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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1화 (21/63)
  • 21 화

    최소한의 예의나 상식이 라고는 우주 밖으로 집어 던져버린 문 여사의 무례한 언사에 앉아있던 여자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식당에서 접시나 나르는 주제에 어디 감히 우리 의사 아들을 넘보卜, 넘보길.”

    문 여사는 살얼음판같이 변해버린 분위기를 즐기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양심도 없다며 혀를 차던 그녀가 자줏빛 입술 사이로 스프 한 숟갈을 우아하게 밀어 넣었다.

    괜히 등골 터진 건 주변인들이었다.

    딱딱하게굳은얼굴이 퍽 난처한 듯 질려 있었다.

    수빈은 문 여사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살짝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즐거운 식사되세요.”

    노골적으로 들려오는 비웃음을 뒤로 한 채 수빈은 조용히 룸을 빠져 나왔다.

    문 여사가 지독하고 악랄한 사람이라는 건 이미 면역이 생길 만큼 겪어본 터라, 딱히 그녀의 태도가 새삼스럽진 않았다.

    대놓고 비아냥거 리는 태도에

    순간적으로나마 분노가 솟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다만, 비겁한 방법으로 덤비는 사람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기는 제 직장이고, 불현듯 무반응이 최고의 대처라던 예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개 짖는 소리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잖아. 피곤하게.’

    결혼식장에서 최진상을 상대하던 그의 대쪽 같은 처신이 강렬하긴 했던 모양.

    “그래. 잘 참았어。

    힘없이 웃던 그녀가 스스로의 인내를 다독였다.

    이제 겨우 첫 번째 요리가 나간 상황이었지 만, 이후에도 수빈은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으며 무사히 마지막 요리까지 서브를 마칠 수 있었다.

    “서비스는 만족하셨습니까?”

    계산을 하는 문 여사에게 이 과장이 물었다.

    “뭐,그럭저럭.”

    수빈을 아래위로 훑던 문 여사가 대답했고, 그녀가 뒤를 도는 순간까지 수빈은 영업용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

    그때 였다.

    멀어지던 문 여사가 뭔가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다시 돌아와 지갑을 열었다.

    그러고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수빈의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자, 팁이야.”

    “종일 서있느라 다리도 아플 텐데, 갈 때 택시나 타고가렴.”

    문 여사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같은 손님이라도 있어야, 버티지 않겠니? 하는 일에 보람은 못 느껴도 쏠쏠한 재미 정도는 봐야지.”

    그녀는 대단한 선심이라도 베푸는 마냥,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매장을 빠져나갔다.

    문 여사 일행이 사라진 두I, 정식은 수빈에게 다가와 그녀를 다독였다.

    “저런 사람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고 그러지 마. 고작 자기 인격 깎아먹고 간 것뿐이니까.”

    그에 수빈은 정식을 향해 돌아섰다.

    “걱정 마세요, 과장님.”

    그러고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런 사람한테 밟힐 자존심 같은 거.”

    “안 키워요, 저.”

    유난히 긴 하루를 마친 수빈은 퇴근 준비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냐, 너도.”

    막내의 인사에 경쾌하게 답한 수빈이 고개를 돌려 정식에게도 인사했다.

    “과장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봬요.”

    “그래, 들어가. 고생 많았어.”

    마지 막까지 웃는 얼굴로 탈의실을 빠져나온 수빈이 로비를 지나다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로비 옆에 있는 카페 라운지에 혼자 앉아있는 문 여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시선을 거두고 제 갈 길을 갔다.

    그런데 뒤늦게 수빈을 발견한 문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불렀다.

    ,,얘.,,

    걸음을 멈춘 수빈이 천천히 뒤를 돌자 무표정한 얼굴의 문 여사가 가볍게 손짓을 했다.

    “우리 잠깐 얘기 좀할까?”

    역시나.

    제게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게 분명했다.

    * * *

    호텔 카페 라운지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스파크를 튀기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수빈의 물음에 문 여사는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언제까지 할 거니?”

    앞뒤 다 자르고 대뜸 건넨 말에 수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른이 말하는데, 인상은.”

    “말귀 못 알아먹는 것도 여전하구나.”

    우아하게 차를 넘기는 그녀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던 수빈이 말했다.

    “용건만 간단히 하세요. 왜 찾아오신 건지.”

    영 업장에서와는 사뭇 달라진 말투와 태도의 수빈을 가만히 노려보던 문 여사가 기가 차다는 듯 실소했다.

    “그래, 이게 네 실체지. 아까는 사람들 앞에서 이미지 관리하느라 애 좀 먹었겠다?”

    “더 용무 없으시면 먼저 일어날게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탕!

    “앉아.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테이블을 내려친 문 여사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눈에 힘을 주었다.

    용건이 있어 수빈을 찾아온 건 맞지만, 있는 그대로 얘길 하려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아 뱅뱅 돌리던 참이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제 입장이 우스워지지 않고 이야기를 전할수 있을까

    문 여사는 골똘히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건호 위치가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접시 나르는 일은 좀 아니지 않니? 세일이 알아주는 호텔이긴 하지만 굳이 전면에 나서서 궂은 일 할 필요는 없잖아.”

