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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부부-20화 (20/63)
  • 20 화

    턱!

    현관에 발이 걸린 건호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우당탕!

    “건호야!”

    오매불망 아들의 귀가만 기다리고 있던 문 여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건호에게 달려갔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진동하는 술 냄새가 코끝을 마구 찔러왔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니 !”

    “너, 엄마속상하게 자꾸 이렇게 할 거야기”

    문 여사의 원망 어린 주먹이 건호의 너른 등짝을 내려쳤다.

    꿈쩍도 않던 건호가 멋대로 뭉그러진 발음으로 중얼거 렸다.

    “..빈아.”

    문 여사가안간힘을 쓰며 건호를 부축했지만, 무리였다.

    “수빈아…….”

    “박건호 정신 안차려?”

    “미안해. 내가다 잘못했어.”

    다 큰 아들이 술에 취해 하는 우는소리를 애써 외면한 그녀가 늘어진 건호를 낑낑대며 질질 끌고 거실로 향했다.

    “아이고, 이놈아! 네 애미 허리 다 나가것!다! 허구한 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제발 정신 좀 차려보라고 쥐고 흔들어봐도 건호는 끊임없이 같은 이름을 반복하며 부를 뿐이었다.

    “수빈아. 내가 나빴어…….내가 나쁜 놈이야.”

    “그만 못해?!”

    보다 못한 문 여사가 윽박을 지르며 소파 아래에 박건호를 패대기쳤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애를 만나! 어? 결혼이 애들 장난이니? 조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끼리끼리 상부상조하는 게 결혼이야!”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아무리 다그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을 어떻게 헤어지게 만들었는데.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수빈이는 이제 내버려두세요. 착아가지도 마시고요.'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 하던 건호의 말에 문 여사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라며 그를 다독였었다.

    그렇게 수빈과 헤어지고 자신이 이어준 여자와 한동안은 잘 만나는가 싶었다.

    이대로 곧장 결혼까지 가나 싶었지만, 그건 그저 문 여사의 바람이었다.

    상대방 쪽에서 아무래도 결혼까지는 안 되겠다며, 일방적으로 연락을 해오더니 만나는 여자마다 족족 몇 달을 못 넘겼다.

    도무지 정착을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한 건호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잦아지고, 완강히 버티던 문 여사도 속이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상태였다.

    “어머니……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문 여사를 바라보던 건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요.”

    “그냥 죽는 게 나을거 같아요.”

    “박건호! !! 너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문 여사가 악을 쓰며 건호의 입을 막아보려 했지 만, 그는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똑바로 누워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데려가신 여자, 다시…… 돌려주세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일한 혈육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소중하고 믿음직한 아들이.

    “제 발요…….”

    아이가 돼버리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보였던 아들이 점점 곪은 속을 다스리지 못하고 반 폐인이 되간 지가 1년이 다되어갔다.

    이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나 보다.

    “내가 못살아, 너 때문에!”

    문 여사는 쓰러진 건호의 가슴 위에 고개를 파묻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미어진 가슴을 쥐어뜯으며 현실을 부정해봐도, 내 자식일이라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얼마나 흘렀을까. 동이 터오기 시작하고, 쓰러진 채 잠들었던 건호는 비척이며 일어나 출근했다.

    푸석한 얼굴로 그를 마중하던 문 여사는 한동안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다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예준이 인사를 오기로 한 날. 출근한 수빈은 긴장할 새도 없이 종일 정신없이 일을 해야 했다.

    이런 날이 가끔 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안 그래도 바쁜 평소보다 유난히 더 바쁜 날.

    손님이 줄을 지어 들어오는 일이 저녁 타임까지 이어졌다.

    슬슬 마지막 손님을 받을 때쯤.

    입구에 서있던 수빈이 므『 매장 안으로 발을 들인 손님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어서오십시오. 비향입…… 니다.”

    엇박자로 이어진 그녀의 인사가 매끄럽지 못하게 흘러나온 게 불쾌했는지, 여자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구겨졌다.

    “인사를 왜 더듬지?”

    느릿느릿 그녀를 지나치던 여자가 수빈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며 그녀의 왼쪽 가슴 위에 달린 명찰에 시선을 던졌다.

    “부지배인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프로페셔널하지 못해서야, 원.”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니?”

    수빈은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혀를 차며 독설을 퍼붓는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박건호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시어머니가 될 뻔했던 여자이자,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녀를

    직장에서 마주쳤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무려 3년 만에 만난 그녀의 태도는 엊그제 만났던 사이인 마냥,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잠시 굳어있던 수빈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빠르게 문 여사의 곁으로 다가섰다.

    “실례합니다. 고객님. 예약하셨습니까?”

    “안 했는데?”

