리라 부랴부랴 착아왔건 만

    “괜찮아?”

    이건 뭐, 인사가 문제가 아니라 병원에 먼저 데려가야 하는 건가 싶다.

    하지만 수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되물었다.

    “뭐가?’,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보였匚卜.

    “왜 자꾸 웃어? 어디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핀잔을 건네봤지만, 수빈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었다. 전에 없이 너그러운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너무통쾌해서.”

    뭐가 통쾌하다는 걸까.

    “네가 최남진 두드려 팼을 때 이런 기분이었나 싶어.”

    “갑자기 그얘기가 왜 나와.”

    난데없는 최남진의 등장에 예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나는 용서가 미덕이고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어도 아랫사람은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흡사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하고, 내 가족에게 함부로 발언을 한다고 해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게 그 사람과 똑같아지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왜 그렇게 미련하고 고집스럽게 굴었나 싶어서.”

    어른에게 똑같이 덤비라고 가르쳐준 사람은 정 남과 방훈 중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 태어나서 가장 못되게 어른을 대했던 행동이, 예의나 도덕 따위와는 별개로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문득 예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고등학교 때 나한테 했던 얘기 생각나?”

    “무슨 얘기.”

    예준이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수빈은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어주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용서가 미덕이다뭐 그딴 소리는 나중에 네 자식한테나 해. 난 죽을 때까지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면서 살 거니까.”

    수빈은 그 시절의 예준을 떠올리며 눈에 양껏 힘을 주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저를 흉내 내고 있는 모양새가 불쾌했는지 예준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나는 한 대 맞았다고 두 대는 못 때리겠지 만, 그렇 다고 얻어 맞기 만 하는 게 미덕이 아니라는 생각은 좀 들더라.”

    그녀의 넋두리 같은 고백에 예준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내 말 잘 들으면 원래 자다가도 떡이 나오는 법이야.”

    밑도 끝도 없는 근자감에 수빈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벌써 이러면 좀 웃기긴 한데.”

    뭔가 굉장한 고백이라도 하는 양 그녀가 속살댔다.

    “너랑 결혼하기로 한 거 썩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아.”

    피식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준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태세 전환하기가 아주 국가대표 급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집이 가까워질수록 수빈의 태도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사는 네가 오는데 왜 내가 떨리지?”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꼭 쥐는 그녀의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을 하겠다는 그녀의 폭탄선언 이후 방훈과 정남이 보였던 반응이 실로 굉장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듣는 사람들처럼 콧방귀도 안 뀌더니, 인사를 오겠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너 혹시 사고 쳤니?!’

    정남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등짝부터 후려갈겼었다.

    '아! 엄마! 그런 거 아니야!’

    억울했지만, 그런 반응을 예상 못했던 것도 아니긴 했다.

    결혼은커 녕 애인도 없던 딸이 통 크게 연애를 건너뛰고 결혼을 선포하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독신주의자 운운하던 게 바로 며칠 전 일이었으니 더욱 그럴 테다.

    그에 수빈은 사실 연애를 하고 있기는 했지 만, 그 사람과 결혼까지 할 거 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말을 안 했던 거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괜히 얘기했다가 결혼까지 밀어붙이기라도 할까 봐 부담스러웠다고.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정 남과 방훈도 할 말이 없었는지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예준이라는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갈 길이 구만리인 느낌.

    어쨌든 딸의 결혼이 현실이라는 걸 인지한 정남과 방훈이 방청객도 울고 갈 리액션을 선보이며 물개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지금 우리 딸이 진짜 결혼을 하겠다는 거지? 어? 진짜야?’

    '세상에.수빈이 아빠…….이거지금 꿈 아니죠? 내 볼 좀 한 번 꼬집어봐요.’

    그러더니 가구까지 들어내고 대청소를 시작하는 바람에 수빈은 쉬는 날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대청소에 동참해야했다.

    그것뿐인가.

    예비 사위 먹인다고 장을 보러간다는 정남의 시장길에 동참해 짐꾼 노릇까지 해야 했다.

    '엄마. 동네잔치라도 벌일 셈이야?’

    '귀한 손님 오시는데 이 정도 대접은 해야지. 사위 사랑은 장모랬어.’

    누군지도 모르면서 사위는 무슨 벌써부터 사위 냐고 묻고 싶었지 만 그러지 못했다.

    하루 종일 음식 준비를 하는 정남의 얼굴이 너무나 들떠 보였기 때문이다.

    방훈은 또 어떻고,

    말끔하게 이발까지 마치고 온 아빠가 상기된 표정으로 몇 번이나 양복을 입었다 벗으며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었다.