    좀 알아듣게 얘기해줄 수 없냐고 하려는데, 그녀는 수빈이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저 할 말만해댔다.

    “할 수 있으면, 레스토랑 말고 사무직 쪽으로 옮겨보는 건 어떠니?”

    “제가 왜그래야되는데요?”

    “왜 그러긴. 우리 아들이 의산데 며느리 될 애가 식당에서 접시나 나르는 꼴을 내가 눈 뜨고 봐줄 것 같아? 우리 건호가 마음이

    여려서 너한테 자꾸 미련 못 버리니까 그나마 내가 이런 얘기라도 해주는 거야.”

    아. 수빈은 뒤늦게 그녀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가 됐다.

    그러 니까 지금 박건호가 아직도 나를 못 잎고 징징대니까 만나게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만나라고 하자니 면이 안서서 괜히 트집 잡고 늘어지는 거 아니야.

    하여간 사람 쉽게 안 변한다더니, 어찌나 여전히 악질인지.

    피식.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진 걸 어쩌지 못해 웃고 있자니, 문 여사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너 지금 어른이 말하는데 웃어? 내가 우스워?”

    그녀의 표독스런 말투에 수빈이 대꾸했다.

    “3년 만에 착아와서 다짜고짜 이러는데, 지금 제가 안 웃게 생겼어요?”

    “뭐야?”

    “아주머니가 뭔데 내가 하는 일을 눈 뜨고 봐주네, 못 봐주네 하세요 그리고 눈 뜨고 못 봐주면 뭐 어쩌실 건데요.”

    의지와는 상관없이 눌러왔던 분노가 스멀스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 여사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너 지금 아주머 니라고 그랬니?” 그녀의 말에 건호와 사귈 때 문 여사가 했던 말들이 번개처럼 수빈의 뇌리를 스쳤다.

    '누가 네어머님이니? 네가 우리 건호랑 결혼이라도 했어? 누가 들을까 무섭匚卜, 얘. 앞으론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알았니?’

    처음 그의 집에 인사를 가 문 여사를 마주한 날, 살갑게 어머님, 하고부르던 수빈에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드려요? 고객님? 아니면 어머님?”

    “너 말 다했어 기 식당에서는 찍소리도 못 하던 게, 어디 감히……!”

    “못한게 아니라, 안한 거예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문 여사가 눈을

    부라렸지만, 수빈은 아랑곳 하지 않고 대꾸했다.

    “식당에서 소란 피우면 안 된다는 건 일곱 살짜리 아이들도 알거든요.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아무데서나 발버둥 치고 울고 소리 지르는 건 애들이나 하는 행동이죠.”

    “뭐?!”

    웃음기를 모두 지운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선 채 문 여사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는 저 찾아오지 마세요 어른이 되셔서 부끄러운 줄은 아셔야죠.”

    “뭘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내가!”

    문 여사의 대꾸에 수빈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런 걸 후안무치라고 하지.

    백수 남친 뒷바라지할 동안은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주는 대로 받아먹더니, 아들이

    성공하고나니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버린 게 그녀였다.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는더I, 방훈이 사고를 당하자마자 기 다렸다는 듯 파혼을 요구했던 것도 그녀였고.

    “자기가 한 짓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이에요. 또 찾아오시면 경찰부를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것 때문에 본인은 물론이고, 부모님까지 상처 받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너, 너 나한테 이러고도 우리 건호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때처럼 또 한 번 맞아봐야 정신 차릴……

    “정신은 아주머니가 차리셔야죠. 어머니 잘 둔 덕에 건호 씨도 평생 혼자 살 팔자 같은데, 오래오래 같이 사시려면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셔야 하지 않겠어요?”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수빈의 모습에 문 여사가 뒷목을 잡는 사이.

    부己己 부己己 I--・ I-♦

    수빈의 휴대폰이 울렸다.

    수빈은 당장이 라도 물을 끼 얹을 태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문 여사를 앞에 둔 채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자기야.”

    발신자는 예준이 었다.

    [전 남친 또 찾아왔어기

    건호를 상대했을 때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뻔뻔해진 수빈의 말투에 예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이번엔 그 남자어머니가 찾아오셨네?”

    문 여사를똑바로직시하며 수빈이 대답했다.

    [어딘데.]

    “호텔 카페 라운지.”

    [나 곧로비도착하는데, 들어갈까기

    예준의 물음에 수빈이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밖에서 기다려. 금방 해결하고 나갈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수빈이 다시 문 여사를 향해 말했다.

    “저 곧 결혼해요.”

    수빈의 발언에 문 여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주머니 아니었음 이 사람 만나지도 못 했을 텐데, 그거 하나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인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저게……! 야, 너 거기 안 서기”

    문 여사가 자리를 벗어나는 수빈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자, 그녀는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아, 맞다.”

    그러고는 재킷 주머니에서 엉망으로 구겨진 만 원짜리 지폐를꺼내 테이블위에 올려두었다.

    “아까 주신 건 아주머니 살림에 보태 쓰세요. 저희 동네는 만 원으로 못 가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수빈은 카페 라운지를 벗어났다.

    “제까짓 게, 감히 !”

    멀어지는 수빈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문 여사가 부들부들 떨다가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휘어잡을 듯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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