    “죄송하지만 홀은 만석이라, 이용이 어려우시고……

    “룸으로 주면 되잖아?”

    “네,고객님 룸은 코스 요리만 주문

    가능하신데, 괜찮으시면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 다.”

    매장 내 이용 수칙을 설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 여사의 인상이 순식간에 표독스러워졌다.

    또각또각 울리던 구두 소리가 일순 멈추며 정적이 찾아들었다.

    “야.,,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수빈을 매섭게 노려보던 문 여사가 노기 어린 언성을 씹어뱉었다.

    그녀를 응시하던 수빈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이용 수칙을 안내해드린 것뿐입 니다만,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 다.”

    건호가 의사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빠듯하게 뒷바라지를 했던 문 여사였다.

    물론 아들이 의사가 됐다고 해시 하루아침에 돈벼락을 맞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전부터 능력에 비해 과시가 심했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자격지심도 심했고.

    고의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매뉴얼대로 했던 행동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건 확실했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얼른들어가자. 연정아.”

    일행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슬쩍 문 여사의 팔을 잡아끌며 상황을 무마하려했다.

    멀리서 상황을 주시하던 이정식 과장이 달려왔다.

    “실례합니다. 고객님, 무슨 일이십니까?”

    비향의 총책임자인 그의 등장에 문 여사가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그쪽이 여기 최고 책임자예요?”

    “네.그렇습니다.”

    “도대체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예요?”

    인상만큼이나 표독스러운 말투가 한껏 가시를 세운 채 정식에게 향했匚卜. 그녀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조목조목 따지듯 열거했다.

    정식이 곧장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고객1d. 제가 룸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 다.”

    매뉴얼에 관한 양해를 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미 수빈이 알아서 처신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달이 난 거라면 이런 손님에게는 이해라는 게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녀는 그저 사과가 받고 싶은 것이었을 테다.

    정식이 앞장서는데, 문 여사가 버티고 선 채 수빈을 향해 말했다.

    “그 전에 난 얘한테 제대로 사과 받고

    가야겠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빈이 정중하게 상체를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 런 상황에서는 말문이 막힐 만큼 빠르고 공손하게 사과하는 게 최고의 처신이라는 걸

    잘 아는 수빈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문 여사는 말문이 막힌 듯, 그녀를 노려보기 만 했다.

    정수리가 따가웠지만, 그녀도 딱히 더 흠잡을 명목은 없었던 듯 일행과 정식을 따라 못 이기는 척 자리를 떴다.

    수빈은 굳게 닫힌 룸 문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일하는 줄을 뻔히 알면서, 무슨 꿍꿍이인 걸까.

    건호와 사귈 때도 보통 못마땅해 하던 게 아니라 깔끔히 헤어져줬건만, 도대체 뭐가 성에 안 차서 직장까지 챂아와 이 난리인지 모를 일이다.

    잠시 후, 안내를 마친 정식이 룸을 빠져나와 수빈을 착았다.

    “수빈아,,

    “네, 과장님.”

    “저 손님이 굳이 네 서브를 받아야겠다고 고집부리시는데……괜찮겠니?”

    역시나 제게 볼 일이 있어 온 게 분명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성정이라면 수빈이 올 때까지 버티겠다고 억지를 부리고도 남을 테니까.

    “네,제가서브들어갈게요 과장님. 걱정 마세요.”

    수빈이 덤덤히 웃어 보이며 외려 정식을 안심 시켰다.

    귀찮은 숙제, 빨리 해치워버리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오더를 넣고 첫 번째 음식이 준비되었다.

    노크를 한 후 약간의 텀을 둔 수빈이 룸 안으로 걸음 했다.

    “실례합니다.”

    문 여사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들은 친구 사이인듯했다.

    “게살 스프 올려드리겠습니 다.”

    간단한 요리 설명과 함께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리는 동안 그녀들은 저마다 근황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러다가 문 여사가 수빈을 향해 툭 던지듯 물었다.

    “참. 아버지는 몸 좀어떠시니?”

    그녀가 그릇에 담긴 게살 스프를 휘휘 저으며 시선도 주지 않고 묻는 말에 잠시 침묵하던 수빈이 대답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럼 엄마는? 아직도 학교 앞에서 떡볶이 파시 니?”

    “왜 대답이 없어? 내가 부끄러운 걸 물었나?” 부끄러운 질문을 한 게 아니라, 수치를 주기 위해 던진 질문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시선이 모두 수빈을 향했다.

    삽시간에 무거워진 공기에 슬슬 눈치를 보던 일행 중 하나가 조심히 끼어들었다.

    “연정아. 너아는 아가씨였어?”

    그에 문 여사는 기다렸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 예전에 우리 건호 잠깐 쫓아다니던

    애야.”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진 입술이 다시 열렸다.

    “제 주제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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