    창밖을 보며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던 수빈은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예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 집에서는 뭐라고 하셔?”

    “별말씀 안하셔.”

    기대하고 물었던 질문은 아니었지만, 지금 예준이 짓고 있는 표정만큼이나 재미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사드리러 간다고 얘기는 했어?”

    u o ” o'.

    “부모님 뭐 좋아하셔? 뭘 사가면 될까?”

    “됐어, 그런 거. 어차피 엄마랑 동생들은 해외에 있으니까 아버지만 뵙게 될 거야.”

    “해외에?”

    “여행중이셔.”

    자꾸만 단답형으로 대꾸하는 예준에게 뭐를 더 묻기도 민망했다.

    이 결혼의 실체를 알고 있는 게 예준의 아버지뿐이라고 하던데, 그 때문인 걸까?

    뭔가 은밀히 당부해둘 거라도 있어서?

    하긴. 워낙에 급하게 추진된 결혼이잖아.

    해외여행은 한참 전부터 예약해두신 걸 텐데, 급작스럽게 날이 잡혔으니 어쩔 수 없으셨겠지.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상견례 때 전부 보게 될 테니까.

    예준에게 따져 묻는 대신 수빈은 스스로 매듭을 지으며 그저 그렇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환영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 결혼 자체를 받아들이는 양가 집안의 분위기가

    너무도 다르다는 걸 굳이 상기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

    예준을 본 정남과 방훈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 수빈과 함께 걸어 들어오는 예준을 대면했을 때만 해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곧 귀신을 본 사람들처럼 경악을 했다.

    나중에는 또 어땠는가.

    생전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이라도 구경하는 것 같은 얼굴로 그를 관찰하기 시작하더니, 허파에 바람 든 양반들처 럼 자꾸만 실금 같은 웃음을 흘려댔다.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좋았다.

    빚은 없던 일로 하고 싶다는 예준의 말에 아주 잠깐 대치 아닌 대치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귀한 따님 데려가는 명목으로 이

    정도는 하게 해달라는 그의 달변가 같은 말에 나중에는 정남과 방훈도 못 이긴 척 대화를 매듭지었다.

    식사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뻔뻔할 정도로 멋쟁이 사위 코스프레를 해낸 예준도 볼만했지 만,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웃던 정남과 방훈의 모습을 수빈은 평생 잎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우리 예준이.”

    “자네, 예준이가 뭔가, 예준이가. 지 서방이라고 불러야지.”

    방훈의 기분 좋은 타박에 정남은 소녀 같은 얼굴로 뺨을 붉히며 웃었다.

    그런 정남을 보며 방훈은 너희 엄마가 자기랑 연애하던 시절에도 저런 얼굴을 안 했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 그리고어머니。

    밖까지 배웅 나온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던 예준이 뭔가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트렁크를

    열었다.

    잠시 후 그가 꺼내든 건, 들기에도 벅차 보이는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예준의 분위기를 꼭 닮아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꽃을 한아름 안아든 정 남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들어가면서 이미 준비해온 선물을 건넸던 터라, 수빈도 예상치 못한 거였다.

    “오는 길에 예뻐서 샀는데, 혹시 꽃 좋아하세요?”

    “아휴! 꽃 안 좋아하는 여자도 있어? 너무 예쁘匚上 세상에.”

    “다행이네요.”

    유려하게 미소 짓는 그의 뒤로 후광이 번쩍번쩍 빛나고 철 지난 벚꽃 잎이 흩날리는 착각이 일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가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네고는 수빈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싼 채 눈인사를 했다.

    “갈게,,

    “어? 어. 조심히 들어가.”

    그 분위기가 얼마나 위화감이 없었는지, 순간이나마 수빈은 예준과 어떤 사이 였는지를 망각할 뻔했다.

    마음에도 없는 연기와 부담스러운 관심을 감당해내느라 피곤했을 법도 한데, 예준은 그렇게 프로의 향기만 남긴 채 완벽한 퇴장을 했다.

    정 남은 그가 전해주고 간 꽃다발을 신줏단지 모시듯 끌어안고는 벌써부터 동네방네 자랑할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아니, 엄마. 아무리 그래도 딸이

    시집간다는데 좀……

    우리 딸은 그리 쉽게 못 주네! 어? 막 비오는 날 아침까지 집 앞에서 무릎 꿇어가며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하는 열의는 확인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건 뭐 땡처리도 아니고

    “아유, 우리 예준이가 누굴 닮아 저리 멋진지, 사돈은 안 드셔도 배부르겠다.”

    항변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벌써부터,우리 예준이라며 사위 바보를 예약해둔 정 남의 얼굴을 수빈은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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